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우체부 :: "포터와 봉고, 무조건 가격을 맞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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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저가 끝이 어디인 줄 모르고 약진하고 있다. 쏘나타가 2010년에 세운 연간판매 기록 15만대를 돌파한다고 난리다. 그랜저 개발 스토리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연간 10만대를 오르내리는 차종이 있다면 몇 차종이나 될까? 그랜저, 쏘나타, 아반떼까지는 누구나 한마디 하겠지만 또 한 차종은?

소형상용차인 포터다.

 

요즘 판매실적을 살펴보니 현대 포터가 연간 약 13만대, 봉고가 7만대 정도로 두 차종 합해 20만대 정도 판매되고 있다. 수입차를 포함한 연간 170만대인 내수시장에서 10%가 넘는다. 동네 어귀의 과일 장수차, 이삿집차, 배달차, 농가의 농업용 등 생활 현장을 누비는 차들이다.

이 차종은 우리의 경제 상황, 시장 상황을 대표하는 바로미터라고 한다. 경제가 침체되고 시장이 안 좋으면 자동차 판매도 줄기 마련이다. 그 와중에 오히려 판매가 늘어나는 차종이 소형 상용이라고 하는 포터와 봉고다.

코로나 사태로 자영업자 죽는다고 난리도 아닌 상황에서 주로 자영업자가 구매층인 포터, 봉고 판매가 늘어난다니 무슨 일인가.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일자리에서 밀려난(해고된) 사람들이 생계를 꾸리려고 구입하는 차가 바로 포터, 봉고다. 그러고 보니 동네 어귀에 평소 안보이던 장작구이 통닭차가 서 있던데 포터였나?

2000년대 초, 기아차는 현대자동차 그룹에 합병된 지 얼마 안 되어 정상화를 위해 애를 쓰던 시절이었고 시장에 기아차 합병의 당위성을 보여줘야 할 시기였다.
그룹 입장에서는 합병해 들여놓은 새 회사가 혹시 병이라도 나서 문제가 생기면 회사 사느라고 들인 돈 다 날아가고 시장의 혹평을 받을 판이니 어찌 조심스럽지 않았겠는가?

“기아 살리기 운동본부”라는 말이 있었다. 회의 중에 타부서 고위직 선배에게서 처음 들었다. 사내의 모든 부분에서 기아차가 발전하는 데 유리하고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다 보니 현대차의 선배 입장에서는 열이 받아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으리라. 처음에는 그런 조직이 새로 생긴 줄 알았다. (바보 아닌가?)

나도 돌이켜보니 그런 일이 많았다.
연구소에서 신기술이나 부품을 적용할 때 현대에서 요구하면 1~2년이 걸리고 원가도 높다는데 기아에서 요구하면 1년 이내로, 원가도 훨씬 낮은 금액을 제시하곤 했었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원가라는 게 핵심은 결국은 얼마나 많은 양을 적용하느냐 하는 것인데 초등학생이 봐도 현대차가 훨씬 많이 판매하는 차종이라면 원가도 당연히 낮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게다가 신기술 적용요청은 현대가 먼저 했는데 그걸 듣고 나중에 요청한 기아가 먼저 적용한다는 건 또 무슨 일인가?

연구소에 항의하니 연구 여력이 부족해서 그렇단다. 연구 여력이 부족하면 현대 먼저 개발하고 기아는 나중에 개발하는 게 정상 아니냐고 따지니 눈치 없는 이야기 하지 말란다. (평상시 눈치 좋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지만 눈치가 없다니!)

원가 부문과도 논란도 많았다. 같은 기술, 사양을 적용하거나 기아가 더 많은 사양을 적용했는데도 판매 가격 인상은 같거나 기아가 더 낮았다. 기아가 어려우니 양보해야 하지 않냐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이런 상황을 보고 있는 판매 현장의 불만은 또 어땠을까? 이런 일을 보고만 있는 본사 마케팅 조직을 얼마나 무능하다고 욕했을까?

그런 와중에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현대 포터가 기아 봉고보다 가격이 낮아서 기아차 영업 현장에서 판매에 어려움이 많다는 보고가 경영층에 올라갔다는 이야기였다. 이전 같으면 그야말로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고 무시했겠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바로 분석해서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 당시 현대, 기아차의 마케팅 부문 조직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하게 유례가 없게 같은 본부 내에 현대/기아차 마케팅이 존재하는 체제였다. 같은 코치아래 두 선수가 올림픽에 나가서 결승에서 만났는데 코치는 누구를 응원해야 하겠는가? 원래 운동 잘하는 선수? 한참 실력이 향상되고 있는 신인선수? 아니면 학부형이 팀 후원회장인 선수?

가격 차이가 5% 이내의 차를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상당히 주관적이고 브랜드와 감성적인 부분 등 고려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어느 차가 어느 정도 비싸다, 싸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물론 현대차와 기아차가 동급 차종에서는 부품을 공용화 하기 때문에 쉽게 비교되는 부분도 있지만 생산현장에서 조립하는 작업자의 능력이나 노사협의 사항에 의한 생산성 등 원가에 영향을 끼치는 부분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또 포터나 봉고는 구매자가 영세 자영업자인 경우가 많아 가격에 민감하다 보니 저가형부터 고급형까지 모델이 많고 모델에 따라 현대가 가격이 높기도 하고 기아가 높기도 하는 등 단적으로 비교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현대/기아 각사 마케팅에서 각각 보고서를 올렸는데 예상했던 대로 현대는 비교하기 어렵다고 보고하고 기아는 이때다 하고 현대가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다고 보고했다. 누구에게까지 보고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포터와 봉고의 가격을 무조건 맞추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옆집하고 우리 집 짜장면 가격을 비교하려 해도 옆집하고 우리 집 월세도 비교하고 들어가는 재료 수준도 비교해야 하는데 당장 오늘부터 두 집 짜장면 가격을 같게 하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담당자에게 검토 지시를 하니 담당자가 씩씩거리면서 거의 독립 만세 외치러 나갈 수준이었지만 나 또한 위(?)의 눈치를 보니 이러니저러니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마케팅과 판매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가진 선배로서 평상시 실무직원들의 의문이나 불만을 받아들이면서 설득하시던 윗분이 이번에는 그야말로 아무 말 없이 무조건 하라는 대로 하라는 지시만 내리고 중역실 안에서 오락가락하시는걸 보니 대충 버티다가는 전부 죽는 일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적군(?)과 타협에 들어갔다.

어차피 상대방이나 나나 하루 이틀 상품업무를 해온 것도 아니고 현재의 가격이라는 것이 여러 요소를 거쳐 결정된 것인데 하루아침에 무 자르듯이 모델별로 가격만 같게 했다가는 당장 시장에서 난리가 날 상황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라 최대한 문제가 적게 발생하도록 하는 방안을 협의해나갔다.

일단 제품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상황에서 하루아침에 가격만 내리고 올리는 것은(그나마 내리는 것은 낫지만) 말이 안 되므로 모델별로 사양을 비교해서 뺄 수 있는 건 빼고 차라리 더 나은 부품은 넣는 등 조절을 해서 모델별로 가격 차이가 적게 해 평균적으로 가격이 동등하게 보이게 하고 그중 판매량이 미미한 최저가 모델이나 최고가 모델은 의도적으로 가격을 같게 해 지시한 경영층의 마음에 들도록 했다.
그 와중에 평소에 포터 가격을 올리지 못해 노심초사하던 원가 부문에서는 희소식을 들은 듯 이번 기회가 대목이라는 듯 가격 인상을 요구했고.
사양을 넣고 빼고 해야 하니 당장 적용은 어려웠고 현대/기아 모두 계획에 없던 모델개선(MODEL YEAR 수준) 일정을 수립하고 가능한 최단 시일 내에 생산할 수 있도록 요청했는데 연구소와 생산 부문이 예전과 달리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추진해주었다. (평상시에도 그런 속도였다면….)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요즘 포터, 봉고의 판매 추이와 가격대를 보니 포터가 연간 13만대 수준, 봉고가 약 7만대 수준으로 포터 판매의 50~60% 수준이고 가격대는 LD(Locking Differential)를 기본 적용하기 시작하는 모델 기준으로 포터 모던 1,827만원, 봉고 GL 1,810만원으로 17만원 차이다. 재미있게도 자동변속기는 동일하게 113만원.

판매 비율이나 거의 차이가 없는 가격대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과거나 지금이나 포터, 봉고는 가격이나 상품성보다도 그야말로 공장에서 생산 가능한 대로 판매되는 차라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 빼고는 다 아는 일인데 말이다.

유재형 <자동차 칼럼니스트>

필자 유재형은 1985년 현대자동차에 입사, 중대형 승용차 상품기획을 맡았으며 현대모비스 전신인 현대정공에서 갤로퍼, 싼타모 등의 개발에 참여했다. 이후 현대자동차로 옮겨 싼타페, 투싼 등 SUV 상품개발과 마케팅을 거쳐 현대자동차 국내상품팀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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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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