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우체부 :: 출신 탓에 출세 길 막힌 씁쓸한 재능, 혼다 파일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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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고 난 후 자동차를 바라볼 때 생각할게 많아졌다. 화려한 싱글을 외치고 다녔을 땐 몰랐다. 나 혼자 재미있으면 됐고 내 짐만 실으면 그만이었다. 작고 민첩한 자동차를 우선적으로 봤고 비싸고 화려한 차들에 매료됐다.

비록 가족을 꾸리진 않았으나 친구들이나 조카, 직장 동료, 지인과 아는 사람들까지 태워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칫솔 하나, 비누 하나 실으면 그만이었던 시절도 지났다. 옷가지는 물론이고 취미 용품과 식자재, 가구 등도 예고 없이 차에 무임승차한다. 그렇다고 세컨드, 서드 카를 마련하기엔 지갑 사정이 녹록지않다. 한 대로 타협해야 한다.

 

미국 태생 드러내는 공간 활용

 

트렌드는 SUV, 널찍한 공간이 가져오는 실용성, 코로나19로 인해 인기를 얻게 된 차박 및 캠핑까지 인기 있는 건 대형 SUV다. 국내 시장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는 모델은 국산차 팰리세이드, 수입차 익스플로러다. XC90이나 X7 등도 있지만 럭셔리를 지향하고 있다. 고로 녹록지 않은 지갑 사정에 후 순위로 밀린다. 팰리세이드, 익스플로러와 경쟁할만한 모델을 하나 더 찾아보자면 혼다 파일럿 되겠다.

파일럿은 길이 5,005mm, 너비 1,995mm, 높이 1,795mm에 휠베이스 2,820mm로 널찍한 차체를 가졌다. 일본차지만 미국에서 만들어진 탓에 공간 및 거주성에 특화됐다. 꽤 깊이 파인 센터 콘솔 수납공간과 컵홀더, 도어 트림에 배치된 거치대까지 더해져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지갑이나 열쇠, 주전부리 등을 내려놓기 알맞다. 버튼식 기어로 손이 움직이는 동선에 불편을 없앤 것도 나름의 장점.

2열은 독립 시트로 구성돼 탑승자가 한결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다. 174cm 성인 남성 기준으로 레그룸과 헤드룸 공간은 여유로울 정도다. 시트 조절이 전자식은 아니지만 무겁지 않아 사용에 불편함이 없다. 2열 역시 컵홀더를 넉넉하고 크게 배치하고 시트 중앙을 수납공간으로 활용했다. 천장엔 모니터를 설치해 멀티미디어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또한 2열에서 조절 가능한 공조 장치도 빼놓을 수 없는 상품성 항목.

3열은 성인이 타기엔 조금 불편하다. 뭐, 단거리 이동이라면 타협할 수 있겠으나 장거리를 이동해야 한다면 다리 저림을 각오해야 할 테다. 아쉬운 점은 시트 플랫 시 끈을 잡아당겨 접어야 한다는 것. 익스플로러나 팰리세이드가 버튼 하나만 눌러 접히는 점을 생각하면 편의성에서 뒤떨어진다.

 

지금은 꾸밈도 경쟁력

경쟁 모델과 비교했을 때 아쉬울 요소는 단연 인테리어다. 파일럿을 의인화 시켰다면 분명 첫마디가 “나 때는 말이야”였을거다. 안드로이드 오토와 애플 카플레이, 무선 충전 시스템 등 구색은 충분히 갖추고 있지만 클래식한 감성의 인포테인먼트 폰트, 단조로운 버튼 배치와 이제는 사용성이 ‘0’에 가까운 CD플레이어까지 ‘라떼’를 연상하게 만든다. 전혀 테크놀로지스럽지 않은 블랙 하이글로시와 인조가죽, 금세 지문이 스며드는 크롬 장식은 경쟁 모델에게 힘을 실어준다.

익스테리어? 호불호가 지극히 갈리는 요소기에 확정 지을 순 없다. 하지만 라이다 센서를 집어넣어 크게 박아 넣은 엠블럼은 미적 감각을 해치는 요소가 아닐까? 지나치게 반짝이는 엠블럼과 라디에이터 크롬, 헤드라이트는 웅장함을 느끼는 동시에 촌스러움을 동반했다.

실루엣만 본다면 개별 특색은 갖췄다. 팰리세이드나 익스플로러가 각지고 터프한 비주얼로 디자인 승부를 본다면 파일럿은 날카로움과 다부짐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전면 범퍼 라인과 보닛 라인, 헤드램프 라인을 수평 기조로 다듬고 선 자체는 날카롭게 세웠다. 덕분에 넓어 보이는 시각적 효과와 공격적인 효과를 모두 얻었다. 측면도 캐릭터 라인과 숄더 라인을 날카롭게 세우면서 뒤쪽으로 치켜올라가는 형태를 띤다. 그 밑으로 크롬을 입힌 러닝 보드를 덧댔다.

 

러닝 보드는 시각적 효과보단 실용성, 즉 타고 내릴 때 편의성을 높이기 위한 장착이다. 러닝 보드에 스폿 라이트도 장착했고 LED 사이드스텝 가니시로 ‘PILOT’ 로고를 밝히지만 꾸밈새에서 경쟁력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본질에 충실한 달리기

 

차이는 있겠지만 차의 기본적인 뿌리는 이동이다. 스포츠카는 빠르게 혹은 재미있게 이동하며 본연의 색채를 가지고, 트럭은 이동 시 짐을 실을 수 있어야 하고 짐이 부서지거나 떨어지지 않는데 초점을 둔다. 세단은 조금 더 편안하고 안락함을 주요 무기로 삼는다. 그렇다면 SUV는? 짐도 싣고 사람도 싣고 편안하고 안락함을 모두 갖춘다. 빠르고 재미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그건 욕심이다. 필요한 건 운전 스트레스와 이동 간 스트레스를 줄이며 부족하지 않은 성능으로 이동하는 것. 차체가 커지면 내외부 영향을 많이 받아 스트레스를 줄이는 일은 필수적이다.

파일럿은 3.5리터 V6 자연흡기 엔진에 9단 자동변속기를 적용해 284마력, 36.2 kg · m 성능을 낸다. 출력과 토크에서 특출난 모습은 없다. 하지만 파일럿은 부드럽고 진중한 가속에서 빛을 발한다. 기본적으로 출력을 뽑아내는 과정이 점진적으로 이뤄지며 변속기와 조합도 상당히 매끄럽다. 울컥거림이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가속 페달을 약 60% 밟아도 즉각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서서히 속도를 끌어올린다. 마치 ‘나는 내 길을 간다’싶을 정도로 말이다. 답답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대형 SUV, 그것도 패밀리카 성격이 짙은 파일럿임을 생각하면 콘셉트가 잘 반영된 모습이다.

속도를 높인 후에도 정숙성은 빼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큰 차체임에도 밸런스가 뛰어나 운전자와 동승자 모두에게 심리적, 신체적 스트레스가 적다. 적극적으로 지면을 붙잡는 모습이나 노면 충격을 걸러내는 모습도 인상적. 적당히 매만져진 하체는 장거리 이동 시에 편안한 승차감을 만들어내는데 고속도로 장거리 주행에서 진가가 발휘된다.

 

드라이브 모드는 D, S, ECO 세 가지로 구성됐는데 D, S로 변경 시 극적인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오히려ECO 모드에서 확연히 출력을 억제하는 느낌을 받는다. S 모드에서 패들 시프트를 사용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M 모드(매뉴얼 모드)로 바뀐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스포츠 드라이빙에 적합하지는 않다. 폭설이 내렸던 연초처럼 엔진 회전수 조절이나 속도 조절 상황에서 사용하는 정도가 알맞다.

혼다 파일럿은 그동안 아웃사이더였다. 쟁쟁한 경쟁 모델 속에서 노출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SUV 열풍 흐름에 올라타지도 못했다. 꾸준히 좋은 평가를 받아왔음에도 소비자의 최종 선택지엔 들지 못했는데 시기가 시기인지라 연식변경 모델도 소비자 선택지를 파고들기 쉽지 않다. 과연 출신 탓에 출세 길이 막힌 파일럿의 재능은 빛을 볼 수 있을까?

김상혁 cardyn@carla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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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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