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우체부 :: '자동차역사' 카테고리의 글 목록 (15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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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처음이란 것은 늘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첫 사랑, 첫 직장, 첫 만남……. 1984년 9월 <자동차생활>창간호를 장식한 첫 자동차 광고와 본지에 처음으로 소개된 수입차 광고는 무엇일까?

창간호를 장식한 첫 자동차 광고
아시아 버스

1976년 기아자동차의 계열사로 흡수되기 전에 독립된 회사였던 아시아자동차. 1970년 큰 인기를 누린 피아트 124를 생산하기도 한 아시아자동차는 트럭, 지프, 고속버스, 일반버스 등 상용차 전문 제조업체로 유명했다. 이 광고는 1984년 9월 본지 창간호를 장식한 아시아 버스 광고다. 1990년대 초반까지 중형 버스 시장에서 독주를 하던 AM808과 콤비의 모습이 무척 정겹다.

맵시나
대우가 1983년 8월 현대 포니에 맞서기 위해 개발한 소형 승용차 맵시나의 광고도 본지 창간호를 장식했다. 맵시나는 당시 자체기술로 개발한 첫 엔진인 XQ 엔진을 1982년에 출시된 맵시 차체에 얹어 개발된 모델이다. 맵시나라는 이름은 ‘맵시가 있다’는 뜻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맵시를 두 번째 만들었다는 뜻을 가나다 순을 붙여 ‘맵시-나’라고 한 것이다.

1980년대 사랑 받은 인기 모델들
대우 로얄 프린스

1983년 봄, 현대에서 1.5L급 스텔라를 개발해 중형차 시장에 뛰어들자, 같은 해 5, 6월에 대우에서는 로얄 살롱 신형과 로얄 프린스를 선보였다. 사진 속 차는 1세대 로얄 프린스 모델로 한눈에 차의 상태를 알아볼 수 있는 집중식 계기판과 조작이 편리한 각종 지시기가 운전석 주위에 일목요연하게 자라 잡고 있었다. 레코드1900으로부터 이어져 온 로얄 프린스는 로얄이 쌓아온 10년간의 명성을 이은 차다.

대우 르망
대우와 GM이 합작해 만든 월드카 르망은 1986년 6월에 등장했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스타일과 소형차에는 보기 드문 뛰어난 성능으로 출시와 동시에 큰 인기를 얻었다. 르망은 판매에 들어가자마자 현대 포니 일색이던 소형차 시장에 새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는 즐거움’ 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냈다
카 매니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발 빠른 가지치기 모델을 선보인 차가 르망이다.

현대 그랜저
1986년 7월 첫선을 보이고 6년 동안 최고급차의 자리를 지켰던 현대 그랜저는 1992년 10월 뉴 그랜저로 대체되면서 단종되고, 부활되기 전까지 9만2,517대가 팔렸다. 최고의 국산차라는 자부심으로 태어난 그랜저는 비록 미쓰비시와의 공동개발이었지만 이전까지 선진국의 일방적인 기술 제공 단계를 협력체제로 끌어올렸고, 우리나라의 경쟁력 있는 부품이 일본으로 수출될 가능성을 높여준, 의미 있는 모델이었다.

본지에 실린 첫 수입차 광고
BMW 735iL

1988년 5월호에 실린 BMW 735iL 광고는 본지 창간 이후 처음으로 실린 수입차 광고다. 1987년 7월부터 1L~2L급을 제외하고 수입차제한조치가 풀리자 개방에 맞추어 해외 메이커와 딜러십을 맺기 위한 국내 업체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당시 캐딜락 드빌, 뷰익 파크 애비뉴, 링컨 컨티넨탈과 머큐리 세이블 등의 등장이 이어졌지만 수입차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모델은 역시 유럽산 차였다. 특히 BMW는 3, 7, 8시리즈를 시작으로 코오롱상사(주)를 통해 수입,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사진은 BMW의 기함으로 불리는 7시리즈 가운데 735iL 모델이다. ‘시동을 걸어도 모로 세워놓은 동전이 쓰러지지 않는 환상의 V12 엔진’ 이라는 설명이 재미있다.

BMW 320iA
국내에서 가장 다양한 종류의 엔진과 가지치기 모델을 자랑하는 수입차가 바로 BMW 3시리즈다. 3시리즈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BMW를 처음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인기 모델로, 사진은 1990년대 초 국내에 판매되던 BMW 320iA 광고다.

BMW 5시리즈
BMW 5시리즈가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525i로 첫 발을 내딛은 후부터다. 1997년 6월호에 실린 이 광고는 충돌테스트에 사용되는 더미 일가족(?)을 앞세워 5시리즈의 안전성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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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2차 남북 정상회담 때 평양까지 타고 간 차는 메르세데스 벤츠 S600 가드이다. 우리나라 대통령 중 방탄차를 처음 탄 사람은 제8대 박정희 대통령. 미국 대통령 중에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처음으로 링컨 컨버터블 방탄차를 탔다. 방탄차로 많이 개조되는 모델은 링컨 컨티넨탈, 캐달락 플리트우드, 벤츠 S클래스, BMW 7시리즈 등 최고급 승용차. A급 방탄차 전문 메이커는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에 20여 곳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2차 남북 정상회담 때 전용차를 타고 북녘 땅을 달렸다. 분단 6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어떤 차를 이용할지가 큰 관심을 끌었다. 노 대통령이 지난 10월 2일 서울에서 평양까지 타고 간 차는 메르세데스 벤츠 S600 가드였다. V12 5.5L 트윈 터보 엔진에 최고시속 210km를 내며, 수류탄 등 폭발물이 차 밑에서 터져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다. 차 문짝 1개 무게만 100kg이 넘고 전체 무게는 3톤 정도라고 한다.
타이어 4개가 한꺼번에 펑크 나더라도 시속 80∼100km를 유지할 수 있고, 화생방 공격에 대비한 자체 산소공급장치도 달려 있다. 공격으로 불이 났을 때 작동되는 스프링클러 시스템과 총탄 공격 때 연료탱크가 자동으로 폐쇄되는 기능도 갖추고 있다. 이 차는 현재 90여 개국 주요 인사들이 이용하며, 청와대는 지난해 사들였다.

대통령차, 1960년부터 방탄 장비 갖춰
한편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평양비행장에는 최신형 링컨 타운카 리무진과 벤츠 S클래스 리무진 그리고 1975년형 링컨 컨티넨탈 리무진이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나왔다. 이들은 모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용차로 보였는데, 이 가운데 김 대통령을 태운 차는 1975년형 링컨 컨티넨탈 리무진이었다.
이 리무진은 데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방탄차로 이름이 났던 터라 안전을 위해 대통령 영접에 대동된 것이다. 벤츠 매니아인 김 위원장은 이들 외에도 벤츠 600을 포함해 여러 대의 방탄 리무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생일 때는 최고의 공훈을 세운 자에게 벤츠차를 선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과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벤츠 방탄차를 열차 편으로 수송해 방문국에서 타고 다녀 눈길을 끌었다. 현재 김 위원장이 애용하는 차는 벤츠의 최고급차인 S600의 6세대 모델인 W140을 방탄차로 개조한 것이다. 이 차는 일반 리무진보다 1m 이상 길어 뒷좌석에는 누울 수 있도록 접이식 침대가 달려 있다. 12기통 6.0L의 일반형 엔진은 408마력이지만 505마력의 엔진으로 개조하고 5단 자동변속기로 최고시속 250km까지 달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1994년부터 98년까지 생산되었고, 특히 구소련 외무장관을 지낸 셰바르드나제 그루지아 대통령이 이 차 때문에 수류탄과 로켓포 공격으로부터 98년과 99년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 유명해진 방탄차다. 벤츠 방탄차의 외관은 일반 S클래스와 같지만 방탄 기능은 상상을 초월한다. 총알을 퉁겨 내는 두꺼운 방탄유리와 지뢰, 수류탄 등이 차 밑에서 터져도 끄떡없는 경고한 하체 구조는 기본이다. 화염방사기나 화염병에도 타지 않도록 차체 전체를 특수 방화처리했다. 문짝 구조나 이음매에는 특수 용접을 통해 빈틈을 없앴고 앞뒤와 옆면에는 8개의 에어백이 달려 2단계로 작동한다
타이어는 탑승자의 몸무게를 인식해 주입 공기량을 자동으로 조절한다. 차가 출발하면 선루프가 자동으로 닫히도록 설계되어 있고 폭발 등으로 타이어 4개가 모두 펑크가 나도 시속 80km로 100km 이상을 갈 수 있다. 화학가스 공격에 대비해 공기 흡입구에 산소공급 시스템이 갖춰져 있고, 라디에이터와 기름탱크도 총격에 견딜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되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방탄차를 처음 탄 사람은 제8대 박정희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취임식장으로 갈 때 방탄차로 개조한 1970년형 캐딜락 드빌 세단을 사용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타는 차는 그야말로 최고급 리무진들이다. 자동차 생산국에서는 그 나라 최고급차를, 비생산국에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롤스로이스나 벤츠 또는 캐딜락 리무진 들을 즐겨 탄다. 이들 대통령의 차들은 최고급 호화 리무진이라는 공통점도 있겠지만 안전을 위해 각종 첨단 보호장비와 통신장비를 갖추고 있으며 1960년대 이후부터 방탄차가 기본장비로 관례화되었다. 차체는 물론 유리, 타이어까지 방탄형이다. 1940년대 이전 대통령의 전용차들은 기술미숙으로 첨단장비가 거의 없었다. 그저 크고 강하고 편안한 고가의 값비싼 차가 대부분이었다.
2차대전을 겪은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방탄차 링컨 컨버터블을 탔다. 1939년 12월 벽돌공으로부터 저격을 받은 직후의 일이다. 링컨 컨버터블 방탄차는 12기통 엔진에 무게가 4톤, 24mm 두께의 방탄유리, 방탄 타이어, 경기관총, 사이렌, 경관등이 달렸지만 지붕은 접이식 소프트톱으로 방탄 지붕이 아니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루즈벨트는 차 지붕을 열고 드라이브하기를 좋아해서 이 차는 ‘선샤인 스페셜’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방탄차를 만든 전문업체는 1949년 링컨 컨티넨탈을 이용해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방탄차를 만든 ‘오개러 헤스 & 에이전하트’사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차도 완벽한 방탄차가 아닌 유리와 하단 차체만 부분 방탄 처리한 리무진이었다. 그후 1963년 달라스에서 링컨 컨티넨탈 오픈 리무진을 타고 가다가 당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총격 피살사건 이후 미국 정부에서는 대통령 의전차를 완전 방탄화하는 관례를 만들어 미국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방탄차 보호를 받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대통령들은 2차대전 종전 직후부터 클린턴 취임 이전까지 링컨 타운카 리무진을 탔다. 그러다가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하면서 캐딜락 플리트우드 리무진으로 바꿔 탔고, 2002년 2월 부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2001년형 캐딜락 드빌 리무진을 가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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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신진 퍼블리카 왜건을 시작으로 지난 40년 동안 다양한 국산 왜건이 선보였다.
몇 차례 반짝 인기를 보기는 했지만 세제와 시장여건, 소비자 인식의 벽에 가로막혀 왜건은 매번 내수 시장에 쉽게 발을 붙이지 못했다. 이번 GM대우 라세티 왜건의 출시는 정통 왜건 제자리 찾기의 성공여부를 확인할 기회가 될 것이다


왜건은 자동차 메이커에게는 세단을 바탕으로 비교적 쉽게 가지치기할 수 있는 모델로, 소비자에게는 일반 세단의 주행특성과 높은 실용성을 고루 갖춘 차다. 여러 장점들 때문에 미국과 유럽 등 해외에서는 오래 전부터 가족용 차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이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왜건의 불모지라 할 만큼 왜건이 인기를 끌지 못했다. 왜건에 불리한 세제와 수시로 변화한 시장여건, ‘왜건은 짐차’라는 소비자의 인식은 그동안 왜건이 내수 시장에 쉽게 발을 붙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그러나 짧은 자동차 생산 역사 가운데에도 다양한 왜건들이 등장해 어려운 여건들을 극복하고 자리를 찾기 위해 애써왔다.

첫 국산 왜건은 신진 퍼블리카 왜건
승용차를 바탕으로 한 첫 국산 왜건은 1967년 신진자동차가 일본 토요타와 제휴로 생산한 퍼블리카 왜건이다. 2도어 4인승 쿠페 스타일로 나온 퍼블리카의 차체 뒤쪽을 왜건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든 것이었다. 당시 소형차 수요가 많지 않았던 탓에 판매대수도 적었고, 결국 1971년 퍼블리카와 함께 생산이 중단되었다. 4도어 세단을 바탕으로 2열 좌석과 차체 옆면 유리창, 짐 공간까지 완벽하게 갖춘 정통 왜건이 국내에서 생산된 것은 1972년의 일이다. 현대가 1969년 내놓은 4도어 세단 포드 20M의 왜건 모델을 조립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즈음까지만 해도 승용차는 일부 부유층 중심으로 팔렸기 때문에 왜건과 같은 가지치기 차종의 수요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 때문에 포드 20M 왜건은 주로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의료수요가 빠르게 늘어난 도시지역 대형 병원의 앰뷸런스로 쓰였다. 그러던 중 신진 크라운에 밀려 포드 20M이 단종되면서 국산 왜건 시장은 한동안 공백기에 들어갔다.
기아 브리사와 현대 포니의 출시로 승용차 대중화 시대가 시작된 직후인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국내 메이커들은 왜건 시장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영업자의 다목적차와 관공서 및 기업체 업무용차 수요를 노린 것이다. 1975년부터 1977년 사이에 현대 뉴 코티나 왜건을 시작으로 GM 코리아의 시보레 카라반, 현대 포니 왜건까지 세 종류의 왜건이 새롭게 등장했다.
이들 중 현대 포니 왜건은 첫 국내 고유 모델 왜건으로 의미가 깊다
1976년 12월부터 판매가 시작된 포니 왜건은 처음에는 1.2ℓ 엔진 모델만 나왔으나 1979년 8월에는 1.4ℓ 엔진 모델도 더해졌다. 기아도 1978년 말 소형차 K303을 바탕으로 한 K303 왜건을 출시해 왜건 러시에 동참했다. 포니 왜건과 K303 왜건은 시보레 카라반이 판매부진으로, 뉴 코티나 왜건은 뉴 코티나가 코티나 마크Ⅳ로 모델 체인지되며 단종된 후 이들의 수요를 흡수해 한동안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러나 왜건 시장이 빛을 본 것은 잠시뿐이었다. 당시 많은 소비자들은 고정된 지붕으로 적재공간이 한정된 왜건보다 소형 픽업 트럭을 선호했다. 게다가 1979년 시작된 2차 석유파동과 1981년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 등의 여파로 1980년대 전반기의 국내 자동차공업은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정부가 자동차 생산을 차급과 차종에 따라 특정 메이커로 특화시키면서 승용차를 생산할 수 없게 된 기아는 1981년 K303 왜건을 단종시켰다. 현대 역시 포니의 뒤를 잇는 포니 2를 수요가 많은 5도어 해치백과 2도어 픽업으로 단순화시키면서 왜건 생산을 중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1981년 기아가 봉고 1톤 트럭과 12인승 원박스카인 봉고 코치를 내놓은 것은 왜건의 몰락에 부채질을 했다. 경제적인 디젤 엔진을 얹은 봉고는 소형 픽업보다 넉넉한 적재능력을 가진 트럭과 활용도가 뛰어난 코치 모두 경영난에 빠진 기아를 순식간에 회생시킬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봉고 코치는 상용차와 레저용차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었고, 그 즈음 시작된 바캉스 붐과 함께 왜건의 수요층을 고스란히 가져갔다.
봉고로 시작된 원박스카의 인기는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가 해제된 1987년 이후로도 현대 그레이스, 쌍용 이스타나 등이 합세해 199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이어지면서 왜건이 발붙일 틈을 주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내 메이커는 한동안 왜건 개발 및 판매에 손을 끊었다. 1980년대 중반 현대가 스텔라 왜건을 만들기는 했지만,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내무부 치안본부(현재의 경찰청) 등 정부기관에 소량 납품했을 뿐 일반 소비자에게는 판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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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동차 기술의 발전은 80년대 수출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기술개발투자의 확대에 이어 90년대 독자엔진 개발을 통한 국제화단계로 접어든다. 자동변속기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대우 로얄 살롱부터이고, 중형차에 V6 엔진이 얹힌 것은 기아 크레도스Ⅱ가 처음이다. 터보 엔진은 현대 스쿠프, 알루미늄 엔진은 EF 쏘나타가 최초이다. 승용차에 ABS 브레이크가 처음 쓰인 것은 대우가 89년 대형차 임페리얼을 내놓으면서다

한국의 자동차산업 발전을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50여 년 전에 출발한 국내 자동차산업 기반이 취약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주요 자동차 생산대국들은 100여 년 전부터 시작되는 나름대로의 기반이 있었으나 한국은 그렇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6·25 이후에 자동차 수요가 늘어나 미군이 놓고 간 지프형 차를 개조해 자동차를 생산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한국 자동차 기술의 발전은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경성정공, 하동환자동차제작소 등이 설립되기 시작한 1960년 이전까지의 태동단계와 근대적 조립라인을 갖추고 외국부품을 KD(Knock Down) 상태로 수입해 차를 조립하면서 부품의 국산화율을 높여가는 60~70년대의 단순조립 단계 그리고 70년대 중반부터 고유모델차의 개발에 성공해 양산이 시작되면서 기술수준을 높여나가는 고유모델 개발 및 양산단계이다.

1979년 정부는 자동차산업을 10대 전략사업의 하나로 지정해 자동차를 수입대체산업에서 탈피하고 주요 수출산업의 하나로 성장시키고자 노력했으며, 이때 이루어진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80년대 자동차산업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국제경쟁력 향상으로 수출이 급격히 늘고, 경쟁력을 갖는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한 기술개발투자의 확대와 1990년대의 독자엔진 및 변속기의 개발을 통한 수출산업화 및 국제화단계이다. 80년대 이후 이루어진 국산차의 주요 기술 발전 변천사를 살펴본다.

자동변속기(AT)의 보급

80년대 이전까지 승용차에서 자동변속기(AT)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반조립 상태로 도입된 외제 승용차에서였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국산 대형차에 쓰이게 된 시기는 80년 대우 로얄 살롱부터이다. 소형차에는 대우 맵시부터 얹기 시작했다. 오펠 카데트에 뿌리를 둔 이스즈 차를 베이스로 한 제미니는 82년 맵시로 이름을 바꾸며 1.3, 1.5ℓ 엔진을 얹고 자동 3단 트랜스미션을 얹었다. 킥다운 기능이 있어 당시에는 진일보한 기술이었다.

현대자동차는 99년부터 앞바퀴굴림 자동 4단 변속기를 독자적으로 생산하지만 RV와 상용차에 쓰이는 뒷바퀴굴림 자동변속기는 올해 2월에 들어서야 현대 계열사인 현대 파워텍이 일본 자트코사 및 미쓰비시와 기술제휴를 맺어 국산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각 메이커마다 국산화율을 높여가고 있지만 일부 차에는 귀에 익은 일본 아이신이나 독일 ZF제 자동변속기가 그대로 도입되어 쓰이고 있다.

자동 5단 트랜스미션은 벤츠제 게이트식 5단 AT를 도입해 얹은 쌍용 체어맨이 처음이다
5단 AT는 종전의 4단 AT에 비해 연비 약 9%, 발진가속 및 추월가속성능 약 6% 향상과 실내 유입소음도 1데시벨(db)감의 개선효과가 있다.

또한 2001년부터 현대 그랜저 XG에 얹은 자동 5단 H-매틱은 다이내믹한 운전성 확보를 위해 수동변속기(MT) 감각의 매뉴얼 조작이 가능한 듀얼 게이트 스포츠 모드 기능이 국내 처음으로 쓰였다.

그밖에 수동과 자동의 장점을 결합한 세미 오토는 98년 대우 마티즈에 처음 소개되었지만 시판 4개월만에 전량 리콜 되는 등 품질에 많은 결함이 나타나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이후 무단변속기 역시 마티즈에 의해 소개되었는데 보다 진화된 형태인 E3 CVT를 채택하였다. E3 CVT는 AT 차의 편의성과 수동변속기에 비해 6~10% 향상된 뛰어난 연비가 장점이다. AT와 금속벨트식 CVT는 유압공급을 위한 오일펌프(습식)가 필요해 기계적 손실이 큰 반면 E3 CVT는 유압공급을 위한 오일펌프가 필요 없어 기계적 손실은 적어지고 연비에 유리하게 된다. 그리고 전자식 인공지능을 이용, 자동으로 최적의 기어비를 연산, 변속 동력손실을 발휘할 수 있다.

엔진 기술의 발전

6기통 엔진의 등장
직렬 4기통이 주류를 이루던 자동차시장에 고급차의 상징인 6기통 엔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67년 수랭식 직렬 6기통 2.0ℓ 105마력 엔진을 얹고 나온 신진 크라운이 국내에 소개된 첫 6기통 엔진 차이며 최고시속 150km를 자랑하는 당시 최고급 승용차였다. 이후 현대는 78년에 새한 뉴 레코드가 독점하고 있던 고급차시장에 독일 포드사와 기술제휴로 20M을 내놓으면서 V6 엔진이 등장했고, 그라나다가 그 뒤를 이어갔다. 고급차의 상징이었던 V6가 중형차로는 국내 처음으로 기아 크레도스Ⅱ에 얹히며 대중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직렬 6기통 엔진이 다시 등장한 것은 89년 임페리얼부터이며 현재 매그너스에도 쓰이는 등 대우차에 주로 쓰였다. 대우차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내놓은 ‘직렬 6기통 횡치(橫置)엔진’인 ‘L6 엔진’은 국내 엔진기술의 또 다른 진보로 평가되고 있다. 95년부터 7년여 동안 510억 원을 들여 개발에 성공한 L6엔진은 그동안 엔진 크기 문제로 가로놓기가 어려웠던 ‘직렬 6기통 종치 엔진’의 단점을 극복, 컴팩트하게 설계해 중형차 엔진으로는 세계 최초로 가로놓기에 성공함으로써 앞바퀴굴림 채택이 가능해졌다. 또한 호주 홀덴사에서 수입하던 2.0 이상 중형차 엔진의 도입 비용도 크게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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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F1 참가를 통해 쌓은 혼다의 기술력은 25년 뒤 일본의 첫 정통 스포츠카 NSX로 빛을 발했다. 자동차 개발의 귀재 밥 러츠와 디자이너 톰 게일이 만들어낸 다지 바이퍼는 시보레 코베트를 앞지르는 카리스마로 명성을 높였다. 아부스와 ASF 등 90년대 초의 실험을 거쳐 94년 등장한 아우디 A8은 알루미늄 프레임을 양산차에 쓴 기념비적인 차다

혼다 NSX (1990~현재)
Honda NSX
혼다를 얘기할 때는 ‘기술’과 ‘혼다 소이치로’를 빼놓을 수 없다. 대규모 메이커가 아닌 혼다가 오늘날 전세계의 주목을 받는 주요 자동차 메이커로 자리잡은 원동력은 기술을 중요시했던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의 집념과 그의 뜻을 정확하게 실현해낸 뛰어난 기술력이라 할 수 있다.

모터사이클 메이커로 인기를 얻고 1962년 자동차 생산에 뛰어든 혼다는 도쿄 모터쇼에 내놓은 S500과 경스포츠카 S360 외에 제대로 된 양산차조차 없는 상태에서 곧바로 F1에 도전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결정이었지만 혼다 소이치로 회장의 고집과 엔지니어들의 도전정신은 64년 독일 그랑프리 출전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 첫해 3번의 레이스에서 모두 리타이어한 혼다는 이듬해 최종전인 멕시코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다음해인 66년에도 한 차례 우승을 거머쥐면서 F1의 강자로 떠오른다. 하지만 68년 테스트 주행 도중 프랑스인 드라이버 조 슐레세르가 숨지는 사고를 겪은 뒤 F1 참가 중단을 선언한다.

이후 혼다는 F1에서 쌓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72년 7월 스테디셀러 시빅을 선보였고 76년에는 브랜드 이미지를 한 단계 끌어올린 어코드를 내놓았다. 시빅이 데뷔한 70년대 초, 브라밤 팀의 F2 미캐닉으로 활동하던 가와모토 노부히코가 혼다 기술연구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성능 스포츠카 개발을 위한 포석이었다.

혼다의 목표는 세계 최고의 GT카를 뛰어넘는 성능에 최고의 스타일링을 갖춘 스포츠카였다. 개발을 시작한 지 6년 반이 지나면서 혼다의 첫 정통 스포츠카 NSX(New Sports Experimental)의 밑그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혼다 엔지니어들은 당시 GT카에 일반적으로 쓰이던 V8이나 V12 엔진 대신 가벼운 V6 3.0X VTEC 280마력 엔진을 미드십에 얹고 알루미늄 차체로 무게를 줄였다. 혼다의 기술이 고스란히 담긴 일본 최초의 본격 스포츠카 NSX는 89년 미국 시카고 오토쇼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독일 뉘르부르크링 서키트 주행을 거쳐 섀시를 보강하고 일본 스즈카 서키트에서 F1 명드라이버 아이르톤 세나가 시험주행을 마친 NSX는 개발의 주역 가와모토가 혼다 사장에 취임한 90년 여름 시판에 들어갔다. 최고시속 270km, 0→시속 100km 가속 5.9초의 성능은 페라리 348이나 포르쉐 911 카레라 2 수준이었지만 승용차 감각과 F1 기술을 접목한 덕분에 운전이 훨씬 쉬웠다. 트랜스미션은 수동 5단과 자동 4단. 이후 혼다는 92년 11월 한정생산 모델인 NSX-R을 선보였고 지난해 도쿄모터쇼에서는 헤드램프 디자인을 바꾸는 등 7년만에 마이너 체인지를 거친 NSX-R을 발표해 다시 한번 눈길을 모았다.

다지 바이퍼 8.0 V10 RT (1992~현재)
Dodge Viper 8.0 V10 RT

미국 양산 스포츠카의 시발점은 1950년대 중반 태어난 시보레 코베트라 할 수 있다. 코베트는 미국인들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스포츠카였지만 끝없이 쏟아지는 미국인들의 사랑을 감당하느라 그만 진화가 느린 차가 되어버렸다. 코베트는 80년대 말을 지나면서 비로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때 등장한 코베트 ZR-1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스포츠카였고 미국 2세대 스포츠카 붐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ZR-1을 뛰어넘는 새로운 미국 스포츠카가 등장한 것도 이 즈음이다.

88년 당시 크라이슬러 회장 리 아이아코카는 회사를 다시 세우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미니밴과 정통 세단의 판매에 열을 올리는 한편 새로운 모델의 개발에 몰두했다. 하지만 새 모델의 개발에는 예상보다 긴 시간이 걸려 3년의 세월이 지루하게 지나갔다. 공백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 차가 필요했다. 당시 크라이슬러 사장 밥 러츠와 디자인 담당 부사장 톰 게일은 이 프로젝트 개발의 적임자였다. 유럽에서 오랫동안 근무해 유럽 스포츠카 감각을 익힌 밥 러츠와 미국에서만 일했던 톰 게일의 만남은 가장 미국적이면서도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스포츠카 탄생의 청신호였다.

개발팀은 우선 대형 픽업에 쓰기 위해 개발 중이던 V10 8.0X 엔진을 새로운 핫로드에 쓰기로 결정했다. 개발 과정에서 영감을 주었던 쉘비 코브라의 별명을 따 차 이름을 바이퍼(Viper, 독사)로 정했다. 바이퍼 프로토타입이 89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처음 공개되었을 때까지도 크라이슬러는 이 차의 양산계획을 발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터쇼 기간에 바이퍼를 본 수많은 사람들이 양산을 원했고 이에 따라 크라이슬러는 생산채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30명으로 구성되었던 바이퍼 개발팀은 85명으로 보강되었다. 또 당시 크라이슬러 산하에 있던 람보르기니 기술진은 무게 325kg의 경합금 엔진을 만들어 바이퍼에 얹었다. 프로토타입 발표 3년 뒤, 밥 러츠 사장은 바이퍼 양산 1호차를 직접 몰고 나타났다.

바이퍼는 최고출력 400마력, 최대토크 62.2kg·m의 엄청난 엔진을 얹고 폭 2m에 가까운 거구로 최고시속 265km, 0→시속 100km 가속 4.5초의 놀라운 성능을 자랑했다. 도어 아래쪽 겉으로 드러나 있어 화상의 위험이 있는 사이드 머플러 커버와 안쪽에만 달려있는 도어 손잡이, 옷가방을 넣기도 비좁은 트렁크룸 등 불편한 점이 수두룩했지만 전형적인 미국 ‘이그조틱카’의 멋을 지닌 바이퍼는 모든 단점을 매력으로 만들어버렸다. 20세기 최고의 명차 100대에 바이퍼가 포함된 이유는 ‘카리스마’ 단 한 가지였다.

아우디 A8 (1994~현재)
Audi A8

1991년 도쿄 모터쇼는 6주 먼저 열렸던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대부분의 주요 모델들이 공개되는 바람에 ‘재탕 모터쇼’로 전락할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아우디는 재미없는 모터쇼가 될 뻔한 도쿄 모터쇼의 주인공이 될 새 모델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터쇼 개막과 동시에 예고도 없이 등장한 이 차는 바로 보디 전체를 알루미늄으로 만든 수퍼카 아부스였다. 앞뒤를 구별할 수 없는 파격적인 스타일에 공기저항계수 0.29의 유선형 디자인도 놀라웠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도장하지 않은 채 반짝이는 알루미늄 보디였다. 차체 무게 1천250kg에 불과한 아부스는 4WD 방식과 프로콘텐 시스템 등 아우디 독자 기술의 결정체였다. 프로콘텐 시스템은 아우디가 86년 인기모델 아우디 80을 통해 처음 선보였던 첨단 안전장치로, 정면충돌 때 엔진이 밀려들어오면 스티어링 휠은 대시보드 쪽으로 밀착되고 안전벨트는 조여져 운전자의 가슴을 보호한다.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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