따뜻한 우체부 :: 믿고 타는 오프로더, 랜드로버 디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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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마음속으로 준비한 로드트립. 전설적인 오프로더를 타고 국내 오지 산골을 찾아 떠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과연 신형 디펜더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까?

 

영국이 거침없이 오프로드를 누비며 전설을 써 내려간 랜드로버 디펜더의 탄생지라면, 70%가 산지인 우리나라는 이런 디펜더의 명성을 확인하기에 더없이 좋은 테스트 장소다. 신형 디펜더 상륙 소식을 듣자마자 국내 오프로드를 달리는 여정을 계획한 이유다. 

랜드로버 측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도 남을 역대급 디펜더라고 주장한다. (바로 앞 기사에서 <탑기어> 올해의 차로 선정된 것을 봐서 알겠지만, 어느 정도 신빙성 있는 주장이다). 70년간의 혁신을 통해 갈고 닦은 오프로드 성능으로 가지 못하는 지형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하지만 야성미는 전부 어디로 간 건지 디자인이 말끔하다 못해 세련되게 변했다. 외모만 봐서는 그들이 주장하는 오프로드 성능에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하루빨리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차를 받자마자 짐을 싸서 떠났다. 최종 목적지는 전라북도 아주 깊숙한 곳, 무주 구천동으로 정했다. 예로부터 첩첩산중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오지 중의 오지다. 깊은 계곡을 따라 9000개의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는 명소이기도 하다. 디펜더를 테스트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 많을 터였다. 

고속도로를 따라 서울에서 대전까지 달린 뒤에 일반도로로 빠져나왔다. 여정의 대부분을 지루한 고속도로 위에서 보내긴 싫었다. 게다가 마침 졸음이 쏟아지려는 참이었다. 디펜더는 의외로 온로드 주행성이 괜찮다. 초당 최대 500회 차체 움직임을 분석하고 즉각 반응하는 똑똑한 가변 댐핑이 차체 롤을 억제하고 노면 충격은 최대한 흡수하면서 부드러운 승차감을 끌어낸다. 

 

고속주행 시 핸들링도 제법 날카롭다. 솔직히 온로드 주행성이 인상 깊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한없이 편안하고 부드러운 디펜더는 우리가 바라던 차가 아니다. 다른 SUV였다면 마땅히 칭찬받아야 할 부분이지만, 디펜더는 걸어온 길이 다르다. 개척자, 탐험가, 모험가 양반이 왜 이제 와서 타고난 재능을 버리고 교양 있는 척하는 걸까? 

더욱 거칠어진 후속작을 상상했는데, 마치 워커 신은 신사 같았다. 판매량을 의식한 결정이었을 터다. 정통 오프로더는 찾는 사람만 찾기 때문에 수요가 적은 게 사실이니까. 게다가 이전 세대의 거친 외모는 오프로드 마니아들만 열광할 디자인이기도 했다. 

 

무주군에 진입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구불구불 산길이 이어졌다. 코너 한 번 돌면 동서남북이 휙휙 바뀌는 거친 고갯길도 서너 개 지났다. 서울에서 출발해서 고속도로에 올라탔을 때부터 기름값은 생각하지 않고 43.9kg·m 토크를 노면 위에 사정없이 쏟아냈는데, 연료탱크에 기름이 절반 이상 남아 있었다. 

연료탱크 용량(85L)이 크다고 해도 가속 페달을 짓이기며 2.5t짜리 차체를 끌고 다닌 것 치곤 만족스러운 연비다. 랜드로버가 밝힌 디펜더의 연료효율은 1L에 9.6km이지만, 4기통 2.0L 인제니움 디젤 엔진은 체감상 훨씬 더 효율이 높은 듯했다. 

 

앞섬마을이란 곳에 처음 멈춰 섰다. 금강이 빙 둘러 거의 한 바퀴 굽이도는 운치 있는 마을이었다. 한참을 운전한 터라 잠시 휴식이 필요했다. 복잡한 도시에 살다 보면 종종 들르는 이런 한적한 산골은 정말이지 좋은 힐링 장소다. 아니면 이제 나이가 든 건가?

강변 벤치에 앉아 잠시 사색에 잠겨 있다가 함께 온 동료 기자를 쳐다봤다. SUV를 끔찍이도 싫어한다던 그는 디펜더와 사진 놀이가 한창이었다. 디펜더를 주제로 열린 사진 공모전이라도 참가하는 건지 강가를 배경으로 최고의 한 컷을 건지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이 정도면 SUV를 싫어한다는 건 말뿐인 게 확실했다. 

 

세워놓고 자세히 보니 신형 디펜더의 외모가 의외로 대자연 속에 잘 어우러졌다. 2m에 육박하는 높이와 너비가 늠름한 자태를 뽐냈다. 시승차에 적용한 익스플로러 팩(루프랙, 사이드 캐리어, 휠아치 프로텍션, 스노클 에어 인테이크, 머드 플랩, 보닛 데칼)은 부드러워진 이미지에 오프로더 감성을 더해 야성미 넘쳤던 예전의 모습을 되살려 줬다.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해가 지기 전에 절경이 펼쳐진 오프로드로 뛰어들고 싶었다. 산 하나를 정하고 계속 한 방향으로 달렸다. 어느샌가 포장도로가 끊겼고, 디펜더는 흙먼지를 날리며 달렸다. 이런 흙길은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굳이 주행 모드를 바꾸지 않아도 충분히 소화 가능했다.

 

숲이 우거진 산골 어귀에 다다르자 이제야 제법 길이 험해졌다. 옆자리에 앉은 동료 기자는 준비됐다는 눈빛을 보냈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어떤 일이 생겨도 함께 책임을 지자는 무언의 합의로 생각했는데, 그도 그런 뜻으로 받아들였을지는 모르겠다. 

 

잔가지가 무성하게 길을 막아서는 것을 보면 이 산길은 통행이 많지 않은 게 분명했다. 길 위로 뻗친 나뭇가지를 헤치며 천천히 움직였다. 토사가 잔뜩 쌓인 길에선 트랙션이 다소 불안해졌다. 터레인 리스폰스가 빛을 발할 차례였다. 정말 험한 오프로드가 아니면 그냥 자동으로 두는 게 낫다. 차가 주행 조건에 맞게 네 바퀴에 알아서 토크를 분배한다. 디펜더는 좌우로 조금씩 밀리는 듯하더니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기며 안정적으로 나아갔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전방에 길이 유실된 듯 보였다. 지난 장마 때 내린 비 때문에 경사면이 무너진 게 아직 복구가 안 된 모양이었다. 길은 반 토막 났지만, 잘하면 지나갈 수 있을 듯싶었다. 혹시라도 차가 잘못될까 무서워 동료 기자에게 나가서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 엄동설한에 밖으로 내몰리는 게 싫었는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차에서 내렸다. 그래도 아쉬웠는지 차를 돌려 나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의 수신호를 주시하면서 종종걸음으로 차를 움직였다. 실수로 바퀴를 헛디딜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아니면 잘 가다가 땅이 갑자기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미 한 번 무너졌던 곳이 아닌가. 

 

게다가 디펜더는 차체 무게가 2505kg이니까 정말 위험할 수 있었다. 디펜더에게 도대체 뭘 먹어서 이렇게 살이 쪘냐고 원망이라도 하고 싶었다. 최악의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무너지는 지반 아래로 미끄러질 때 힐 디센트 컨트롤이 속도를 늦춰 줄 수 있을까? 긴장하니 별 바보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360도 카메라를 켜자 주변 상황이 생생하게 보였다. 한쪽으로 최대한 붙어서 움직이니 문제없이 위험 구간을 통과할 수 있었다. 낭떠러지와 거리가 한참이나 남았다. 동료 기자를 그냥 차에 타라고 해도 될 뻔했다. 디펜더가 여유롭게 통과하는 모습을 보고는 동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터다.

 

안타깝게도 디펜더의 도강 실력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아까 산길을 오르기 전 강 하류에서 물을 봤지만, 물이 없는 계절이라서 그런지 수심이 너무 낮았다. 최대 900mm 깊이 물을 건널 수 있는 디펜더에게 이런 곳은 유아용 풀 수준이었다. 디펜더는 센서를 이용해 물의 깊이를 파악하고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에 표시해주는 도강 수심 감지 기능을 전 트림에 기본 탑재했다. 

산길을 따라 얼마나 올라왔을까? 자갈길을 지나 이제 암석을 타고 넘고 있었다. 터레인 리스폰스도 아예 암석 모드로 바꿨다. 여유로운 접근각과 이탈각을 확보하기 위해 차체를 허용하는 한계치인 145mm까지 들어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불안해서 바닥 상황을 시원하게 보여주는 클리어 사이트 그라운드 뷰까지 켰다. 보닛을 투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카메라가 미리 찍어놓은 화면을 차가 전진하면서 계속해서 이어 붙이는 방식이기 때문에 실시간 화면은 아니다. 지상고가 높아서 바닥 상황은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많기 때문에 장애물이 있는지 확인하는 용도로 사용하면 좋다. 

 

 

산에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다. 빨갛게 타오르던 하늘도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구릉 지대를 따라 빠져나왔다. 2열 시트를 접고 준비해온 침낭을 깔고 누웠다. 2380L의 넓은 공간은 둘이 눕기 충분했다. 휴식을 취하면서 생각했다. 한층 부드러워진 외모는 소비자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한 배려일 뿐 디펜더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신형 디펜더에는 전 세대가 오프로드 위에서 쌓아온 열정과 기술이 여전히 진하게 스며있다. 충분히 짓궂게 다뤘다고 생각했지만, 디펜더는 여유 넘치는 태도로 험로를 가로질렀다. 마치 대자연의 지배자가 된 듯했다.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디펜더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오프로더 세계의 왕이었다.

 

 

 박지웅 사진 이영석, SUGAR PILL

자동차 전문 매체 <탑기어 코리아>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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