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우체부 :: 시대를 초월한 '뱀파이어' 삼성 SM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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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 첫 차라는 자부심, 시대를 초월한 품질로 이어졌다

 

신기하다. 현대 EF 쏘나타와 대우 매그너스, 그리고 기아 옵티마는 오늘날 도로 위에서 자취를 감췄다. 삼성 SM5(출시 초기엔 브랜드명에 ‘르노’가 붙지 않았다)는 다르다. 여전히 말끔한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킨다. 심지어 그 시절 국산차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뒷바퀴 펜더 부식도 전혀 없다. 어찌하여 흐르는 세월 속에 SM5의 시계만 멈춰있단 말인가.

마음가짐이 달랐던 까닭이다. 이 차는 삼성그룹의 오랜 염원이 낳은 첫차다. 1985년부터 시작한 삼성의 자동차 업계 진출의 꿈은 여러 차례 좌절을 반복했다. 하지만 1992년, 결국 정부로부터 사업 진출 허가를 받았다. 마침내 1995년 삼성자동차가 출범했다.

어렵게 일궈낸 기회였다. 세상의 기대도 컸다. 국내 굴지의 그룹이었기에 첫 작품일지라도 결코 미숙할 수 없었다. 답은 해외 기술이다. 삼성자동차는 메르세데스-벤츠·폭스바겐·토요타·혼다·닛산 등 여러 자동차 제조사와 접촉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시 자금 흐름이 위태로웠던 닛산과 기술제휴를 맺었다.

SM5를 살펴보는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아낌없는 투자가 이어졌다. 최신 설비를 가득 담은 자동차 공장을 부산 신호공단에 세웠다. 품질 향상에도 노력을 기울인다. 이미 완성된 닛산 차를 들여오고도 시험주행차를 120대 제작해, 충돌 시험을 20여 회 거쳤다. 2100억원에 달하는 연구개발비를 쏟아부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이 남긴 말 속에 그 의지가 담겨 있다. “차 한 대만 고장 나더라도 전 직원이 깜짝 놀랄 정도여야 합니다. 삼성자동차는 품질 불량을 부정보다 더 엄격한 죄악으로 규정해야 합니다.”

4기통 SM520. SM5 판매 대부분을 차지한 주력 모델이다

1998년 3월, 삼성의 첫차 SM5는 그렇게 탄생했다. 품질에 대한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출시 한 달 전, 대한민국 자동차의 새로운 문화를 열겠다며 ‘대고객 선언문’을 발표했다. 출시 후엔 파워트레인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신차로 차를 바꿔주는 교환 제도를 실시했고, 당시 2년 · 3만km를 품질 보증했던 업계 평균을 뒤집고 3년 · 6만km 보증을 약속했다.

닛산의 기술, 삼성의 명성, 그리고 파격적인 보증 서비스가 어우러져 SM5는 ‘대박’났다. 1998년 11개 일간지 선정 히트 상품으로 이름을 올렸을 뿐 아니라, 1998년 6월부터 9월까지 쏘나타를 누르고 4개월 연속 중형 세단 판매 1위를 기록한다. 이후 외환위기를 맞아 삼성자동차가 휘청이며 판매가 주춤했지만 르노삼성자동차로 다시 출범한 뒤 2001년 누적 10만대, 2002년 누적 20만대, 2003년 누적 30만대를 판매하며 연이은 성공 신화를 쓴다. SM5는 삼성자동차의 성공적인 첫 발자국이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 삼성의 처음이자 마지막 자동차 SM5를 다시 만났다. 참 수수하다. 1998년 첫 등장 때도 그랬지만, 지금 다시 봐도 말끔한 분위기다. 교과서처럼 단정한 1990년대 앞바퀴굴림 중형 세단 비율과 휘황찬란한 ‘에지’하나 없는 부드러운 굴곡에 긴장감이라곤 전혀 없다. 보기 편한 이유이자, 오래도록 질리지 않는 비결이다.

준대형 세단 시장을 겨냥한 고급 세단답게 후드톱 엠블럼과 세로 줄무늬 넣은 크롬 그릴을 달았다

 

SM525V는 범퍼에 뒤 번호판을 붙여 차별화를 꾀했다 / 시승차는 2002년식이지만 2004년식 휠을 달고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우리가 알던 SM5보단 화사하다. 시승차는 2002년식 SM525V. 당시 시작 가격 기준 2485만원(오늘날 화폐가치 기준 가치가 3700만원에 달한다)을 호가하던 최상위 모델이다. 보닛 위에 삼성 엠블럼을 자랑스럽게 올렸고, 크롬 그릴이 번쩍인다. 쏘나타가 아닌 현대 그랜저 XG와 경쟁하던 고급 세단이다.

온갖 편의장비를 가득 담은 실내

‘딸깍’ 1990년대 차답게 가볍지만 기계적 느낌 물씬 풍기는 문짝을 열어 운전석에 앉았다. 눈높이가 높다. 늘씬한 옆 태에서 볼 수 있듯이 보닛이 납작 깔려 운전자 시야에 훤히 들어온다. 실내공간은 좁다. 팔 뻗으면 동반석 문짝 손잡이까지 열 수 있을 듯하다. 차체 너비로 자동차세를 매기는 일본차 뿌리의 흔적이다. 실제 제원상 너비도 1785mm(동시대 그랜저 XG 너비는 1825mm다)에 불과하다.

 

하이비전 계기판 / 뒷좌석 암레스트 리모컨 / 뒷좌석 공기청정기

그 좁은 공간에 삼성의 욕심은 가득 찼다. 손 닿는 곳곳이 푹신하다. 고개를 돌리면 기대치도 않은 편의장비가 눈에 들어온다. 시동만 걸어도 환한 조명을 비추는 하이비전 계기판부터 시작해, 스티어링휠 뒤편에 볼록 튀어나온 핸즈프리 마이크까지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더없이 호사스럽다. 앞좌석은 물론 뒷좌석까지 열선을 깔았으며, 뒷좌석 팔걸이엔 그랜저 XG 처럼 인포테인먼트 리모컨도 달아놨다. 심지어 뒤 유리창 아래엔 전용 공기청정기도 달렸다. 그 시절 삼성그룹 임원들이 만족스럽게 탔겠군!

세계 10대 엔진에 14번 이름을 올린 명기 VQ 엔진

차 키를 힘껏 돌려 엔진을 깨웠다. 역시 V6다. 처음엔 엔진회전수가 치솟는 듯하더니 금방 잔잔하게 진동이 가라앉는다. 23만km를 주행한 자동차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조용하다. 불현듯 “10만km 달린 차의 엔진 소리가 거의 새 차 소리와 같다면 믿으시겠습니까?”라던 SM5 인쇄 광고 문구가 떠올랐다.

V6 엔진의 중후한 회전질감 때문에 으레 묵직한 주행감각을 기대했건만, 반대다. 움직임은 가볍다. 아니, 아주 팡팡 튀어 나간다. SM5를 조율한 삼성 직원들은 이 차가 더욱 강력해 보이길 원했던 모양이다. 가속 페달을 조금만 밟아도 스로틀을 활짝 열어 출력을 쏟아낸다. 부드럽게 출발하려면 가속 페달을 살살 달래며 밟아야 할 수준이다.

전반적인 주행감각도 매한가지다. 가벼운 옛날 차답게 노면 충격에 가볍게 흔들리고 스티어링휠 역시 ‘휙휙’ 돌아간다. 좋게 말하면 작은 차처럼 경쾌하고, 나쁘게 말하면 묵직한 맛이 부족하다. 큰 충격을 꿀꺽 삼키지만 자잘한 진동을 끊임없이 전하는 낭창낭창한 서스펜션 탓에 움직임이 조금 경박하다. 뒤쪽에 멀티링크 서스펜션을 붙였던 동시대 경쟁자와 달리 토션빔 구조를 발전시킨 QT 서스펜션을 썼던 탓일까.

가벼운 차체에 맞물린 V6 2.5L 자연흡기 엔진. 예상대로 가속 페달을 밟으면 약 6000rpm까지 회전하는 속시원한 6기통 소리를 흩뿌린다. 덕분에 체감 가속도 더 매콤하다. SM525V는 최고출력 173마력, 최대토크 22.5kg·m 성능으로 1445kg 덩치를 내몬다. 시속 100km까지 가속 시간은 대략 10초를 조금 넘기는 수준이며, 제원상 최고속도는 시속 207km다.

다만 고속에서 소음은 다소 들이친다. 이는 SM5가 현역이던 시절에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던 문제다. 그 시절 자동차답게 변속기가 4단에 그치는 만큼 시속 100km로 항속할 때 엔진 회전수도 다소 높다. 2200rpm을 유지한다. 그만큼 힘은 팔팔하지만, 소음이나 효율은 좋을 리 없다.

차주에 따르면 그간 누적 연비는 대략 1L에 8.5km다. 고속으로 항속 주행할 땐 1L에 10km를 조금 넘기며, 도심을 주행할 땐 1L에 5km 까지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먹성 좋은 V6 엔진과 동력 손실 큰 4단 자동변속기를 맞물린 만큼 실제 효율은 그다지 높지 않다. 물론 20년 차로 접어든 차령도 무시할 순 없다.

르노삼성 SM525V. 명불허전이다. 당시 신가교 도장 공법을 활용한 페인트는 여전히 반짝거리며, 아연도금 강판에 부식은 없었다. 세계 10대 엔진에 14번 이름을 올린 명기 VQ 엔진과 아이신 4단 자동변속기를 조합한 파워트레인 역시 쌩쌩하다. 20년, 23만km를 달려온 SM5의 시간은 여전히 2002년에 머물러 있었다.

 

SM5에 얽힌 시시콜콜 이야기

 

품질로 BMW를 이겼다

1997년, 아직 출시도 하지 않은 SM5가 미국 공인 자동차 테스트 기관 AMCI의 평가를 받았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11개 평가 항목 중 8개 항목 1위를 거머쥐었다. 독일 명차 BMW 528i는 물론, 당시 미국에서 인기를 구가하던 혼다 어코드와 토요타 캠리까지 넘어섰다. 품질의 왕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쉬운 길이 있었다. 삼성자동차는 1994년 닛산이 폐쇄한 공장의 조립 라인을 그대로 들여오며 손쉽게 공장을 지어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삼성은 구식 공장 설비로 첫 발걸음을 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닛산 조립 라인 도입을 백지화하고 1995년 부산에 새 공장을 지어 올린다.

삼성이 만든 처음이자 마지막 자동차

SM5는 1995년 출범한 삼성자동차가 만든 첫차. 그러나 최신 공장과 SM5에 들어간 고급 부품이 발목을 잡고, 외환위기까지 겹치며 1999년 6월 삼성자동차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1998년 신차 출시 후 1년 만에 삼성자동차의 역사는 끝났다. 그 뒤는 2000년 출범하는 르노삼성자동차가 잇는다.

 윤지수

사진 이영석, 르노삼성자동차

자동차 전문 매체 <탑기어 코리아>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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