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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역사의 시작점인 구미권의 자동차 산업은 19세기 말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자동차 산업사는 두 세기를 넘나드는 세월 동안 차근차근 성장해 왔고, 산업으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의 역사이자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은 이들에 비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성장 속도만큼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지금은 세계 10대 자동차 생산국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현재 국내의 자동차 산업은 조선,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과 함께 대한민국 경제를 책임지는 제조업의 중추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은 한국전쟁 이래 미군들이 버리고 간 지프 등의 차량 부속을 주워모으고 드럼통을 펴서 차체를 만드는 원시적인 단계부터 출발했지만 한 세기도 되지 않는 시간에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자동차 강국으로 우뚝 섰다. 

물론 그 중간에는 원천기술을 가진 해외의 자동차 제조사들을 끌어들여, 그들과 기술제휴를 맺고 그들의 차들을 만들어 왔던 시간이 있었다. 전후 빠른 수복을 이루며 눈부신 경제 성장을 하고 있었던 대한민국을 아시아 시장으로의 진출을 원했던 다국적 기업들이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외국계 기업들과의 제휴로 인해,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에는 피아트 124와 같은 소형 승용차부터 신진 크라운 등의 중~대형 세단들까지 출시될 수 있었다. 이번 기사에서는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이 발흥하고 있었던 1980년대의 고급세단들을 둘러본다.

현대자동차 그랜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현대자동차는 포드자동차의 그라나다를 플래그십 모델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그라나다는 6기통 엔진을 사용했기에 의전차량으로서의 수요도 기대할 수 없었다. 1980년대 당시 상공부가 석유파동을 이유로 장관급 의전차량을 4기통 차량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가격도 지나치게 비싸서, 기아산업이 생산하던 푸조 604와 마찬가지로 판매량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이 뿐만 아니라 현대자동차는 포니의 개발 이래 단계적으로 포드와의 제휴관계를 정리하고 있었기에, 그라나다를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포드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플래그십 대형세단 모델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에 미쓰비시는 급속한 성장세를 보이며 이미 자사에 비해 훨씬 대규모의 설비까지 갖추게 된 현대차의 역량에 주목했다. 그리고 현대차에 새로운 고급 승용차를 공동개발하는 프로젝트를 먼저 제안하게 된다. 프로젝트의 내용은 차량의 개발 및 설계는 미쓰비시가 주도하되, 차량의 생산은 현대차가 담당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렇게 양사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공동으로 개발하게 된 차는 일본에서는 2세대 '데보네어(Debonair)', 한국에서는 초대 '그랜저(Granduer)'로 불리는 전륜구동 고급세단이 등장하게 된다.

1986년 시장에 등장한 초대 현대 그랜저는 순식간에 시장의 이목을 잡아 끌었다. 그랜저는 등장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대우 로얄 패밀리를 뒤흔들었다.  당시 국내 고급세단 시장의 입맛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극도로 보수적이고 과시적인 외관과 전륜구동의 상대적으로 우수한 연비와 주행특성, 그리고 다양한 고급 편의장비 덕분에 그랜저는 이 가장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2.0리터 이하급 엔진만 존재해 성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은 대우 로얄 패밀리에 비해 2.4리터 V6와 3.0리터 싸이클론 V6 엔진을 전면에 앞세워 성능 면에서도 압도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뛰어난 상품성을 바탕으로 현대 그랜저는 10년 넘게 대우 로얄 시리즈가 틀어 쥐고 있었던 국내 고급세단 시장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랜저는 등장과 동시에 대우 로얄 시리즈를 단숨에 밀어내고 대한민국 고급세단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다. 

대우자동차 슈퍼살롱
1980년대는새한자동차, 그리고 대우자동차에게 있어 마지막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던 시절이다. 이 당시 고급 승용세단 시장을 오펠 레코드(Opel Rekord) 기반의 로얄 시리즈로 완전히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우자동차는 로얄을 고급 버전인 '로얄살롱'과 중급 버전인 '로얄프린스', 그리고 접근성을 높인 저가형 버전 '로얄XQ'로 이어지는 세단 3종 라인업을 완성했고, 여기에 그랜저의 등장 직전에는 로얄살롱을 더욱 고급화한 '로얄살롱 슈퍼'를 추가했다. 그러나 야심차게 내놓은 최고급 세단 로얄살롱 슈퍼가 그랜저의 등장으로 인해 순식간에 힘을 잃으면서 대우는 로얄살롱 슈퍼를 대대적으로 개량한 모델을 내놓는데, 이 차가 바로 슈퍼살롱이다.

대우 슈퍼살롱은 로얄 살롱 슈퍼의 전면부를 그랜저처럼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색채가 짙은 스타일로 변경한 것이 특징인데, 이는 당시 대우자동차 부평연구소에서 직접 디자인한 것이다. 여기에 오늘날 롤스로이스 등 최고급 세단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상하부 투톤 컬러도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반설계부터 근본적인 혁신이 없었던 슈퍼살롱은 그랜저를 끝내 이겨낼 수 없었다.

대우자동차 임페리얼
슈퍼살롱의 실패를 거울 삼은 대우자동차는 오일쇼크로 인해 백지화되었던 그들의 6기통 세단 프로젝트를 다시 꺼내들었다. 그리고 대대적인 수정 및 보완을 거쳐, 맹렬한 기세로 시장을 장악한 그랜저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리고자 했다. 대우자동차가 내놓을 새로운 대형세단은 (당대로서는)신개념의 디자인과 최신 편의사양, 그리고 오펠의 모트로닉 직렬 6기통 엔진을 한데 버무려 완성되었다. 이 차가 바로 1989년 등장한 대우자동차의 '임페리얼'이다.

대우 임페리얼은  그랜저를 굉장히 의식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프론트 마스크와 더불어, 당대 가장 긴 차체를 지녔다. 하지만 여기에 임페리얼만의 특징으로서 당대 미국의 고급세단에서 사용되었던 캠백(Camback) 스타일의 C필러를 적용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 당대 최강의 성능을 자랑했던 184마력의 3.0리터 직렬 6기통 모트로닉 엔진을 탑재했고, 항공기 실내의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송아지 가죽으로 마감한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그리고 그랜저에게 밀리지 않는 다양한 편의장비를 갖췄다.

대우자동차가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한 임페리얼은 상기한 강점들과 더불어, 로얄 시리즈의 최신/최고급 세단이라는 점이 후광 효과로 작용하여 그랜저의 점유율을 조금씩 빼앗아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임페리얼의 앞길은 전혀 순탄치 못했다. 오펠의 3.0리터 모트로닉 직렬 6기통 엔진은 냉각 계통이 부실하여 주행 중 과열이 빈번하여 신뢰성이 떨어졌고 유럽산 엔진 특유의 소음도 당시 고급 승용차 소비층의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 게다가 잔고장이 많고 품질도 좋지 못해 고급 승용차의 이미지를 스스로 갉아 먹었으며, 결정적으로 싸이클론 V6 엔진을 얹은 그랜저 3.0이 등장하며 몰락했다. 그리고 1993년 단종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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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올드카. 이번 시간에는 한국의 올드카를 모으고 복원하는 이들을 만났다. 완벽한 복원을 위해 365 24시간 레이더를 돌린다는 그들의 이야기.

 

 

 

대중들이 즐기는 자동차 문화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튜닝, 모터스포츠, 세차 등 세세하게 나누자면 분야도 무척 다양하다. 그중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분야는 역시 올드카 혹은 클래식카라고 부르는 문화다. 오래된 자동차를 수집하고, 자신의 취향 혹은 순정 상태를 향해 복원하는 문화는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문화에 흠뻑 빠진 A B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이 올드카 문화에 빠져들고 즐기는 이유는 다양하다. 이 취미를 가진 지 올해 8년 차에 접어든 A B는 과거의 향수로 시작했다고. “지금 수집한 자동차들은 모두 어린 시절 추억이 있는 자동차들입니다.” 현대자동차 포니, 그랜저, 기아 베스타를 포함해 다양한 올드카를 모으고 복원한 그는 차마다 얽힌 이야기를 풀었다.

 

기아 베스타는 저희 고모부님께서 타셨던 차입니다. 어린 시절 이 차를 타고 친척들과 함께 여름휴가를 보내던 기억이 생생해요. 흔히 각그랜저라고 말하는 이 차는 제가 갓 취업한 당시 카센터 사장님 때문에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복원한 이 차와 같은 색상에 같은 옵션이었어요. 뒷좌석엔 아기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당시에는 언제 저런 차를 타보나 싶었는데, 그때가 90년도였으니 약 30년이 지나 꿈을 이룬 셈입니다. 제가 모은 차들은 단 한 대도 아무 이유 없이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져오는 차들은 그의 기억은 물론, 그 차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했다. “포니 승용 역시 특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 차주는 수원에 계시는 할아버님이셨습니다. 40년간 차를 아끼고 관리하셨어요. 제가 이런저런 부품을 구해드리면서 도와드렸는데, 그런 모습에 제게 연락을 주셨어요. 이 차의 다음 주인으로 저를 선택하신 거죠. 차를 가져오는 날 한참을 운전석에 앉아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이렇듯 다양한 이야기를 가지는 올드카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복원될까? 이 취미를 시작하는 개인의 경우는 자본과 시간 등 많은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A는 복원은 물론 유지관리에 필요한 부품을 찾는 것이 가장 큰 일이라고 전했다. 비용은 물론이고 시간도 무척 오래 걸린다. 특히 현대자동차와 기아의 옛 모델들은 부품을 구하는 일이 까다롭다고 전했다.

 

 

부품은 발품을 팔면 구해지긴 구해집니다. 다만 그 과정에 쏟는 시간과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마니아들이 아는 루트가 따로 있기도 하고 말이죠. 부품을 미리 비축하고,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파는 이 과정 자체를 즐겁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만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특히 한국자동차복원연구소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도저히 구하지 못하는 부품은 직접 만들어 주시기도 하니까요.”

 

이렇게 부품이 구하기 어려운 데에는 국내의 법규도 영향을 끼쳤다. 현행법상 하나의 모델이 단종된 후 그 모델의 부품은 8년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이후에는 대리점들의 재고 부담 등을 이유로 제조사가 부품을 회수해서 폐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00년에 가까운 자동차의 부품마저 신품으로 보관하고 있는 해외의 경우와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간혹 국내에서 미국으로 수출되었던 자동차의 부품이 미국 부품시장에 남아있어 그 부품을 다시 사 오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수입차 복원보다 국산차 복원의 난도가 훨씬 높다. 애초에 부품을 구하는 난이도 자체가 다르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원 후의 쾌감이 더 크다고도 말한다.

 

 

게다가 당시 연식과 트림에 맞춰 부품을 맞추는 고증도 이 바닥에서는 중요하게 여긴다. 고증이 완벽할수록 더 높은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부품을 구하지 못해 다시 제작해야 할 때는 당시의 모습과 동일한지 까다로운 고증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고증이 가능한 이유는 한국자동차복원연구소가 가진 풍부한 자료 덕분이다. 때로는 제조사가 가지고 있지 않은 자료도 보유하고 있어 올드카 복원에 큰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그러한 노력 덕분에 길게는 5년 이상 걸리던 복원이 최근에는 1년이면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렇게 어렵게 복원한 올드카의 관리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A는 몇 가지 노하우를 전했다. “이 차들을 유지하기 위해 가급적 한 달에 두세 번은 도로에 나갑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차의 상태를 몸으로 느끼죠. 만약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고 판단하는 부분은 즉시 정비하면서 컨디션을 유지합니다. 또 도장면의 보호와 차체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언제나 실내에 주차합니다. 이 당시의 차들은 어쩔 수 없이 부식에 약하거든요. 이 과정 자체가 무척 즐거운 일이고 남들의 시선을 받는 것도 즐깁니다. 죽은 것을 되살리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죠.”

 

 

A B가 이 문화에 처음 뛰어들었던 8년 전과 비교해서 지금은 어떤 변화가 있을까? 최근 각광받고 있는 문화인만큼 주변의 시선을 비롯해 많은 발전이 있을 것은 분명했다. 특히 올드카들이 출시되었을 때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들이 이제는 경제력을 가진 기성세대로 성장해 향수를 찾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현대자동차가 아이오닉5, 그랜저 등을 광고하며 헤리티지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 시너지를 내고 있다.

 

B는 이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일반인들이 노력하는 만큼 관련 법규와 정책들이 뒷받침되지 않고 있는 것을 토로했다. “국내 법규는 자동차 문화 선진국들에 비교하면 한참 뒤떨어져 있습니다. 선진국들은 오래된 자동차들이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고, 주행 거리가 짧으니 보험료와 세금도 줄여주고, 언제든지 말소했다가 필요하면 다시 등록하는 등의 제도가 꼼꼼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업화의 역사가 짧으니 아직 정부의 인식이 부족한 것이죠. 이 올드카들이 1년에 1000km 달리면 많이 달리는 편인데, 이 차들이 매연을 배출해봐야 얼마나 배출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서울 시내에 진입조차 못 하게 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도들을 개선해서 서울 시내에도 40, 50년 된 포니, 브리샤가 돌아다니면 얼마나 좋은 구경거리가 될까요? 이런 기본적인 제도가 받쳐줘야 일반인들의 인식도 자연스럽게 좋아질 것입니다.”

 

 

올드카 문화가 급격히 성장한 데에는 투자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이 역시 개인의 성향에 따라 나뉜다. A는 단순히 소장이 목적이기에 꾸준히 차들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계속 무언가를 부지런히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어요. 게으른 사람은 못 하는 취미라고 생각합니다.”

 

B는 조금 달랐다. “솔직히 저는 투자의 목적이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진 것들이 지금 당장의 재산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지금 당장 판매에 목적이 있는 것도 분명히 아니고요. 하지만 저의 손자, 증손자까지 이 차들을 좋은 상태로 보존하면, 100년 뒤에도 이 차들이 멀쩡히 굴러다니는 상태면 그 가치는 어떨까요? 저의 자손들이 조상 덕을 보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보물창고 구경을 마쳤다. 이 정도 복원된 올드카를 보는 것만 해도 진귀한 볼거리인데, 이보다 더 귀한 차들은 어딘가에 꽁꽁 숨어있다고 전했다. 알면 알수록 신기한 문화다. 이 문화가 더욱 커지고, 사람들의 시선이 좋아지는 날에는 숨어있던 보물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까? 더 나은 문화를 위해 많은 이들이 노력해야 하는 시점이다.

 

 | 조현규  사진 | 최재혁

 

자동차 전문 잡지 <모터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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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는 사업 초기에 마쓰다 K360 계열 삼륜차를 시작으로 중소형 상용차를 중심으로 자동차 사업을 꾸려왔다. 또한 기아가 최초로 생산하기 시작한 사륜자동차 역시 준중형급 화물차 모델인 복사(Boxer)였다. 기아가 최초의 승용차 모델인 브리사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73년도의 일이었다. 

기아는 1970년대 후반부터 고급 승용차를 갖고자 했다. 1978년 상공부의 6기통 자동차 생산 제한 조치가 해제됨과 더불어 노후화된 관용차량 교체수요가 발생하면서 고급 자동차에 대한 수요가 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태생적으로 중소형 상용차로부터 출발해 승용차로 사업을 시작했던 현대나 GMK(現 한국지엠)에 밀리던 인지도를 극복하고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는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었다.

이에 기아는 푸조 604, 머큐리 세이블, 포텐샤, 그리고 엔터프라이즈 등에 이르는 일련의 대형세단 라인업을 유지하며 현대자동차와 대우자동차 등의 경쟁자에 맞서 왔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국내의 대기업들이 줄도산을 맞는 가운데, 기아 또한 모회사인 기아그룹의 경영악화로 인해 과거에 가장 큰 경쟁상대였던 현대자동차에 인수합병되는 신세를 맞게 되었다. 

현대자동차에 인수될 당시, 기아는 절치부심으로 준비했던 기함 엔터프라이즈를 가지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는 출시 당시에는 국산차 최대의 크기와 최고의 호화로움을 갖춘 최고급 세단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97년 외환위기와 그로 인한 모회사의 부도, 그리고 '벤츠 기술'을 등에 업은 쌍용자동차의 체어맨의 등장으로 앞길에 먹구름이 자욱하게 낀 상태였다. 게다가 1999년에는 현대자동차에서 '초대형 세단'을 표방한 에쿠스를 내놓으며 엔터프라이즈는 시장에서 존재감을 잃었고, 결국 2002년, 새롭게 제정된 배출가스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단종을 맞고 만다.

이렇게 엔터프라이즈가 단종을 맞게 되자, 기아자동차의 플래그십 세단은 한동안 공백 상태에 놓이게 된다. 또한 합병 이전에 준비하고 있었던 프로젝트명 'SJ'라는 이름의 고급 세단 개발 계획마저 백지화되었다. 현대자동차가 기아차를 인수하게 되면서 일본 마쓰다와의 제휴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 당시 현대자동차는 다이너스티의 후속차종으로 프로젝트명 'GH'를 새롭게 개발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만 해도 다이너스티는 이미 구식화된데다 그랜저 XG는 기존 그랜저 대비 한 체급 낮아지면서 갭이 커졌기에, 이를 빠르게 메워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자동차는 기존의 다이너스티를 유지하는 대신, 자사가 개발하고 있었던 프로젝트명 GH를 기아에 넘겨주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차가 바로 오피러스다. 

'남의 집 자식', 기아의 맏형이 되다
2003년 등장한 오피러스는 출신 성분부터 기아자동차와는 전혀 달랐다. 상술한 바와 같이, 현대자동차에서 개발하고 있었던 차종을 기아가 넘겨 받은 것이었기에 기존 기아차와의 연결고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피러스는 그랜저 XG의 플랫폼을 기반으로 개발된 전륜구동 대형세단이다. 당시에는 차량의 체급 때문에 다이너스티의 오래된 미쓰비시 데보네어(뉴 그랜저) 플랫폼을 바탕으로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그랜저 XG의 것을 활용했다고 한다. 이 차는 여러 부분에서 현대자동차의 흔적들이 많이 드러나는데, 대표적인 요소로는 초기형의 센터페시아 디자인, 다이너스티와 같이 독립된 4등식 헤드램프, 그리고 준대형급 이상부터 후륜구동을 사용해 왔던 기아의 모델들과 달리, 전륜구동을 사용한다는 점 등이다. 차명인 오피러스(Opirus)는 라틴어로 황금의 땅(Ophir Rus)를 의미한다고 하며, 기아의 설명으로는 '의견 주도층(Opinion Leader Of Us)'을 의미한다고 한다.

오피러스는 첫 등장 당시부터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특유의 외관 디자인이 큰 화제가 되었다. 1986년 그랜저의 등장 이래 그동안 직선적이고 권위적인 디자인이 주류를 이뤄왔던 그동안의 국산 고급세단과는 여러모로 다른 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오피러스의 외관은 처음 출시했을 때에는 국내 자동차 관련 미디어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상당히 부정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재규어를 어설프게 따라한 것 같다"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반응은 물론, 그 특유의 라디에이터 그릴을 두고 "생선 뼈" 내지는 "매미 같다"는 등으로 조롱 섞인 반응도 나왔다.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은 디자인은 오피러스에게 있어서 두고두고 단점으로 꼽혔다. 이 뿐만 아니라 현대차의 대형세단인 에쿠스와 다이너스티와 비교되면서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듯한 애매한 포지셔닝으로도 말이 많았다. 이로 인해 초기형 오피러스는 신차임에도 판매량이 신통치 못했다.

파워트레인은 그랜저 XG와 다이너스티에 모두 사용했던 3.5리터 V6 시그마 엔진을 시작으로, 3.0 V6 시그마 엔진을 주력으로 삼았다. 그 외에는 그랜저 XG에 사용했던 2.7리터 델타 엔진도 고를 수 있었다. 이 뿐만 아니라 2005년부터는 에쿠스부터 적용하기 시작한 신형 엔진인 3.8 V6 람다 엔진이 추가되었다. 변속기는 자동 5단 변속기를 사용했다.

대대적인 변화로 초기의 악평을 떨쳐내다
하지만 2006년도의 페이스리프트를 전후하여, 오피러스는 일대 변신을 꾀하게 된다. 제원 상 변경된 부분은 전장이 20mm 더 길어진 것 외에는 없지만, 외관 디자인, 특히 전면과 후면의 디자인에 큰 변화를 주어, 초기형과 크게 달라진 인상을 갖게 되었다. 2006년 출시된 뉴 오피러스는 초기형의 기조를 잘 살리면서도 한층 완성도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초기형 오피러스에 씌워진 '비호감' 이미지에서 슬슬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인테리어 또한 대대적으로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더욱 차별화된 제품 구성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에 설계 기반 또한 달라졌다. 뉴 오피러스부터는 신설계인 그랜저 TG의 플랫폼으로 변경하게 되면서 기존 오피러스 대비 거의 다른 차가 되었다. 새로운 설계 기반이 적용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파워트레인을 채용한 것 뿐만 아니라 섀시 면에서도 큰 진보가 이루어졌다. 특히 알루미늄과 마그네슘 합금 소재를 대폭 적용해 130kg에 달하는 경량화를 달성, 주행 성능과 질감도 대폭 향상되었다. 파워트레인은 그랜저 TG에 사용된 2.7리터 뮤 엔진과 3.3/3.8람다 V6 엔진을 적용해 동력성능과 연비 면에서도 개선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달라진 오피러스는 2008년 출시한 현대자동차의 초대 제네시스(BH)와 더불어,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내기 시작했다. 현대 제네시스가 후륜구동 기반의 새로운 고급 승용차를 찾는 소비자에게 어필했다면, 오피러스는 전륜구동 기반의 전통적인 고급세단을 요구하는 소비자에게 어필하며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대대적인 진보를 이루며 재평가를 얻은 기아 오피러스는 2009년 또 한 번의 변화를 맞게 된다. '오피러스 프리미엄'이라는 이름으로 변화를 맞은 오피러스는 당시 기아의 새로운 디자인 요소로 적용되기 시작한 호랑이 그릴을 적용했고 전반적으로 깔끔하게 현대적인 감각으로 다듬어진 외관을 가졌다. 또한 당시 고급차종을 중심으로 도입되고 있었던 LED 등화류를 적용해 한결 세련된 외관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 파워트레인에도 변화가 생겼다. 엔진 자체는 2.7리터 뮤 엔진과 3.3/3.8람다 V6 엔진으로 동일하지만 전반적으로 최고출력과 최대토크가 향상되었으며, 변속기 역시 신개발 자동 6단 변속기를 채용하여 더욱 향상된 동력성능을 제공했다. 이 뿐만 아니라 뒷좌석 통풍시트, 크루즈컨트롤, 버튼시동 스마트키 등이 적용되며 상품성도 업그레이드되었다.

이렇게 9년 동안 기아의 플래그십 자리를 지켜 온 오피러스는 2012년 단종되었다. 그리고 오피러스는 근본부터 완전히 새롭게 개발된 후륜구동 대형 세단 K9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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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북에 등재된 세계에서 가장 긴 리무진이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1986년 처음 공개된 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리무진은 1976년형 캐딜락 엘도라도를 개조한 것으로 같은 해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긴 리무진’으로 등재되며 유명세를 치렀다. 

‘아메리칸드림’이라는 이름의 이 차량은 영화에도 종종 모습을 드러냈으나, 높은 유지비와 주차공간 문제로 인해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세월이 흘러 2019년 자동차 수집가 마이클 데저(Michael Dezer)가 세계에서 가장 긴 리무진인 아메리칸드림의 새 주인이 된다. 마이클 데저는 007 영화 속 차량을 비롯해 분노의 질주, 해리포터 등 다양한 영화 속 차량을 수집했다. 그는 또한 이들 차량을 전시하기 위해 플로리다에 데저랜드 파크를 설립하기까지 한 ‘통 큰’ 자동차 수집광이다. 아메리칸드림 리무진 역시 데저랜드에 전시돼 있다.

오랜 기간 애물단지였던 아메리칸드림 리무진에게 예전의 영광을 되찾아주기 위해 데저는 3년간의 복원 작업을 진행했다. 

오래전 단종된 부품들을 구해 교체하고 일부는 완전히 새로 제작하는 등 부품비, 운송비, 노동비를 더해 총 25만 달러(약 3억 1000만 원)를 투입했다. 이후 작년에야 마침내 복원 작업을 마무리한 아메리칸드림 리무진은 단순히 전시용이 아닌 완전히 작동하는 엄연한 자동차이다. 

더욱 길어진 후드는 3개의 액슬로 지탱하며, 후면부는 5개의 액슬을 적용했다. 리무진 뒤쪽에는 온수 욕조뿐만 아니라 ‘H' 글자가 적힌 헬리콥터 착륙용 플랫폼까지 있다.

데저랜드의 명물로 부활해 다시금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기네스 사상 세계에서 가장 긴 리무진’ 아메리칸드림 외에도 데저랜드 자동차 박물관에는 2억 달러(약 2495억 원) 가치로 추정되는 다양한 차량이 전시돼 있다.

박도훈 기자 

@thedrive 2016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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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계속 자동차를 만들고, 대우자동차가 여전히 건재했다면 우리나라의 자동차 시장은 어땠을까? 쌍용차가 준중형 세단 시장에 진출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까? 많은 자동차 업계 관계자들이 하는 '만약에'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산차 업체들은 IMF 외환위기와 법정관리 등 다양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터그래프에서 양산이 좌절된 비운의 국산차를 모아봤다.

# 삼성 SSC-1, 우리에게도 이런 차가 있었다

삼성화재 교통박물관이 소장중인 SSC-1 (삼성화재교통박물관 유튜브)

SSC-1은 1997년 등장한 모델이다. SM5가 1998년에 공개된 모델인 걸 감안하면, SM5보다도 1년 앞서 세상에 먼저 공개된 삼성자동차였다. 당시 국산차에선 볼 수 없었던 미드십 구조를 적용한 모델로, SM525V에 탑재됐던 2.5리터 V6 엔진을 탑재해 최고출력 190마력, 최고속도 230km/h를 발휘했다.

SSC-1이 삼성자동차의 고유 모델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지만, 원천기술 대부분은 외국에 의존한 것이었다. 닛산 300ZX의 섀시를 활용했고, 실내 편의사양 일부도 닛산 세피로에서 가져왔다. SM525V에 공유됐던 6기통 엔진도 닛산의 VQ25 엔진을 기반으로 했고, 테일램프는 토요타 수프라에서 가져왔다.

삼성은 SSC-1을 양산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콘셉트카나 연구용 차량에선 굳이 필요하지 않았던 연비 인증(10.1km/L)까지 받았고, 각종 모터쇼와 전문 매거진을 통해 차량을 지속적으로 노출시켜왔다. 왜 양산되지 않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IMF 경제위기와 삼성자동차의 몰락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 삼성 SEV, '도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거야?'

SVC에 탑승한 이건희 회장 (출처 = KBS 부산)

SEV는 삼성이 SSC-1보다도 먼저 시작했던 프로젝트다. 삼성자동차 출범 전 삼성중공업이 주도했던 전기차 프로젝트로, 1992년 개발을 시작해 1993년 대전 엑스포를 통해 첫 결과물인 SVC를 공개했다. 1회 충전으로 85km를 주행할 수 있었던 첫 모델은 삼성전자, 신라호텔, 에버랜드 등 삼성의 주요 계열사에서 VIP 운송용으로 활약했다.

이후 공개된 SEV-3와 SEV-4는 일반도로 주행까지 염두해 개발됐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SEV는 납축전지를 탑재해 최고속도 130km/h, 1회 충전 주행거리 180km를 확보했고, 니켈아연전지, 니켈메탈수소전지 등의 고용량 배터리팩을 적용해 400km대에 이르는 주행거리를 발휘하는 모델도 연구되고 있었다.

성능만 놓고 보면 지금의 전기차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수준이지만, SEV도 끝내 양산되지 못했다. 충전 인프라 등 전기차에 대한 제반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 쌍용차의 세단 개발 프로젝트, 상하이차 먹튀의 아픈 기록

상하이차에서 출시한 로위 350. 쌍용차가 개발을 맡은 모델이다.

쌍용차는 상하이자동차에 인수된 이후 모노코크 섀시 기반의 준중형급 SUV 프로젝트 C200과 준중형 세단 프로젝트 B100, 중형 세단 U100 개발을 추진했다. C200은 이후 코란도C 라는 이름으로 출시돼 투싼, 스포티지와 직접 경쟁했지만, 아반떼를 겨냥했던 B100과 쏘나타를 노렸던 U100은 끝내 양산되지 못했다. 중국 측에서 이렇다 할 자금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쌍용차가 독자적으로 추진해왔던 프로젝트는 '기술 이전' 이라는 명목 하에 아무런 댓가 없이 중국으로 이전된다. B100은 로위 350 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 생산됐고, 쌍용차가 주도적으로 개발해왔던 U100의 노하우는 상하이차의 중형세단 로위 750으로 녹아들었다. 이후 상하이차가 두 모델의 국내 생산을 약속했지만, 이 마저도 지켜지지 않았다.

두 차량의 개발이 완료된 이후인 2009년, 상하이차는 끝내 쌍용차를 내다버리듯 매각했다. 쌍용차의 거의 모든 기술이 마땅한 댓가 없이 이전된 상태였다. 두 모델은 상하이차가 쌍용차를 연구 개발 하청 용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결정적인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 대우 쉬라츠, 에쿠스보다 먼저 V8을 준비중이었다

대우 쉬라츠 

쉬라츠는 대우차가 1997년 출시를 목표로 개발하고 있던 대형 세단이었다. 국산차 최초로 V8 엔진을 탑재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덩치를 가진 세단을 목표로 개발됐지만, 이 시기 IMF와 함께 대우그룹이 몰락함에 따라 사진으로만 남게 된 자동차다. 만약 출시됐다면 에쿠스보다도 앞서 국내 최대 배기량 및 최대 크기의 차라는 타이틀을 가져올 수 있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쉬라츠는 2.5리터 직렬 6기통 엔진과 4.0리터 V8 등 두 종류의 엔진 탑재를 계획하고 있었다. 여기에 LCD 클러스터, 내비게이션, 차간거리 경보 시스템, 지능형 브레이크, 측면 에어백 등 당시로선 최첨단 기술이었던 편의사양들을 탑재할 계획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쉬라츠가 세상에 나오지 못한 건 쌍용차 인수와도 관련이 깊다. 당시 대우는 쌍용차를 인수하며 체어맨 이라는 플래그십 세단을 갖게 됐고, 이에 따라 쉬라츠의 필요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설령 연구개발을 그대로 이어갔어도 쌍용차 인수로 인해 이렇다 할 자금을 마련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 현대차 PO, YF 쏘나타 닮은꼴 트라제 XG 후속

현대차 포르티코 콘셉트

프로젝트명 PO는 현대차가 트라제 XG의 후속모델로 개발하고 있던 크로스오버 MPV였다. 토요타 벤자, 크라이슬러 퍼시피카, 시트로엥 C4 피카소 등 7인승 MPV를 직접 경쟁 상대로 겨냥했고, 2005년 공개한 콘셉트카 포르티코를 계승한 차명과 스타일링을 적용할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PO는 2010년 이전 출시를 목표로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부터 2009년까지 북미에서 위장막을 쓴 시험주행 차량이 여러 차례 포착됐기 때문이다. 당치 촬영된 사진들을 보면, YF쏘나타를 통해 선보인 디자인 아이덴티티 '플루이딕 스컬프쳐'가 반영되어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PO가 양산되지 못한건 금융위기 여파로 주력 시장이었던 미국 경제가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현대차는 이 과정에서 PO 프로젝트를 폐기하고, 미니밴 라인업을 그랜드스타렉스(TQ)로 대체했다.

자동차 전문 매체 모터그래프(http://www.motorgraph.com)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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