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우체부 :: 정몽구 회장이 승합차 그레이스 문을 '쾅쾅' 스무번 내리쳐 부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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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그룹이 새로운 변혁의 시대를 맞고 있다. 정몽구 회장에 이어 정의선 회장으로 경영 체제가 바뀌면서, 글로벌 자동차 시장은 친환경 전기차와 수소차, 미래 모빌리티 시대로 급변하고 있는 모양새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지난 20여년간 ‘품질’을 앞세운 ‘뚝심경영’으로 변방(邊方)에 머물렀던 현대차그룹의 위상을 높였다면, 정의선 회장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도해야만 하는 중책을 맡게됐다. 데일리카는 정몽구 명예회장이 고집스럽게 펼쳐왔던 그만의 경영철학을 되살펴보고, 정의선 회장이 추구해야 할 브랜드의 창조적 파괴와 진화를 위한 또다른 ‘디자인 경영’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데일리카 하영선 기자] 현대차가 지난 1974년에 내놓은 포니(Pony)는 현대차가 독자적으로 생산한 고유 모델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남다르다.

자동차 디자인의 ‘거장(巨匠)’으로 불렸던 이탈리아의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가 디자인을 맡았는데, 포니는 46년이 지난 지금에서 보더라도 세련미와 함께 모던한 디자인 감각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포니는 세단과 해치백, 픽업, 왜건 등 다양한 시리즈로 소개됐는데, 1984년 단종되기 까지 단일 차종으로서는 처음으로 50만대 생산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운다.

당시 현대차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넷째 동생인 고(故) 정세영 사장이 이끌었는데, 그에게는 ‘포니 정’이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포니의 인기는 대단했다.

정세영 사장은 여세를 몰아 포니를 선보인지 10년이 흐른 1984년에 그야말로 개발단계에서부터 생산에 이르기까지 현대차가 독자적으로 만든 고유모델 ‘엑셀’을 내놓는다. 엑셀은 ‘좀 더 나아진 포니’, ‘뛰어난 포니’라는 의미를 지녔는데, 한국의 도로사정에 적합한 전륜구동 방식이 적용됐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는다. 엑셀은 ‘자동차 왕국’으로 불렸던 미국을 비롯해 유럽시장에서 연간 16만여대가 판매되는 등 인기를 모았다.

엑셀은 1980년대 부터 불기 시작한 ‘마이카’ 열풍과 함께 경쟁차 대비 실내 공간이 넓고, 승차감이 뛰어났다는 점에서 젊은 층으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엑셀은 탄생 이후 1994년까지 국내를 포함한 글로벌 시장에서 총 250만여대 판매를 기록한다. 현대차의 수익을 이끈 차라는 점에서 오늘날 현대차그룹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한 시초였던 셈이다.

그러나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생기는 법. 현대차는 저렴한 가격에 물량공세로 엑셀을 판매하는 마케팅 전략을 내세웠는데, 결국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도 늘 품질문제로 곤혹을 겪게 된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속담처럼, 엑셀은 ‘너무 싼 가격에 겨우 달릴 수 있는 차’로 통했다. 심지어는 ‘몇번 타다가 고장나면 그냥 버리는 차’라는 이미지였다.

수출된 엑셀은 고장이 발생하면, 제때제때 정비가 되지 않은 탓에 ‘현대자동차’를 ‘현다이(Die)’로 불리는 오명도 낳게 한 장본인 이었다.

현대차는 이후 1985년 스텔라의 고급형을 출시하는데, 이 차가 바로 쏘나타의 전신에 속한다. 쏘나타는 당시만 하더라도 ‘소나타’로 불렸다.

소나타는 연주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4악장 형식의 악곡인 소나타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게 현대차 측의 설명이다. 혁신적인 성능과 기술, 합리적인 가격을 지닌 종합 예술 승용차라는 의미를 담았다.

그러나 당시 대우차와 기아차 등 경쟁 브랜드와 현대차 안티팬들 사이에서 ‘소나 타’, ‘소가 타는 차’라는 등의 비아냥이 나오면서부터 ‘쏘나타’로 모델명을 바꿨다는 말도 나온다. 지금으로선 우스꽝스러운 얘기다.

현대차는 이후, 1986년에는 고급차의 상징으로 불리는 그랜저(GRANDEUR), 1990년 들어서는 지금의 아반떼로 소개되고 있는 엘란트라를 내놓는 등 자동차 회사로서의 자리매김을 모색한다.

현대차는 1967년에 창립된 이후 1999년까지 32년간 정세영 사장이 이끌어왔다. 정 사장의 작품이자 업적으로도 평가받는 현대차 ‘포니’, 또 개발단계에서부터 생산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으로 개발해 생산한 고유모델 ‘엑셀’은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을 대표하는 역사적 모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정세영 사장이 진두지휘했던 이 시기에는 국내 및 해외시장에서 현대차의 품질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됐다는 점도 빼놓을 수만은 없다. 당시만 하더라도 현대차의 기술력이 선진화되진 않은 때문이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지난 1970년부터 현대차 서울사업소 부품과 과장을 시작으로 현대차와 인연을 맺는다. 1999년 현대차와 기아차 회장에 이어 2000년부터는 현대자동차그룹의 회장을 맡게된다.

그는 1999년 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현대차 울산공장을 찾는다. 승합차 그레이스의 슬라이딩 도어를 스무번 이상 ‘쾅쾅’ 내리찍자 차문이 떨어져 나갔다. 생산 라인을 올스톱 시켰다는 그의 일화는 여전히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자동차 뉴스 채널 데일리카 http://www.dailycar.co.kr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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