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우체부 :: '자동차역사' 카테고리의 글 목록 (4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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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가 발명된 이래,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과 '수레바퀴'는 항상 함께 해 왔다. 수레바퀴는 인류의 이동성을 크게 확장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육로 운송 체계를 혁신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어 정치, 경제, 산업, 기술, 그리고 전쟁까지 뒤바꾸었다. 특히 전쟁에서는 도보나 가축을 이용한 운송수단에 비해 막대한 양의 물자를 효율적으로 실어나를 수 있는 수레바퀴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용해 왔다. 수레바퀴가 나타나지 않은 문명은 아즈텍, 마야, 잉카 등, 메소 아메리카에 기반을 둔 문명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그렇다면 자동차는 언제부터 전쟁에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자동차는 19세기 말부터 민간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전쟁에 필요한 운송수단으로서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게 된 시기는 바로 제 1차 세계대전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육상 수송 수단은 '우마차', 그리고 '철도'였지만 이 시기를 전후하여 자동차가 가진 수송능력이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철도가 갈 수 없는 곳에도 물자와 병력을 수송할 수 있는 자동차의 능력은 이미 강대국에서는 인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육상운송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철도'와 '우마차'였다. 당시의 자동차는 최신 기술이었기 때문에 지금 만큼의 신뢰도를 가지지 못했고, 유지보수도 다소 어려운 실정이었다. 게다가 생산성 또한 지금처럼 좋은 수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공장을 쉬지 않고 가동해도 한 달에 1천 대 조차 생산하기 어려웠다. 이리하여 태생적으로 보수적인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군대에서는 이러한 이유로 자동차의 전면도입을 꺼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이 '참호전'으로 요약되는, 인류 역사 상 전례가 없는 소모전으로 치달으면서 자동차의 위상도 변화를 맞기 시작했다. 1km를 전진하기 위해 수십만 명이 희생당하는 가운데, 전선에서 요구하는 병력과 물자의 수요가 폭증했고, 이에 참전국들은 가용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전 국토가 전쟁터로 변해버린 프랑스는 부족한 수송량을 메우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야만 했다. 제 1차 마른 강 전투에서 파리 시내에서 영업하던 600여대의 택시를 징발해 6천여명의 병력을 실어 나른 일화가 유명하다. 이는 비록 전선에서 요구했던 전체 수송량에 비하면 그야말로 한 줌에 불과했지만, 이렇게 영혼까지 끌어 모은 동원작전을 통해 프랑스는 제 1차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프랑스군은 자동차를 본격적으로 전선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개전 당시 6천여대에 불과했던 자동차 수량은 종전에 이르면 10만 여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자동차는 물자의 운송 뿐만 아니라 소수의 병력을 실어나르며 기동 전투를 치르는 기계화 보병을 위한 장갑차로도 활용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발명된 롤스로이스 장갑차가 그 대표적 사례다. 극초기형의 전차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으면서도 뛰어난 화력을 제공하는 빅커스 기관총을 탑재해 보병을 상대로 우위에서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또한 자동차 제조사였던 르노는 이 전쟁에서 현대 전차의 원류로 손꼽히는 르노 FT 전차를 개발,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자동차가 보여 준 수송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 세계각국은 너나할 것 없이 자국의 군대에 자동차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 제 2차 세계대전에 이르게 되면, 자동차의 수송 분담률이 큰 폭으로 올라갔다. 특히 미국의 경우에는 전시 체제로 돌입하면서 그야말로 막대한 양의 자동차를 쏟아내 전선에 투입했다. 반면, 독일군의 경우에는 미국에 비해 자동차의 생산역량도 절대 부족했고, 아직도 우마차의 수송 분담률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의 군대, 특히 지상군은 일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제 2차 세계대전까지 전장에서 굴렀던 '말'의 자리를 완전히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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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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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0년 전만 해도 익숙하지 않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지도책을 펴놓고 어떤 길이 좋을지 한참 동안 궁리를 하고 나서야 출발하거나, 그래도 길을 가다 망설여질 때면 “아저씨, 000가려면 어떻게 가죠?”라고 신호를 기다리며 창문을 내리고 물어보곤 했습니다. 택시를 운전하시는 분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고급차에 간혹 장착해 출시되는 내비게이션의 편리함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면서, 한동안은 내비게이션이 없는 자동차는 시중에서 판매되는 제품을 따로 사서 다는 것이 유행인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대부분의 차에 당연히 설치되어 나오는 필수 옵션이 되었고, 심지어 스마트폰 속에 쏙 들어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자동차 운행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기능의 하나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첨단기술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내비게이션이 이미 100년 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아는 분은 많지 않으실 듯합니다.

최초의 자동차용 내비게이션으로 알려진 것은 1930년 ‘Iter Avto’ 라는 이름의, 종이 롤로 만들어진 지도가 장착되는 내비게이션입니다. 인공위성이 없던 시절이니 위성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속도 케이블과 연동되며 이 종이 롤에 그려진 지도가 돌아가는 형태였다고 하네요. 여러 지도를 담고 있는 종이 롤이 있어서, 목적지가 바뀌면 롤을 갈아 끼워야 했다고 합니다.

출처cnet

그보다 앞선 1920년대에는 종이 롤형의 지도를 활용하는 손목형 내비게이션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역시 여러 지도가 그려져 있는 종이 롤 중에서 목적지와 맞는 종이 롤을 선택해서 달고, 롤러를 손으로 돌리면서 이동하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출처Honda

우리가 사용하는 최근의 내비게이션은 인공위성과 신호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는데요. 위성항법장치라 불리는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를 활용한 현대적인 내비게이션은 1980년대 일본의 혼다와 알파인이 함께 만들어 냈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일본의 자동차 내비게이션 산업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활발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로켓으로 쏘아 올린 인공위성을 활용하고, 화려한 그래픽과 디스플레이, 그리고 전자 부품으로 무장하고 있는 첨단 기술의 상징과도 같은 내비게이션이지만, 이미 100년전부터 그 원형이 되는 제품이 있었다는 사실은 경이롭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역사, 문화, 정치, 패션, 음식 등 많은 것들이 수십 년의 시간을 주기로 반복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됩니다. 자동차뿐 아니라 생활의 많은 분야에서 100년 전의 모습을 잘 살펴보면, 우리를 투모로우 랜드 같은 환상의 세계로 안내할 멋진 힌트가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김주용 (엔터테크 대표, 인제스피디움 클래식카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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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카 + 클래식 = 전설’, 이 공식은 자동차 마니아가 아니라도 환호한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거없이 나이를 초월한다.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전설이란 칭호를 아무나 가질 순없다. 깐깐한 사람들은 온갖 기준을 붙여 흠집을 내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도 인정하는 슈퍼카 + 클랙식의 전설적인 모델이 존재한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왔던 이름, 람보르기니 쿤타치다.

지난해 람보르기니는 모데나 박물관에 자리잡고 있던 쿤타치 25 에디션을 공개했다. 메탈릭 실버 색상의 차체에 보닛은 25주년 데칼이 붙어있고 엠블럼도 25주년 기념 엠블럼이 적용됐다.

미우라의 바통을 이어받으며 1974년 세상에 등장한 쿤타치는 공격적인 디자인과 시저 도어로 단번에 전세계를 주목시켰다. 여기에 12기통 미드십 엔진을 얹어 시대를 대변하는 아이콘이었다. 쿤타치는 람보르기니의 위상을 한 차원 높였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람보르기니 디자인 구심점이다. 여전히 아름답고 다이내믹한 디자인, 깔끔하게 관리된 쿤타치를 사진으로 만나보자.


람보르기니가 쿤타치 25주년 모델의 파트너로 낙점한 모델은 자마라 GTS다. 유명세에선 쿤타치에 조금 모자라지만 람보르기니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모델이다. SUV 모델을 제외하면 람보르기니의 마지막 프론트 엔진 모델이 자마라란 사실.

창업자인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가장 좋아했던 모델로 자라마를 언급하기도 했었다. 페루치오 람보르기니 사진 중 널리 알려진 것이 트랙터와 함께 찍은 흑백 사진인데 이때 트랙터 옆에 자리하고 있는 모델이 자라마다.

김상혁 cardyn@carlab.co.kr

재미있는 자동차 미디어 카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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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년대의 스포츠카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헤드램프의 형태를 기억하는가? 해가 떠 있을 때에는 차체 내에 숨어 있다가 날이 어두워졌을 때 점등하면 '스르륵'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헤드램프 말이다. 이러한 형태의 헤드램프를 '팝업 헤드램프(Pop-up Headlamp)'라고 한다. 다른 표현으로는 '리트랙터블 헤드램프(Retractable headlight)', 혹은 히든 헤드램프(Hidden headlamp)라고도 한다. 

이러한 방식의 헤드램프는 당시 굉장히 미래지향적인 스타일의 헤드램프로 통했다. 특히 점등시 작동하는 모습이 극적인 느낌을 주고, 주간에는 차체 표면과 일체화되어 공기역학적으로 우수하면서 매끈한 외관을 가지는 덕분에 스포츠카들에 많이 사용되었다.

팝업 헤드램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팝업헤드램프를 적용한 차는 1935년 런던 모터쇼에서 등장한 알파로메오의 8C 2900A였다. 이는 당대의 일반도로용 스포츠카들과 현격히 차별화되는 요소로 작용했다. 헤드램프를 사용하지 않는 낮에는 헤드램프를 수납시켜 헤드램프를 아예 달지 않았던 당대의 경주용 자동차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인 1936년 등장한 미국 코드 자동차(Cord Automobile)의 810 모델은 최초의 팝업 헤드램프를 적용한 양산차로 기록되어 있다. 코드 810의 팝업 헤드램프는 고정형 헤드램프 유닛을 감싼 커버를 올리고 내리는 방식으로 개폐하는 형태였다.

팝업 헤드램프의 전성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미국 시장의 헤드램프 높이 규제로 인해 시작되었다. 이 당시 미국에서 요구하는 헤드램프 높이는 일반적인 세단형 승용차에서는 적용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으나, 낮은 지상고와 차체 높이를 갖는 스포츠카들에게는 지나치게 높아, 이를 회피하기 위해 미국 시장에 발을 담근 수많은 스포츠카들이 너도나도 팝업 헤드램프를 도입했다.

반면, 팝업 헤드램프에는 단점도 적지 않다. 사실 주간에 소등했을 때의 매끈하고 수려한 외관, 그리고 그를 통해 얻어지는 (주간 한정으로)뛰어난 공기역학적 특성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단점이라 할 수 있다. 일단 구조가 일반적인 고정형 헤드램프에 비해 매우 복잡하다. 점등할 때마다 묵직한 헤드램프 뭉치를 전개해 줄 기계장치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동력장치가 들어가므로 필연적으로 무게를 많이 차지해 차체 중량 배분에 악영향을 주고, 야간에는 기껏 다듬어 놓은 공기역학적 형상을 망가뜨렸다.

게다가 당시 이러한 장치들은 전자부품이 많아 가격이 비싸고, 유지보수비 또한 일반 고정형 헤드램프를 탑재한 차량보다 훨씬 많이 들었다. 특히 정면 충돌 사고로 인해 헤드램프 유닛이 파손되기라도 하면, 매우 비싼 수리비를 내야 했다. 심지어 일부 차종은 같은 플랫폼에서 개발한 형제차의 전면부를 통째로 가져다 접합하는 것이 수리비가 더 싼, 황당한 경우도 있었다. 닛산의 스포츠 쿠페 모델인 '180SX'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다. 1980~90년대 당시 일본에는 형제차인 실비아(S13)의 전면부를 접합한 180SX들이 심심치 않게 존재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혼종(?)차를 두고 일본 내 자동차 튜닝/애프터마켓 업계에서는 '실-에이티(Sil-Eighty)'라는 속칭으로 불렀다.

팝업 헤드램프는 1990년대를 전후로 자동차 업계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동차의 충돌안전 규제가 점차 자동차 내 탑승객 뿐만 아니라 보행자의 안전까지 고려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 그 원인 중 하나다. 이 당시 함께 없어지기 시작한 것 중 하나가 고급 승용차들이 너도나도 사용했었던 후드 오너먼트(본넷 엠블럼, 후드 탑 마크) 등의 장식물을 들 수 있다. 팝업 헤드램프는 야간에 점등시 보닛 위로 돌출되는 구조물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규제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팝업 헤드램프가 다시 부활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오늘날 자동차용 등화류는 엄청나게 많은 규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양산차에는 고정식 헤드램프가 강제되는 것은 물론, 주간에 점등시켜 차폭등의 역할을 하기 위한 주간상시등(Daytime Running Light)까지 필수다. 심지어 현재 운행하고 있는 차량들 중 주간상시등이 없는 차량은 주간에도 헤드램프를 점등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날로 강화되어 온 보행자 충돌안전 규제로 인해, 팝업식 헤드램프는 설 자리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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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그룹이 새로운 변혁의 시대를 맞고 있다. 정몽구 회장에 이어 정의선 회장으로 경영 체제가 바뀌면서, 글로벌 자동차 시장은 친환경 전기차와 수소차, 미래 모빌리티 시대로 급변하고 있는 모양새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지난 20여년간 ‘품질’을 앞세운 ‘뚝심경영’으로 변방(邊方)에 머물렀던 현대차그룹의 위상을 높였다면, 정의선 회장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도해야만 하는 중책을 맡게됐다. 데일리카는 정몽구 명예회장이 고집스럽게 펼쳐왔던 그만의 경영철학을 되살펴보고, 정의선 회장이 추구해야 할 브랜드의 창조적 파괴와 진화를 위한 또다른 ‘디자인 경영’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데일리카 하영선 기자] 현대차가 지난 1974년에 내놓은 포니(Pony)는 현대차가 독자적으로 생산한 고유 모델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남다르다.

자동차 디자인의 ‘거장(巨匠)’으로 불렸던 이탈리아의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가 디자인을 맡았는데, 포니는 46년이 지난 지금에서 보더라도 세련미와 함께 모던한 디자인 감각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포니는 세단과 해치백, 픽업, 왜건 등 다양한 시리즈로 소개됐는데, 1984년 단종되기 까지 단일 차종으로서는 처음으로 50만대 생산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운다.

당시 현대차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넷째 동생인 고(故) 정세영 사장이 이끌었는데, 그에게는 ‘포니 정’이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포니의 인기는 대단했다.

정세영 사장은 여세를 몰아 포니를 선보인지 10년이 흐른 1984년에 그야말로 개발단계에서부터 생산에 이르기까지 현대차가 독자적으로 만든 고유모델 ‘엑셀’을 내놓는다. 엑셀은 ‘좀 더 나아진 포니’, ‘뛰어난 포니’라는 의미를 지녔는데, 한국의 도로사정에 적합한 전륜구동 방식이 적용됐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는다. 엑셀은 ‘자동차 왕국’으로 불렸던 미국을 비롯해 유럽시장에서 연간 16만여대가 판매되는 등 인기를 모았다.

엑셀은 1980년대 부터 불기 시작한 ‘마이카’ 열풍과 함께 경쟁차 대비 실내 공간이 넓고, 승차감이 뛰어났다는 점에서 젊은 층으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엑셀은 탄생 이후 1994년까지 국내를 포함한 글로벌 시장에서 총 250만여대 판매를 기록한다. 현대차의 수익을 이끈 차라는 점에서 오늘날 현대차그룹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한 시초였던 셈이다.

그러나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생기는 법. 현대차는 저렴한 가격에 물량공세로 엑셀을 판매하는 마케팅 전략을 내세웠는데, 결국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도 늘 품질문제로 곤혹을 겪게 된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속담처럼, 엑셀은 ‘너무 싼 가격에 겨우 달릴 수 있는 차’로 통했다. 심지어는 ‘몇번 타다가 고장나면 그냥 버리는 차’라는 이미지였다.

수출된 엑셀은 고장이 발생하면, 제때제때 정비가 되지 않은 탓에 ‘현대자동차’를 ‘현다이(Die)’로 불리는 오명도 낳게 한 장본인 이었다.

현대차는 이후 1985년 스텔라의 고급형을 출시하는데, 이 차가 바로 쏘나타의 전신에 속한다. 쏘나타는 당시만 하더라도 ‘소나타’로 불렸다.

소나타는 연주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4악장 형식의 악곡인 소나타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게 현대차 측의 설명이다. 혁신적인 성능과 기술, 합리적인 가격을 지닌 종합 예술 승용차라는 의미를 담았다.

그러나 당시 대우차와 기아차 등 경쟁 브랜드와 현대차 안티팬들 사이에서 ‘소나 타’, ‘소가 타는 차’라는 등의 비아냥이 나오면서부터 ‘쏘나타’로 모델명을 바꿨다는 말도 나온다. 지금으로선 우스꽝스러운 얘기다.

현대차는 이후, 1986년에는 고급차의 상징으로 불리는 그랜저(GRANDEUR), 1990년 들어서는 지금의 아반떼로 소개되고 있는 엘란트라를 내놓는 등 자동차 회사로서의 자리매김을 모색한다.

현대차는 1967년에 창립된 이후 1999년까지 32년간 정세영 사장이 이끌어왔다. 정 사장의 작품이자 업적으로도 평가받는 현대차 ‘포니’, 또 개발단계에서부터 생산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으로 개발해 생산한 고유모델 ‘엑셀’은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을 대표하는 역사적 모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정세영 사장이 진두지휘했던 이 시기에는 국내 및 해외시장에서 현대차의 품질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됐다는 점도 빼놓을 수만은 없다. 당시만 하더라도 현대차의 기술력이 선진화되진 않은 때문이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지난 1970년부터 현대차 서울사업소 부품과 과장을 시작으로 현대차와 인연을 맺는다. 1999년 현대차와 기아차 회장에 이어 2000년부터는 현대자동차그룹의 회장을 맡게된다.

그는 1999년 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현대차 울산공장을 찾는다. 승합차 그레이스의 슬라이딩 도어를 스무번 이상 ‘쾅쾅’ 내리찍자 차문이 떨어져 나갔다. 생산 라인을 올스톱 시켰다는 그의 일화는 여전히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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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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