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차 중에서 V8 엔진을 얹은 차는 기아차 K9과 제네시스 G90 단 두 모델이다. 쉽게 볼 수 없는 만큼 희소성과 존재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V8은 강하고 여유로운 성능과 함께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감과 상징성의 근원이다.
‘V8은 필수다!’라고 말한다면 요즘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소리를 듣기 쉽다. 다운사이징이 널리 퍼져 작은 엔진으로 큰 힘을 내고 효율성까지 챙기는데 굳이 배기량이 큰 V8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V8이 대중적인 엔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희소한 엔진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배기량과 실린더 수를 줄이는 추세라 V8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6기통이 최대인 브랜드도 있고, 심지어 어떤 브랜드는 4기통으로 소형부터 대형까지 모든 라인업의 엔진을 해결하기도 한다.
V8은 없어져야 할 과거의 유산일까? 고유한 장점이 있지만 V8보다 작은 엔진이 충분한 성능을 제공한다면 존재 의미는 옅어지지 않을까? 그러나 V8은 여전히 이 시대에도 당당한 존재 가치를 지닌다. V8뿐만 아니라 그 위의 V10이나 V12도 마찬가지다. 현시대 V8의 존재 가치는 상징성이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시대에도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존재는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그 존재가 브랜드의 최상위에 있는 기함이라면 차별화의 핵심은 엔진이다.
플래그십이라도 그 안에서 트림별로 급이 나뉜다. 가장 큰 엔진을 얹은 트림이 기함 중에서도 기함 역할을 해낸다. 브랜드 모델 라인업 피라미드의 꼭대기 중에서도 가장 위 꼭짓점에 자리 잡는다. 일례로 독일 럭셔리 브랜드의 기함 중에서도 최고 트림은 V12를 고수한다. 비록 배출가스와 연비 규제 강화로 V12도 사라질 운명에 처했지만, 수십 년을 이어온 최고라는 상징성은 여전히 빛바래지 않고 남아 있다. V12가 사라지면서 기함 세계의 최고 자리는 V8이 맥을 잇는다. 실린더 수는 3분의 1이 줄었지만 성능은 V12 못지않게 내며 V12 엔진의 빈자리를 채운다.
국산차 중에는 V8을 넘어가는 엔진을 사용하는 모델이 없기 때문에 애초에 V12 엔진이 사라지는 비운은 겪지 않아도 된다. 현재 국산 승용차 엔진 중에서는 V8이 가장 큰 엔진이다. 대중차 브랜드의 특성에 맞게 4기통이 가장 많고 고급형 모델에는 V6가 달린다. V8을 사용하는 모델은 극소수다. 기아자동차의 경우 플래그십 모델인 K9의 최고 트림에만 V8을 얹는다. 기아차를 통틀어서 유일한 V8이다. 물론 K9이 기아차 역사에서 유일한 V8 모델은 아니다. 모하비 1세대 모델은 한때 북미 시장에 수출하던 V8 4.6L 가솔린 엔진을 내수 시장에 판매하기도 했다. 해외에서 들여온 국산차를 제외하고 현재 판매 중인 국산차 중 V8 엔진을 얹은 모델은 기아 K9과 제네시스 G90가 유일하다. 그만큼 V8은 브랜드 안에서뿐만 아니라 국산차 전체를 통틀어서도 희소하고 높은 존재감을 지닌다.
K9의 V6 3.8L 엔진과 V6 3.3L 트윈터보 엔진
K9의 엔진은 모두 가솔린이고 종류는 V6 3.8L, V6 3.3L 터보, V8 5.0L 세 가지다. 트림으로 짝을 지으면 이들의 관계를 쉽게 알 수 있다. V6 3.8L는 플래티넘 트림으로 5,419만~7,628만원의 가격대를 형성한다. V6 3.3L 터보는 마스터즈 트림으로 6,558만~8,099만원이다. V8 5.0L는 퀀텀 단일 트림에 값은 9,179만원에 이른다. 옵션을 선택할 필요가 없는 풀옵션 단일 모델이다. 이처럼 V8은 기함 중에서도 가장 윗급을 담당하는 상징적인 존재다.
V8 엔진의 장점은 무엇일까? 실린더 4개를 좌우 V자 형태로 배치한 V8 엔진은 주로 대형차에 사용한다. 미국처럼 대형차가 보편화된 나라는 V8 엔진을 대중차에도 많이 썼지만(과거에 그랬고 지금은 미국도 V8 모델이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대체로 V8 엔진은 고급차에 얹는다. V8의 장점이라면 정숙성이 우수하고 진동이 적어 승차감이 좋은 점을 먼저 꼽을 수 있다. 또한 대체로 배기량이 크기 때문에 큰 힘을 낸다. 다만 실린더 수가 많기 때문에 엔진이 크고 무거우며 부품이 많이 들어가고 복잡하다는 단점이 있다. 기름도 많이 먹는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단점을 줄이고 효율성과 친환경성을 키우는 등 장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V8은 존재 가치를 이어간다.
K9에 얹는 V8 5.0L 엔진의 최고출력은 6,000rpm에서 425마력, 최대토크는 5,000rpm에서 53.0kg·m다. 최고출력은 3.8L 315마력, 3.3L 터보 370마력과 큰 차이를 보인다. 최대토크는 3.8L 40.5kg·m와 차이가 크지만, 3.3L 터보 52.0kg·m와는 엇비슷하다. 3.3L 엔진이 트윈터보 방식이라 배기량에 비해 토크가 큰 까닭이다. K9의 V8 엔진은 자연흡기 방식이다. 터보나 자연흡기나 각각 장단점이 있어서 어느 쪽이 낫다고 단정 짓기는 쉽지 않지만, 배기량이 큰 자연흡기 엔진의 장점은 뚜렷하다. 회전수에 맞춰 고르게 올라가는 토크와 빠르게 반응하는 가속 페달의 응답성, 순수하고 경쾌한 사운드는 자연흡기 엔진에서 두드러지는 매력이다. 터보의 도움 없이 배기량만으로 일궈내는 강한 힘은 순수한 여유를 전달한다.
K9 V8과 마주했다. 트렁크에 붙은 ‘quantum’이라는 트림 레터링이 V8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보닛 속에는 실린더가 8개나 달린 커다란 엔진이 빈틈없이 들어찼다.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4기통 2.0L 엔진보다 실린더는 두 배나 많고 배기량은 2.5배 크다고 생각하니, V8이 어느 정도인지 대략 짐작이 간다.
시동 버튼을 누르니 묵직한 중저음이 일순간 울리더니 이내 조용해진다. 공회전 때는 잔잔하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만 흘러나온다. 가속 페달을 밟은 발에 힘을 줘 회전수를 올리면 그제야 정제된 묵직한 사운드가 울려 퍼진다. 힘에는 여유가 느껴지지만 치고 나가는 펀치력은 부드럽고 우직하다. 3.3L 터보 트림이 운전대를 직접 잡는 오너드라이버를 타깃으로 삼는다면, 시종일관 여유로운 V8 5.0 모델은 뒷좌석에 VIP를 모시는 차로도 제격이다. 강력한 힘을 여유롭게 다스려 앞좌석은 물론 뒷좌석 VIP에게도 편안함을 선사한다.
커다란 엔진을 얹은 만큼 무게도 더 나간다. K9 V8의 무게는 2,165kg인데 아래급과 적게는 80kg, 많게는 250kg 차이가 난다. 무게감 때문에 도로에 묵직하게 밀착하는 느낌이 더하고, AWD 시스템이 네 바퀴에 힘을 전달해 도로와의 일체성을 높인다. 넉넉한 V8 엔진의 부드러움은 운전자는 물론 뒷좌석 VIP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물론 V8 모델도 마냥 뒤에 앉은 VIP를 위한 세팅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주행모드를 스포츠에 맞추면 더욱 힘차게 나아가고 소리도 한층 강렬해진다. V8은 아래 두 트림과 달리 엔진 소리를 인위적으로 키우는 액티브 엔진 사운드가 들어있지 않다. 자연흡기 고유의 가식 없는 경쾌한 사운드가 충분히 짜릿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스티어링 휠 뒤에 달린 패들시프트를 활용하면 자연흡기 V8의 특성을 더욱 진하게 경험할 수 있다. K9 V8은 차의 성격과 급에 맞게 V8의 특성을 부드럽고 풍요롭게 녹여냈다. 앞좌석에는 오너의 역동적인 경험을, 뒷좌석에서는 VIP의 여유로운 아늑함을 모두 만족시킨다.
V8 엔진은 성능 측면에서만 만족을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존재감과 상징성이 상당하다. 기함 중에서도 최상위 모델을 탄다는 자부심을 안겨준다. 규제 강화에 따라 V12에 이어 전 세계에서 V8도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기술이 발달해 지금 당장이라도 V6로 V8 성능을 내는 데 무리는 없다. 그러나 같은 힘이라도 실린더 두 개가 더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국산차 중에서 V8 모델은 기아차 K9과 제네시스 G90 단 두 모델뿐이다. 둘 다 각 자동차 회사를 대표하는 기함 중 최고 모델이다. 전체 자동차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만, 희소성으로 인해 오히려 가치가 높은 기함 중의 기함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