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우체부 :: 차(車)에서 흘러나오는 향기로운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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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여자에게서 그의 향기를 느꼈다.” 1990년대 중반에 선보인 화장품 광고 문구인데, 지금 사용한다 해도 전혀 시대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고 도발적이다.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겨, 광고 문구 중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수작으로 꼽힌다.

사람은 누구나 향기를 풍긴다. 향수나 화장품, 샴푸, 비누, 세제 등 냄새나는 물질을 사용하기 때문에 향기가 나지 않을 수 없다. 향기는 좋은 냄새를 뜻한다. 위생 관리가 철저하지 못하거나 땀을 많이 흘릴 때 나오는 좋지 않은 냄새를 향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의 만족은 물론 상대방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향기를 풍기려고 노력한다. 향기는 꼭 코로 맡는 냄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풍기는 분위기나 시각적으로 인식하는 이미지 등을 향기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한다. 향기는 누군가를 대했을 때 받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자동차도 냄새가 난다. 실내에 들어서면 가죽이나 플라스틱 냄새가 나고 바깥에서는 연료가 타는 냄새, 엔진룸에서는 기름 냄새가 난다. 이런 실제 냄새가 아닌 분위기나 이미지를 향기로 표현하기도 한다. 자동차라는 제품에서 범위를 확장해 브랜드도 특정한 향기를 내뿜는다. 브랜드 색깔, 특징 등으로 나타내기도 하는데 정확하게 규정해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브랜드 하면 딱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이 곧 향기라 할 수 있다. 

브랜드의 향기는 인위적으로 형성되기도 하고, 전통이나 특색에 따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제품을 직접 경험한 고객들의 입소문이 퍼지면서 특정 이미지가 부각되거나, 차를 보는 사람들의 평가가 대체로 일치하면서 특정 이미지가 굳어지기도 한다. 향기는 불변은 아니어서, 오래도록 같은 향기를 내는가 하면 시대 흐름에 따라 향기가 달라질 때도 있다. 

기아자동차는 1944년 경성정공으로 시작해 1962년부터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으니, 자동차 제조 역사만 거의 60여 년에 이른다. 그동안 기아차가 풍기는 향기도 조금씩 달라졌다. 국내 모터리제이션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살펴보자.

 

 

1st 향기: 기술의 기아

 

 

기술의 기아는 20세기 기아차를 대표하는 향기였다. 1974년 소형차 브리사를 내놓을 때는 해외 모델을 들여와 만들었지만, 국산화율이 90%에 이르렀다. 1987년에 선보인 중형 세단 콩코드는 고속도로의 제왕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고속주행 성능이 우수했다. 1992년 선보인 세피아는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플랫폼을 독자 개발했다. 플랫폼까지 국산화한 진정한 최초 고유 모델이다. 1995년에 나온 크레도스는 핸들링이 좋다고 인정받았다. 1996년 선보인 엘란도 로터스로부터 판권을 사와 만들었는데 국산화율이 85%에 달했다. 요즘 말로 하면 이과 냄새 폴폴 풍기는 기술 지향적인 브랜드였다. 역동성을 강조하는 브랜드의 시초를 보면 으레 창업자가 엔지니어 또는 레이서 출신이다. 기아차 창업자도 엔지니어 출신이라 기술을 중시하는 풍조가 일찍부터 자리 잡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2nd 향기: 모험의 기아

 

 

 

 

모험의 기아. 기아차를 보면 유독 특별한 차가 눈에 띈다. 틈새 중의 틈새 또는 소수 마니아를 위한 차, 다른 브랜드에서는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차들이다. 도전 정신과 모험 정신 없이는 만들어 낼 수 없다. 1993년 선보인 스포티지는 SUV의 개념을 도심형으로 바꿔 놓는 시초였다. 1996년 나온 엘란은 요즘에도 국산차 브랜드가 시도하지 못하는 정통 스포츠카에 뚜껑이 열리는 자동차다. 24년 전에 이런 차가 국산차 브랜드로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소문에 의하면 대당 1,500만원씩 손해를 보고 팔았다고 하니, 스포츠카를 보급하겠다는 의지와 더불어 낭만마저 느껴진다. 이후에도 박스카 쏘울, 박스형 경차 레이, 4도어 쿠페 스팅어, 5도어 쿠페형 해치백 K3 GT 등 기아차는 다른 국산 브랜드가 시도하지 않는 차를 꾸준히 내놓았다. 보통의 의사결정으로는 만들기 힘든, ‘기아’이기에 가능한 도전의 산물이다.

 

 

3rd 향기: 디자인 기아

디자인 기아는 기아차가 체질 개선을 위해 의도적으로 향기를 바꾼 사례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피터 슈라이어 등 해외 인재를 영입해 과감하게 디자인을 바꾸는 작업을 시도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전 디자인을 싹 갈아엎어 호랑이코 그릴을 적용하고 직선의 단순화를 실현해 기아차만의 디자인 정체성을 확립하고 수준을 대폭 올렸다. 국산차 브랜드 중에서는 일관되게 확고한 디자인을 보여주며, 가장 세련되고 앞선 디자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4th 향기: RV 기아

 

 

 

RV 기아는 오래전부터 변함없이 풍기는 진한 향기다. 1980년대 ‘봉고 신화’를 일으키며 ‘다인승차 = 기아’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고, 1998년 등장한 미니밴 카니발은 현재까지 독보적인 국산 미니밴 원톱 자리를 지킨다. 프레임 바디 모하비는 정통 SUV 시장을 지키고, 스포티지와 쏘렌토는 패밀리 SUV로 꾸준한 인기를 이어간다. 니로, 쏘울, 스토닉, 셀토스 등 소형급에 다양한 라인업을 갖추는 등 RV 시장을 주도하며 RV 전문가로 인정받는다. SUV 전성시대가 오면서 기아차의 SUV의 향기가 더욱 진하게 널리 퍼지고 있다. 

 

 

5th 향기: 프리미엄 기아

 

 

 

 

 

프리미엄 기아는 현재 진행형이면서 앞으로 기아차가 더욱 진하게 풍길 향기다. 고급화는 세계 자동차 시장의 화두다. 소비자들의 눈이 높아지고 희소한 가치를 찾는 추세가 이어지면서, 대중차를 타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프리미엄 시장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대중차 브랜드인 기아차도 트렌드에 맞춰 고급화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디자인 정체성이 강한 점도 고급화에 유리한 요소다. 별도로 고급차 브랜드를 두지는 않지만, K9이나 K7, 모하비, 스팅어 등 준대형급 이상은 국산 고급차로 인정받는다. 대중차 브랜드 특성상 고급차 브랜드로 완전히 넘어가지는 않겠지만, 준프리미엄 브랜드 지위는 노려볼 만하다. 국산 대중차 브랜드 중에서는 가장 고급화가 잘 된 브랜드라 할 만하다. 

임유신(자동차 칼럼니스트)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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