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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1세대 그랜저 V6 3.0L

현대차 그랜저는 한국 경제의 성공 신화와 맥을 같이 한다. 1980년대 중반 부터 '성공한 사람이 타는 차=그랜저'라는 등식이 생긴지 오래다. 그랜저는 어느덧 30여년이 흘러 오는 11월 7세대가 나온다. 올해 자동차 시장 최대어로 꼽히며 출시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는 중이다. 이미 4만대가 넘게 계약됐다는 소식이다. '고급차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현대자동차의 대표 플래그십 세단 그랜저 역사를 짚어본다.

현대 포니 광고 영상 중, 연료 절약이라는 문구를 확인 할 수 있다

그랜저의 역사는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만 해도 국내 자동차 시장은 변방에 불과했다. 수출은 커녕 마이카 붐이 불기 직전이었다. 국산차로는 처음 소형차가 등장했다. 1976년 현대차가 출시한 대한민국 최초 고유 모델인 '포니'가 주인공이다. 포니는 출시 첫 해 1만여대를 판매하며, 당시 내수 판매량의 40%를 차지했다. 1973년 중동전쟁에서 비롯된 제1차 석유파동은 소형차 붐에 불을 지폈다. 전세계적으로 석유 수급이 불안정해지자 정부는 에너지 절약 운동과 더불어 국산화율을 높인 소형차의 판매를 장려했다. 이제 막 발걸음을 뗀 포니에게는 희소식이었지만 현대차는 마냥 기뻐 할 수 없었다.

현대자동차 그라나다

이 시기만 해도 자가용은 기사를 두고 타는게 일반적이었다. 이런 최고급 승용차 수요를 흡수하기 위해 현대차는 제휴선인 포드를 통해 그라나다 수입을 부단히 노력했다. 고급차 판매로 수익성을 개선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오일쇼크를 직격탄으로 맞은 정부는 6기통 자동차의 생산을 금지했다. 제한이 풀린 시점은 1978년으로 6기통 모델을 판매할 수 있게 됐지만 몇 가지 조건이 붙었다. 수출 물량의 20% 이내, 회사당 한 가지 모델, 배기량 3천cc 이하, 국산화율 20% 이상 등이었다. 발빠르게 움직인 현대차는 1978년 그라나다를 출시했다. 울산공장에서 조립하는 형태다. 이렇게 현대차 플래그십의 역사는 어렵사리 싹을 틔웠다.(이전에 조립 판매하던 고급 대형차 ‘포드 20M’이 있었다)

현대자동차 1세대 그랜저 V6 3.0L

 

현대자동차 1세대 그랜저

1세대 그랜저 - ‘그라나다를 훨씬 능가하는 대형 고급 승용차입니다’

이제 막 자동차 산업에 발 들인 현대에게 포드는 양날의 검이었다. 품질이 보장된 모델을 판매할 수는 있었지만 변수가 생길 때마다 포드의 눈치를 봐야했다. 또 다른 문제는 1987년 예정된 수입차 개방이었다. 고급차를 독자 개발할 여력이 없던 현대차는 포드 대신 미쓰비시와 손을 잡고 일명 ‘L카’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미쓰비시와 현대차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당시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마이카 붐이 일기 시작했다. 거액의 로열티를 지급하는 그라나다의 뒤를 이을 새로운 플래그십 세단이 필요했다. 미쓰비시는 1세대 대형 세단 데보네어가 일본 내수시장에서 실패했던 것을 만회할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두 회사는 손을 잡고 미쓰미시의 데보네어&갤랑 공용 플랫폼을 바탕으로 대형 세단을 개발했다. 파워트레인은 미쓰비시, 내외관 디자인은 현대차가 맡았다. 그렇게 탄생한 모델이 1986년 7월 등장한 1세대 그랜저다. 1985년 단종된 그라나다의 뒤를 잇는 현대차 플래그십 세단이다. 그랜저는 위대함, 장엄, 웅장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1세대 그랜저는 당시 대우자동차 로얄 시리즈가 장악하고 있던 국내 대형세단 시장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출시와 동시에 국산 브랜드를 대표하는 플래그십이자 대한민국 부유층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각진 디자인은 플래그십 세단의 위용을 드러냈다. 이런 디자인으로 인해 지금까지 ‘각그랜저’라는 별명으로 회자된다. 대우 로얄 시리즈가 후륜 구동을 사용한 반면, 1세대 그랜저는 국산 최초 전륜구동 대형 세단이라는 시장을 열었다. 전륜 구동의 장점을 십분 활용해 넓은 실내 공간이 특징이다. 현재까지도 전륜구동을 유지하는 그랜저의 변함없는 전통 중 하나다.

플래그십 모델이라 편의안전장비도 화려했다. 당시 시대를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풀오토 에어컨, 네 바퀴 모두 벤틸레이티드 디스크 브레이크, ABS(안티록브레이크), 크루즈 컨트롤, 파워 스티어링휠, 파워 윈도우, 전동식 사이드미러(접는 것은 수동), 헤드램프 워셔 등이 대표적이다.

그랜저는 최고출력 120마력을 발휘하는 2.0L 가솔린 엔진(시리우스)과 5단 수동 변속기 사양으로 먼저 나왔다. 미쓰비시의 시리우스 엔진은 정숙성으로 일가견이 있었다. 플래그십 세단에 수동 변속기가 장착된 점이 의아하지만 당시에는 4단 수동변속기가 일반적이었다. 5단 수동 변속기는 최고급차에 달리는 사양 중 하나였다. 추후 최고출력 130마력을 내는 2.4L 가솔린 엔진(시리우스)을 추가하면서 4단 자동변속기 옵션도 마련했다. 대형세단에도 오너 드라이버 시대가 열리면서 자동 변속기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4기통 엔진 제한이 풀린 1989년에는 최고출력 164마력을 내는 V6 3.0L 가솔린 엔진(사이클론)을 추가하며 진정한 플래그십 면모를 갖췄다. ABS와 ECS 등 안전사양이 추가됐고 소폭의 디자인 변화도 거쳤다. 대중들이 기억하는 격자 그릴과 투톤 도색, 알루미늄 휠 모두 이 시기에 적용됐다.

1986년 등장해 1992년까지 판매된 1세대 그랜저는 9만2574대로 대성공을 거뒀다. 판매가격은 1690만원부터였다.

현대자동차 2세대 그랜저

 

다이너스티에 밀려 단종된 현대자동차 2세대 그랜저 V6 3.5L

2세대 그랜저 –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명차가 있다’

1992년 9월 등장한 2세대 그랜저 역시 미쓰비시와 공동으로 개발했다. 여전히 미쓰미시 데보네어&갤랑의 플랫폼을 사용했다. 각진 1세대와 달리 2세대는 유선형 디자인을 사용해 한층 수려해졌다. 그랜저라는 차명을 트렁크 정중앙에 붙이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이다. 현재도 유지 중인 디테일이다.

세대가 진화하며 덩치도 키웠다. 전장이 4980mm로 5m에 육박한다. 6세대 그랜저가 등장하기 전까지 역대 그랜저 중 가장 길었다. 2세대 그랜저는 커진 차체를 바탕으로 실내공간이 엄청나다. 단순히 크기만 키운 것이 아니라 편의안전사양도 고급스러웠졌다. 국산차 최초로 운전석 에어백, 냉장 쿨 박스, 3존 에어컨(연식 변경을 거치며 4존으로 변화), ECM 룸미러 등을 적용했다. 초음파로 노면 상태로 파악해 서스펜션의 감쇄력을 제어하는 프리뷰 전자 제어 서스펜션 역시 뉴 그랜저에서 처음 선보였다.

1세대 그랜저와 동일한 2.0L, 2.4L, 3.0L의 엔진 라인업을 갖추고 있었다. 추후 2.0L 엔진은 SOHC에서 DOHC로, 2.4 엔진은 V6 2.5L DOHC로 진화했다. 택시 버전을 추가하며 2.4L와 3.0L LPG가 탄생했다. 1994년 대우에서 V6 3.2L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아카디아(혼다 레전드)를 판매하자, 현대차는 그랜저에 최고출력 210마력을 발휘하는 V6 3.5L 엔진으로 맞불을 놨다. 결과는 성공적. 판매량이 많지 않았지만 국산 승용차  최고 배기량 기록을 갈아치우며 명실상부한 최고급차 자리에 올라섰다.

1996년 그랜저는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그랜저를 바탕으로 길이를 늘린 다이너스티 등장 때문이다. 다이너스티의 최초 계획은 그랜저의 부분변경 모델이었으나 중도 선회해 그랜저 고급화 버전으로 탄생한다. 다이너스티 탄생과 동시에 대우 아카디아를 견제하기 위해 그랜저에 선보인 V6 3.5L 가솔린 엔진은 다이너스티로 이관, 그랜저는 3.5L 엔진을 단종한다.

말년에 다이너스티에게 플래그십 왕좌의 자리를 빼앗겼지만 2세대 그랜저 역시 1세대와 마찬가지로 성공한 부자의 차라는 이지지는 그대로였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판매된 그랜저는 16만4927대였다. 가격은 1860만원부터다.

현대자동차 3세대 그랜저

 

현대자동차 3세대 그랜저 부분변경, 'L'자형 테일램프는 최악이라는 평가

3세대 그랜저 – ‘큰 남자의 여유’

3세대 그랜저가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미쯔비시의 도움없이 EF 쏘나타의 플랫폼(Y4)을 바탕으로 현대차가 독자 개발한 첫 그랜저다. 또한 울산 공장에서 생산한 1,2세대와 달리 3세대부터는 쏘나타와 함께 아산 공장에서 생산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9년 에쿠스 출시가 예정되면서 그랜저는 단종 위기에 처했다. 기존 그랜저의 자리는 마르샤가 대체할 예정이었다. 예상 외로 마르샤가 흥행에 실패하자 현대차는 마르샤를 단종하고, 그랜저를 존치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3세대 그랜저는 쇼퍼드리븐 성격이 강했던 1,2세대와 달리 확실한 오너드리븐 세단으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성공한 중장년층의 상징’으로 이미지 전환을 시도했다.

차체 크기와 디자인에서 이런 특징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3세대 그랜저의 전장은 4865mm로 1세대 그랜저와 동일하다. 전장은 2세대에 비해 짧아졌지만 휠베이스는 2750mm로 오히려 길어졌다. 전륜 구동 특유의 프론트오버행이 긴 꺼벙한 디자인을 탈피하고 중후하면서 세련된 디자인이 도드라진다. 고려청자를 모티브로 한 디자인은 직선과 곡선을 조화롭게 그려냈으며,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프레임리스 도어를 사용해 눈길을 끌었다.

3세대 그랜저는 두 번의 페이스리프트를 거치며 디자인이 변화한다. 이 중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의 테일램프를 오마주한 것으로 알려지는 첫번째 부분변경은 ‘L’자형 테일램프를 적용한다. 이 시도는 '기존 모델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해당 디자인을 본 북미 딜러들이 판매를 거부해 북미 전용 디자인이 새로 나왔을 정도다. 당시 국내 소비자 사이에서 내수 차별이 아니냐는 의견이 돌았다. 북미형 디자인은 국내서 두번째 부분 변경 모델에 적용했다. 구형 테일램프를 살짝 변경한 방식으로 회귀했다. 당시 현대차 플래그십은 대형 세단 에쿠스가 맡았다. 에쿠스보다 크기가 작았지만 여전히 고급차라는 콘셉트에 맞게 편의안전장비는 최고급이었다. 에어백, TCS, 오토 윈도우, 오토 에어컨, 사이드 미러 컨트롤러, 페달식 주차 브레이크, 전자동 열선 시트, 슈퍼비전 클러스터, 트립 컴퓨터, EPS 등이 적용됐다.

3세대 그랜저는 역대 모델 중 유일하게 전 엔진을 V6로 구성한 점이 특징이다. 엔트리 모델인 2.0L부터 2.5L 최상위 모델인 3.0L을 갖추고 있었다. 사이클론 엔진을 개량한 V6 3.0L 엔진(최고출력 196마력, 시그마)을 제외한 2.0L(최고출력 148마력, 델타)과 2.5L(최고출력 180마력, 델타)는 현대차가 독자 개발했다. 첫번째 부분변경을 거치며 렌터카, 장애인, 택시 모델 등에 적용한 2.7L LPG 엔진(델타)을 추가했다. 변속기는 4단 자동을 기본으로 3.0L에는 국산차 최초 5단 자동변속기를 장착했다. 2.0L 가솔린 엔진만 5단 수동 변속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는 그랜저 역사상 마지막 수동 변속기 모델이다. 전륜에 더블 위시본, 후륜에 멀티링크 서스펜션을 사용한 승차감은 당시 ‘역대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소위 ‘구름 위를 떠가는 승차감’으로 불렸다.

한층 젊어진 3세대 그랜저는 이 때부터 대중과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랜저 구입층 역시 젊어졌다. 30,40대 젊은 성공한 중상층이 상당수였다. 판매량도 소위 대박이었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31만1251대를 기록했다. 현대차가 독자 생산한 준대형 세단으로는 최초로 북미, 유럽, 중동 등지에 수출했다. 가격은 2100만원부터였다.

다음 편에서는 그랜저 4~6세대가 이어진다.

남현수 에디터 hs.nam@cargu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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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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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티뷰론 컨버터블 콘셉트

일부 수억 원대 고가 차량을 제외하면 더이상 수입차는 부의 상징이 아니다. 수입차 보급이 빠르게 늘면서 소비층도 중산층까지 확대됐다. ‘수입차=좋은차’라는 등식도 이제 옛말이다. 전기차로 트렌드가 바뀐 요즘, 국산 전기차는 해외에서 각종 상을 휩쓸며 주가를 올리고 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국산차가 수입차와 대등한 위치에 설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과거 기술과 제조 품질이 떨어진 국산 명차 가운데  ‘요즘 기술로 다시 태어난다면’이라는 상상을 해본다면 어떨까.  성능이나 품질은 수입차와 비교하기 힘들지만 감성만은 한 수 위다. 우선 다시 보고 싶은 2도어 국산차를 한 번 뽑아봤다.

 

TOP 5. 대우 라노스 로미오

대우 라노스 세단

1990년대 왕성한 활약을 했던 대우자동차(현 한국지엠)가 르망 이후 만든 소형차로 씨에로 후속작이다. 디자인은 포니, 레간자, 매그너스, 렉스턴 등으로 국내에서 유명한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맡았다. 라노스는 1996년 첫 출시 당시 4도어 세단으로만 선보였다. 일 년 뒤 라노스 로미오와 줄리엣을 선보이며 라인업을 강화했다. 라노스 로미오는 3도어 해치백, 줄리엣은 5도어 해치백이다. 흥미로운 점은 로미오와 줄리엣은 크기와 파워트레인이 같다. 두 모델 모두 1.3L 엔진을 장착해 최고출력 84마력, 최대토크 13.4kg.m를 냈다. 3도어 모델에 로미오로 이름을 정한 배경에는 당시 시대상이 반영돼 있다. 과거에는 지금과 달리 스포티하고 활동적인 이미지를 남성에게 많이 부여하던 시절이었다.

(좌) 라노스 로미오 (우) 라노스 줄리엣

이후 1999년 라노스 로미오와 줄리엣 스포츠가 등장했다. 앞뒤 범퍼 디자인을 살짝 손보고 테일램프 디자인을 바꿨다. 실내에는 스포츠라는 이름에 걸맞게 레드 컬러 인테리어를 옵션으로 선보였다. 로미오에 좀 더 강력한 성능을 주고 싶었던 대우는 로미오 스포츠 엔진을 바꿨다. 1.3L SOHC 엔진은 1.5L DOHC 엔진으로 교체했다. 캠축과 배기량이 늘어난 엔진은 최고출력 110마력, 최대토크 14.3kg.m까지 끌어 올렸다. 이후 1.6L 엔진도 선보다. 아쉽게도 당시 소형차 세금 기준을 넘어서 많이 팔리지 않았다. 2000년에 부분변경 모델(라노스 2)을 선보이며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라졌다. 당시 정우성이 모래사장에서 드리프트를 하며 ‘사랑해’를 쓴 광고는 지금도 회자된다. 물론 라노스 2는 광고만큼 기억되지 않는다.

 

TOP 4. 현대 프로 엑센트

현대 엑센트 세단

현대차 엑센트는 이번 순위에 오른 모델 중 명맥을 최근까지 이어온 모델이다. 중간에 베르나에 자리를 넘겨주며 단종을 겪기도 했지만 11년 뒤 부활했다. 소형차 시장이 줄어들고 이익을 내지 못하면서 2019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엑센트는 국산 소형 세단 역사에서 강렬한 인식을 남겼다. 1994년 엑셀 후속으로 선보인 엑센트는 주요 부품 대부분을 국산으로 만들었다. 각진 부분이 없는 둥글둥글한 보디와 화사한 컬러는 구매 욕구를 자극했다. 또 소형차에서 처음으로 ABS와 운전석 에어백을 옵션으로 제공했다.

프로 엑센트

엑센트 출시 4개월 뒤 현대는 3도어와 5도어 해치백 모델을 선보였다. 3도어는 프로 엑센트, 5도어는 유로 엑센트로 불렸다. 프로와 유로 엑센트는 정통 해치백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해치백보다는 뒤가 조금 짧은 세단과 비슷하다. 이를 테라스 해치백이라고 부른다. 당시 현대는 세미 노치백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모델 성격에 따라 파워트레인을 바꾸지만 과거에는 파워트레인은 같고 모습만 다른 버전이 많았다. 엑센트도 모습만 달랐다. 출시 후 3년 뒤 부분변경 모델인 뉴 엑센트가 나왔다. 앞뒤 모습이 바뀐 세단 모델과 달리 프로 엑센트 앞모습은 거의 변화가 없다. 테일램프와 뒤 범퍼가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프로 엑센트 TGR 3D 모델링(출처:HUM3D)

프로 엑센트를 이야기하면 빠질 수 없는 게 ‘프로 엑센트 TGR’이다. 1997년 한국 모터 챔피언십에서 엑센트가 포디움을 모두 석권하면서 뛰어난 성능을 보여줬다. 현대는 이를 기념해 DOHC 엔진, 14인치 알로이 휠, 튜닝 서스펜션 등을 장착한 프로 엑센트 TGR을 라인업에 추가했다. 또 프로 엑센트 TGR을 바탕으로 경주용 차에 가깝게 바꾼 ‘프로 엑센트 레이싱’도 500대 한정으로 판매했다.

 

TOP 3. 현대 스쿠프

현대 스쿠프

스쿠프는 많은 사람이 한때 선망했고 다시 보고 싶은 차로 선택하는 차다. 국내 완성차 제작사가 최초로 선보인 쿠페형 자동차이자 스포츠 루킹카다. 1990년 출시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에 한 획을 그었다. 유려한 디자인과 문 두 짝만 달린 스쿠프는 젊은층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스쿠프는 엑셀을 기반으로 만들었다. 초기 버전은 최고출력 97마력을 발휘했다. 최고속도는 시속 174km,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 데 12.1초가 걸렸다. 스포츠카를 표방했을 뿐 성능은 따라오지 못했다.

1991년 현대가 독자 개발한 알파 엔진을 얹은 모델이 추가됐고 뒤이어 국산차 최초로 과급기를 단 터보 모델도 선보였다. 스쿠프 터보는 과급기의 도움을 받아 제로백 9.1초, 최고속도 시속 200km를 넘는 등 국내 ‘최초’ 타이틀을 여럿 거머쥐었다. 이후 1992년 부분변경을 선보였고 1996년 티뷰론에 자리를 물려주며 단종됐다. 스쿠프를 스포츠카로 보는 시선도 많다. 정확히는 스페셜티 카(Specialty Car)다. 스포츠카가 아니라고 해서 스쿠프를 평가절하하지 않는다. 티뷰론, 투스카니로 이어지는 스페셜티 카 명맥과 후륜구동 스포츠카 제네시스 쿠페를 선보이게 한 발판이기 때문이다.

 

TOP 2. 기아 엘란

기아 엘란

비운의 스포츠카, 기아 실패의 상징 등 안타까운 수식어가 가득한 기아 엘란을 2위에 올렸다. 엘란은 다들 알다시피 영국 로터스가 개발한 2인승 경량 스포츠카다. 1995년 기아는 로터스 엘란 설계와 생산라인을 수입해 국내에서 제작했다. 오리지널 엘란 엔진은 라이선스 문제로 가져오지 못해 세피아와 크레도스에 얹었던 엔진을 손봐 장착했다. 그렇게 장착된 엔진이 T8D 하이-스프린트 엔진이다. 당시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고회전 엔진으로 최고출력 151마력, 최대토크 19.0kg.m를 발휘했다. 변속기는 세피아에 장착된 것을 기반으로 한 5단 수동변속기다.

엘란은 날렵한 디자인과 팝업 헤드램프, 뚜껑이 열리는 2인승 스포츠카, 고회전 엔진 등 인기 요소가 가득했다. 기아는 성공을 점쳤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당시 판매가격이 2750만 원으로 풀옵션 중형 세단이 1500만 원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비쌌다. 중형차보다 두 배 정도 비싼 가격에도 기아로서는 만들면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엘란을 제작하는 데 3000만 원 이상이 필요했다. 또 여러 가지 세금을 생각하면 4000만 원에 팔아야 손해를 보지 않았다. 비싼 가격에 IMF 위기가 오고 기아그룹이 해체되면서 결국 1999년 단종됐다.

 

TOP 1. 대우 르망 이름셔

대우 르망 GTE

르망은 대우가 만든 최초 전륜구동 승용차다. 당시 후륜구동 승용차 위주로 선보인 대우차로는 큰 변화였다. 대우 르망은 GM 월드카 프로젝트로 탄생했다. GM 산하 오펠과 대우, 폰티악이 함께한 월드카 프로젝트는 각자 장점이 있는 분야를 담당했다. 오펠이 개발을 맡고 대우가 생산, 폰티악이 판매를 하는 방식이었다. 르망은 오펠 카데트 E를 바탕으로 한다. 파워트레인과 실내외 일부를 제외하면 큰 차이가 없다. 출시 초기 르망은 1.5L 엔진을 달아 최고출력 88마력을 발휘했다. 출시 3개월 뒤에는 3도어 해치백 모델인 르망 레이서를 선보였고 디자인 일부와 전자식 계기판을 단 르망 GTE도 뒤따랐다. 1988년에는 5도어 해치백인 르망 펜타-파이브와 최고출력 96마력을 내는 1.6L TBi(전자제어 연료분사방식) 트림도 추가했다.

르망 레이서

르망은 당시 소형차 중에서는 유선형 디자인과 낮은 공기저항 계수(0.32Cd)로 유명했다. 또 최고속도 시속 170km로 동급은 물론 상위 차량보다 더 빨랐다. 고속 안정감이 호평을 받았다. 르망 레이서는 르망보다 더 가벼운 차체와 낮은 공기저항 계수로 최고속도가 시속 180km에 달했다. 외관과 성능 등 다방면으로 장점이 부각되면서 계약 시작 후 50일 만에 1만여 대가 판매됐다.

르망 이름셔

르망은 다양한 변형 모델을 선보였다. 레이서, 펜타파이브, 임팩트 등 다양한 르망 중 아직까지 자동차 마니아 사이에서 회자되는 이름이 있다. 바로 르망 이름셔다. 이름셔는 오펠 튜너로 유명한 독일 회사다. 르망 이름셔는 말 그대로 르망을 이름셔에서 손봐 제조사가 공식 출시한 튜닝 모델이다. 이름셔 튠업을 거친 2000cc 엔진과 전용 휠, 형상기억 소재로 만든 에어로 파츠, 포르쉐 제작 서스펜션, 레카로 버킷 시트, 고급 오디오 등 최고급만 모아 만들었다. 고급 제품을 대거 장착해 판매가격도 비쌌다. 상위 모델인 당시 준대형 세단인 프린스보다 비싼 가격에 결국 1년 만에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순위에 오른 모델 외에도 다양한 국산 2도어가 나왔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현대 티뷰론, 기아 프라이드 3도어, 포르테 쿠페, 쌍용 칼리스타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이젠 박물관에서나 만날 법한 모델이다. 해외처럼 복원 관련 분야가 활성화된다면 전기차로 볼 가능성도 있다.

 

전우빈 에디터 wb.jeon@cargu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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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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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산업은 남초현상이 짙은 직종이다. 2020년 공시 자료에 따르면, 현대차의 남성 직원 비율은 91.5%, 기아는 96.2%로 국내 시가총액 상위 30대 기업 중 남성 비율이 가장 높은 곳으로 꼽힌다.

물론, 역사적으로 자동차 산업에 기여한 여성도 적지 않다. '세계 여성의 날(3월8일)' 주간을 맞아 자동차 업계를 주름잡은 여성들을 조명해봤다.

#베르타 벤츠, 세계 최초 테스트드라이버

메르세데스-벤츠의 공동창업자 칼 벤츠가 최초 내연기관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졌지만, 이 차량을 운전한 사람이 여성이라는 걸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당시 '페이턴트 모터바겐'은 경외와 공포의 대상이었고, 이 차를 만든 칼 벤츠도 운전대를 잡기 두려워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나선 이는 칼 벤츠의 부인인 베르타 벤츠다. 1888년 두 아들과 함께 페이턴트 모터바겐을 몰고 친정으로 향한다. 이동 거리는 벤츠 부부가 살던 만하임에서 친정이 있던 포츠하임을 잇는 106km. 세계 최초 자동차 여행이자 시험 주행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운전뿐 아니라 자동차에 생긴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도 능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와이어와 부품 간 간섭이 발생하면 스타킹으로 이를 고정시켰고, 브레이크가 닳아 성능이 떨어졌을 때는 구두 수리공에게 받은 가죽끈으로 브레이크 라이닝을 직접 교환하기도 했다. 베르타 벤츠는 이 같은 문제점과 개선점들을 칼 벤츠에게 하나하나 지적해줬고, 페이턴트 모터바겐의 품질을 끌어올리는 데 공헌했다.

흥미롭게도, 페이턴트 모터바겐의 '1호차 고객'도 프랑스 출신 에밀 로제란 여성이었다.

#메리 앤더슨, 와이퍼를 발명한 주부

와이퍼는 1903년 미국 뉴욕에서 주부로 지내던 메리 앤더슨이 발명했다. 그녀는 겨울철 뉴욕 시내를 달리는 차들이 차창을 가리는 눈에 힘들어 하는 것을 발견했고, 앞유리에 작은 빗자루를 달아 이물질을 제거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작동 방식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지렛대를 달아 움직이는 수동식이었다. 조수석 탑승자도 와이퍼를 함께 조작해야 했는데, 이 탓에 '부인(Wife)'이 창문을 닦아줘야 한다는 의미에서 와이퍼란 이름이 유래했다는 소문도 있다.

더욱이 전동식 와이퍼를 발명한 인물도 여성이다. 캐나다 발명가 샬롯 브릿지우드는 엔진 작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기를 이용해 고무 롤러가 앞유리를 닦아내는 방식을 고안했는데, 이는 현대의 전동식 와이퍼로 이어진다.

#메리엘런 도스, 최초의 여성 자동차 디자이너

메리엘럳 노스는 1950년 GM에 입사한 최초 여성 디자이너다. 입사 당시의 나이는 20세로, 최연소 자동차 디자이너란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GM 헤리티지 센터에 따르면, 도스는 입사 이후 다양한 쇼카와 VIP 고객을 위한 스페셜 모델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담당했다.

또한, 1950년형 캐딜락 시리즈 62 컨버터블을 비롯해 1955년형 패커드 캐리비안의 인테리어도 그 손을 거쳤다. 특히 튜블러 타입의 독특한 시트 구조는 당시의 여러 자동차들은 물론, 현재까지도 다양한 자동차들에 영감을 미쳤다.

그는 자동차 업계 내 여권 신장에도 적극 나섰다. 수차례 강의에서 "남성 디자이너라는 표현이 없듯 나도 여성 디자이너라고 통칭되길 원하지 않는다"고 밝힌 일화는 유명하다. 그 가족들도 여성 디자이너가 아닌 한 명의 디자이너로 평가받길 원했다고 회고했다.

#사빈 슈미츠, 뉘르부르크링의 여왕

녹색 지옥이라 불리는 독일 뉘르부르크링 서킷을 주름잡으며 '뉘르부르크링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사빈 슈미츠도 자동차 업계 전설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그녀는 '여왕'이라는 별명에 걸맞는 걸출한 족적을 남겼다. 여성 최초로 1996년 뉘르부르크링 24시 레이스에 참가했고, 이듬해까지 두 번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015년과 2016년 월드투어링카챔피언십(WTCC) 독일 레이스에서도 두 차례 우승컵을 거머쥐는 등 당대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린 거의 모든 레이스에서 포디움에 올랐다.

뉘르부르크링에 진심이었던 슈미츠는 최근까지 뉘르부르크링을 2만바퀴 이상 돌았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프로 레이스 외에도 BMW M5로 일반인이 서킷을 경험할 수 있는 '링 택시'를 운행했고, 뉘르부르크링 근처에서 호텔을 운영하며 서킷 방문객을 맞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슈미츠는 2017년 암 발병 이후 모든 공식 활동을 종료하고 오직 치료에만 전념했지만, 2021년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5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메리 바라, GM의 체질 개선을 주도하다

제너럴모터스(GM)의 수장 메리 바라 회장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는 1980년 GM 인턴으로 디트로이트 조립공장에 입사한 이래, 각종 기술직과 운영 담당, 임원 비서직 등을 거쳐 2008년 글로벌 제조 부문 총괄직을 맡는다. 이후 인사 총괄, 승용차 설계 및 디자인 총괄을 담당했고, 2014년 회장에 선임되기 직전까지 글로벌 구매 및 물류 총괄을 지냈다.

어느덧 임기 8년차에 접어든 바라 회장은 임기 내내 GM의 몸집을 작고 효율화시키는 구조조정과 미래 투자를 주도하고 있다.

바라 회장이 주도하고 있는 미래 GM의 비전은 분명하다. 거대 자동차 제조사의 면모에 맞는 다양한 모빌리티를 개발ㆍ생산하겠다는 구상이 대표적이다. 당장 2025년까지 전동화 및 자율주행 분야에 41조원(350억달러)를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2020년 31조원(270억달러)였던 목표 금액을 10조원 이상 증액했고, 향후 3년간 예정된 투자를 집행해 경쟁력을 끌어올리게겠다는 방침이다. 이를 통해 GM 산하 브랜드에서만 30종 이상의 전기차 출시가 준비되고 있다.

다만, 효율화를 이유로 세계 주요 사업장들을 정리하며 공과가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한국GM 군산공장을 폐쇄했고, 유럽, 호주, 러시아, 인도, 동남아시아 등 주요 시장에서 철수했다. GM 유럽 사업의 주축이던 오펠과 복스홀을 매각했고, 호주의 대표 자동차 브랜드 홀덴도 이 시기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자동차 전문 매체 모터그래프(http://www.motorgraph.com)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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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임인년, 호랑이의 해다. 12띠 중에서 3번째 띠다. 호랑이띠의 특징을 찾아봤다. 동물의 왕답게 힘이 넘친다. 의리가 있어 자신의 사람이 되면 평생 보호해 준다. 정열이 넘쳐 과감하게 도전하기를 좋아하며 앞뒤가 똑같아 매사에 정직하다고 한다. 이렇듯 호랑이띠인 자동차들도 있다. 진짜 호랑이띠가 어울리는 차도 있고 아닌 차들도 있다. 허나 모두가 호랑이처럼 근사한 외모에 끌어들이는 매력을 갖췄다. 몇몇 동양 출신도 있지만 대부분 서양 출신인 호랑이띠 차들을 이번 기획을 통해 한 자리에 모았다.
글 | 편집부


1950
Jaguar XK120 Open Two Seater
재규어는 1950년에 대량 생산에 돌입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다문제는 당시에 먼저 판매하고 있던 XK120이 알루미늄 차체를 사용하고 있어 대량 생산이 어려웠다는 것이다고민 끝에 재규어는 XK120의 차체를 알루미늄에서 강철로 바꾸기로 했다그 결과 생산비용 절감과 함께 고객에게 전달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강철로 만들었지만 XK120 본연의 매력은 잃지 않았는데세계 최초의 저렴한 대량생산 트윈 캠 유닛을 탑재한 엔진으로 출력을 이끌어냈고프랑스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은 유선형 차체로 여전한 아름다움을 간직했다이때부터 1년에 12000대 이상을 생산할 수 있도록 라인이 변했고 오픈톱에 이어 쿠페도 추가됐다.


Porsche 356 ‘Split-Window’ Cabriolet
포르쉐의 이름을 가진 최초의 자동차, 356이 등장한 것은 1948년이다왜 이 차가 1950년에 존재하냐면당시 356 1100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 개량이 가해졌기 때문이다초창기에 제작된 356은 앞 유리가 두 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며세월이 흐른 후에 한 장의 앞 유리로 바뀌었다폭스바겐에서 공급받은 1.1ℓ 엔진을 탑재했기 때문에 1100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여기에 포르쉐가 직접 설계한 실린더 헤드를 더해 성능을 높였다이후 1951년에 디스크 브레이크와 1.3ℓ 엔진을 탑재한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되었기 때문에, 1100은 꽤 귀한 몸이 되었다당시 생산된 356의 대부분은 뉴욕의 자동차 딜러맥스 호프만에게 판매됐다.


alfa Romeo 6C 2500 SS Supergioiello
알파로메오의 역작, 6C는 다양한 변형 모델을 갖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전에 개발한 파워트레인을 가졌지만현대적인 차체를 갖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했기 때문이다그중에서 슈퍼지오이엘로(Supergioiello)는 더 특별한데당시 카로체리아로 이름을 높였던 기아(Ghia)가 디자인을 맡았기 때문이다특수한 프레임을 이용해 단 4대만 제작했는데 밀라노에서 가장 큰 자동차 유통업체인 시르카(SIRCA)가 레이서인 ‘후안 마누엘 판지오에게 선물하기 위해 만든 자동차라는 소문이 있다그중 한 대는 1950년대 후반에 영국에 유입된 뒤 1990년에 낡은 채로 발견되었고복원 작업을 거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1962
Ferrari 250 GT Berlinetta Lusso
페라리에서 달리지 않는 자동차를 만든다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250 GT 베를리네타 루쏘는 정말로 그랬다역동적인 성능은 갖고 있지만본격적으로 레이스에 투입하기 위해 만든 모델은 아니었다애초에 ‘루쏘는 이탈리아어로 호화롭다는 의미이며, ‘베를리네타 2인승 쿠페를 가리키는 말이다디자인은 피닌파리나가 담당했고차체는 카로체리아 스카글리에티가 맡았다. 250 GT 일반 모델보다 실내는 넓었지만, 2인승 모델로 다듬어졌다배기량 3.0ℓ에 최고출력 240마력을 발휘하는 12기통 엔진을 탑재했다이 차는 파리 모터쇼에서 모습을 드러냈고그때부터 주문을 받아 약 350대만 만들었다.

Renault 8
세단을 제작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르노가 당시 도핀(Dauphine)을 베이스로 만든 세단이다차체는 도핀보다 조금 좁았지만 더 넓은 실내를 갖고 있었으며앞 좌석에 두꺼운 쿠션을 가진 시트를 넣을 수 있었다최고출력 44마력을 발휘하는 엔진을 탑재했는데냉각 시스템이 개선되어 준수한 성능을 발휘했다고무엇보다 이 크기의 세단에서는 처음으로 네 바퀴에 모두 디스크 브레이크를 제공해 정지 성능을 업그레이드했다미국에 판매할 때 ‘도핀보다 개선된 모델이라는 특이한 마케팅을 펼쳤고성능이 꽤 좋았기 때문에 엔진 업그레이드와 함께 고성능을 발휘하는 ‘고르디니’ 버전도 등장했다요즘 인기가 있는 ‘고성능 세단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Bentley S3
1962년 말, S2를 기반으로 한 S3가 등장했다두 개의 헤드램프를 가진 S2와 달리 네 개의 헤드램프를 가졌으며앞 좌석을 위한 분할형 시트를 갖고 뒷좌석의 레그룸을 늘렸다옵션으로 ‘나무로 만든 접이식 테이블이 제공될 정도다벤틀리 특유의 8기통 엔진에도 수정이 가해졌고파워 스티어링이 많이 개선됐다. A필러와 B필러가 굉장히 좁은 데 비해, C필러는 굉장히 두껍게 다듬어져서 뒷좌석에 탑승하는 사람을 배려한다는 것이 바로 느껴진다보디 온 프레임 구조를 가진 벤틀리의 마지막이기도 한데이 부분 때문에 S3 ‘진정한 클래식 벤틀리의 마지막 모델로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1974
VOLKSWAGEN GOLF MK1
호랑이는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를 담당한다만약 자동차 세그먼트에서 이러한 포식자를 담당하는 차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일단 해치백 시장의 최상위 포식자는 명확히 존재한다모든 해치백이 경쟁 모델로 꼽는 폭스바겐 골프가 1974년생 호랑이띠다. 1세대 골프는 1.1ℓ 가솔린 엔진에 4단 수동 변속기를 장착했고 가로장착 엔진전륜구동의 시대를 열었다최고출력은 50마력 최대토크는 7.8kg·m 수준이었다폭스바겐 비틀을 대체할 독자모델이 필요한 시점에 만들어진 골프는 지금까지 전 세계에 3500만 대 이상 판매되어 비틀의 명성을 이어가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받는다. 1세대 골프의 디자인은 48년이 지난 지금까지 헤리티지를 계승하고 있으며 브랜드를 대표해온 차종으로 자리매김했다.


KIA BRISA
기아는 디자인 언어 중 하나인 ‘호랑이 코 그릴을 꽤 오랜 시간 사용해왔다호랑이를 이토록 좋아하는 기아는 호랑이띠에 어떤 차를 출시했을까일단 1974년 호랑이해에 등장했던 차 ‘브리사 세단이 있다브리사는 기아(당시 기아산업)가 마쓰다 패밀리아를 베이스로 소하리 공장에서 처음으로 양산한 후륜구동 세단이다. 1973 8월에 적재량 500kg의 픽업트럭이 먼저 출시되었고다음 해 10월 세단 모델이 출시됐다당시 출시 가격은 249만원요즘의 물가로 따지면 약 2500만원 정도에 해당한다고 전해진다. 1.0ℓ 가솔린 엔진과 수동 4단 변속기가 조합되었으며최고출력은 62마력최대토크는 8.1kg·m.


LAMBORGHINI COUNTACH
12기통 자연흡기 엔진이 울부짖는 소리는 마치 호랑이의 그것과 같다. 1974년에 등장한 슈퍼카의 대명사 람보르기니 쿤타치는 호랑이 울음소리를 내는 엔진을 차체의 가운데에 얹었다미우라의 후속으로 등장한 초기형 LP400 모델은 3.9ℓ V12 자연흡기 엔진에 5단 수동 변속기를 물렸으며최고출력은 375마력최대토크는 36.5kg·m에 달했다쐐기형 차체에 시저 도어 조합은 쿤타치의 강렬한 인상을 더했다이후 디아블로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1990년까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다지난해 8월에는 쿤타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모델이 공개됐다아벤타도르의 섀시에 하이브리드 구동계를 얹어 800마력의 최고출력을 내뿜는다.


1986
BMW E30 M3
사냥을 하는 호랑이의 날렵하고 강력한 운동능력을 자동차에서도 느끼고 싶다면강력한 스포츠카를 타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다. BMW M3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스포츠카 중 하나다그 전설의 시작은 1986년에 E30 M3를 처음 출시하면서 시작됐다. 2.4ℓ 직렬 4기통 자연흡기 엔진을 얹었고 게트락 5단 수동변속기가 조합되며 최고출력은 194마력, 23.5kg·m의 성능을 자랑했다. 0→시속 100km 가속은 6.9최고속력은 시속 225km에 달했다. E30 M3가 전설로 꼽히는 이유는 레이스 무대에서의 빛나는 성적표로 확인할 수 있다뉘르 24에서 5스파 24에서 4번이나 우승하여 당대 최고의 스포츠카 자리에 올랐다호랑이에게 영원한 라이벌 사자가 있다면 E30 M3 또한 메르세데스 벤츠 190E라는 걸출한 경쟁자가 있다카리스마 넘치는 디자인과 강력한 성능강력한 경쟁자지금까지 팬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가진 멋진 스포츠카다.


PORSCHE 959
호랑이는 멸종 위기 등급을 받은 정말 희귀한 동물이다그렇다면 호랑이띠 자동차 중에 이만큼 희귀한 차를 찾아보니 포르쉐 959가 있다당시 포르쉐의 모든 첨단 기술을 집약하여 그룹 B에 참가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됐다하지만 막상 출시하고 보니 그룹 B 클래스가 사라져버린 비운의 자동차다결국 대안으로 1986년 다카르 랠리에 3대가 출전했고 각각 1, 2, 6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또한 959 37대의 프로토타입을 포함하여 총 337대가 생산됐다. 2.9ℓ 수평대향 6기통 트윈 터보 엔진에 6단 수동변속기가 물리며 최고출력은 450마력최대토크는 51.0kg·m에 달했다. 0→시속 100km 가속은 3.9최고속력은 무려 시속 315km라는 어마어마한 성능을 자랑한다강력한 성능은 물론개체 수가 워낙 적어 부호들의 차고에서나 볼 수 있는 것도(중동의 부자들은 호랑이를 애완동물로 키우기도 한다호랑이의 특성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HYUNDAI GRANDEUR
일명 ‘각 그랜저라고 불리는 1세대 그랜저가 1986년생 호랑이띠다당시에는 한국 최고의 승용차로 이름을 날렸던성공의 상징과도 같은 자동차였다호랑이와 같은 기백을 가지고 성공한 사람 혹은 몸에 호랑이가 있는 형님들이 주로 탔지 않을까그 시대를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조심스레 상상해본다. 1세대 그랜저는 현대자동차와 미쓰비시가 처음으로 합작한 자동차로초기에는 MPI 방식의 2.0ℓ 직렬 4기통 SOHC 엔진과 5단 수동변속기가 조합됐다.  최고출력은 120마력최대토크는 16.2kg·m의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2.4ℓ 직렬 4기통 엔진과 3.0ℓ V 6기통 엔진이 4단 자동변속기와 함께 추가됐다출시 후 36년이 지난 지금도 성공의 상징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그래서인지 소장 가치를 인정받으며 최근에는 시세가 점점 오르고 있다.


1998
BENTLEY ARNAGE
개인적으로 진정한 벤틀리 디자인이라 생각한다고풍스러운 매력은 아르나지가 최고다원형 헤드램프에 거대한 라디에이터 그릴거기에 날개 오너먼트는 포스의 끝이다극단적으로 짧은 프런트 오버행에 긴 리어 오버행은 스포티하면서도 우아하다트렁크 리드 라인이 부드럽게 떨어지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마차를 연상케 한다엔진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개발 당시 BMW 엔진을 사용하기로 했었다이 엔진으로 차는 개발되었고 V8 4.4ℓ 트윈 터보의 아르나지가 탄생했다. 1998년에 벤틀리는 폭스바겐에 인수되었는데 BMW와의 다툼 끝의 결과였다이때 소비자들 사이에서 폭스바겐에 넘어간 벤틀리의 아르나지의 부품 공급이 어려울 거란 소문이 돌았다사실은 아니었지만 폭스바겐은 과거 벤틀리가 사용하던 전통의 OHV V8 6.75ℓ 엔진을 부활시켜 일부 트림에 사용해 팔았다후에 두 엔진의 아르나지를 비교해 본 결과 BMW의 엔진을 단 모델이 성능과 내구성에 있어 더 좋다는 평이 많았다.


BMW M COUPE
키드니 그릴을 가지고 있는 로드스터 중에서 가장 성공한 모델이 바로 Z3지금 보더라도 완벽한 외모다작은 차지만 우아한 몸매 덕분에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흐른다. Z3 M 버전이 있었다단순히 M 패키지가 아니라 M의 심장은 품은 진짜 M카다. BMW가 자랑하는 실키식스 엔진을 가지고 최고출력 316마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변속기는 단 하나, 5단 수동 유닛. M 로드스터가 1997년에 데뷔했고 이듬해인 1988, M 쿠페가 등장했다로드스터의 단점인 차체 강성을 보완하는 동시에 넉넉한 트렁크 공간으로 실용성까지 챙겼다거기에 롱노즈 숏데크 해치백 스타일은 신선한 충격을 줬다근육질 펜더와 어우러져 잘생긴 얼굴에 몸매까지 훌륭하다돌이켜 보면 페라리 GTC4 루쏘와 실루엣이 비슷하다. 


VOLKSWAGEN NEW BEETLE
국내 폭스바겐의 영역 확장에 일등 공신은 골프지만 그 시작은 바로 이 뉴 비틀이다앞뒤가 똑같은 차다비틀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폭스바겐이 야심 차게 선보인 뉴 비틀이다모든 게 동글동글해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훔쳤다호랑이를 보면 도망도 못 갈 것처럼 순하고 귀엽게 생겼다당시 내 사촌 누나도 이 차를 소유하고 있었다레몬 컬러의 뉴 비틀이었는데 차가 잘 안 나간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디자인이 훌륭해 만족도가 높았다스티어링 휠 옆에 꽃을 꽂을 수 있는 구멍을 마련해 놓는 센스도 있었다실내는 있을 것만 남겨 둔 디자인으로 콘셉트카 느낌이 났다정말이지 지금의 미니 인기 정도는 뉴 비틀이 누렸다국내에는 2.0ℓ 가솔린 엔진만이 수입되었고 해외에는 6기통 3.2ℓ 엔진을 장착한 고성능 모델 RSI도 있었다. 

2010
FERRARI 599 GTO
페라리의 전설아니 슈퍼카의 전설 250 GTO 288 GTO의 후계자가 2010년 태어났다당시 페라리의 기함 역할을 맡고 있던 599 GTB를 베이스로 더욱 강력하고 트랙 주행에 어울리게 튜닝한 모델이다겉모습은 노멀 모델과 크게 다르지 않다각 파츠가 조금 더 스포티해졌을 뿐인데 분위기는 확실히 더 강력해졌다. V12 6.0ℓ 엔진은 과급기의 도움 없이 최고출력 670마력최대토크 63.2kg·m의 괴력을 생산했다수동 기반 6단 자동 변속기를 통해 뒷바퀴를 굴렸는데 트랙션을 유지하는 실력이 대단했다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데 3.3초 걸렸는데 듀얼 클러치 변속기와 사륜구동 시스템 도움 없이 이러한 스펙을 가진 것이 놀랍다최고시속은 335km에 달한다. 599대 한정 생산되어 지금은 부르는 게 값이다.


MERCEDES-BENZ SLS AMG
걸윙 도어로 유명하지만 이 하나로 이 차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이 차만을 위해 섀시를 개발했고 좋은 하드웨어와 포맷은 모조리 가져다 사용했다엄청나게 긴 노즈에 캐빈룸은 뒷바퀴에 붙어있어 운전하기 어려웠다진정한 FMR 레이아웃을 사용하고 당시 메르세데스가 사용하지 않던 듀얼 클러치 유닛까지 넣었음에도 평은 좋지 못했다무겁기까지 해 생긴 거와 달리 예민한 움직임에 소비자들 사이에서 평가 절하되어 슈퍼카 혹은 스포츠카로서의 입지를 굳히지 못했다그냥 문이 위로 열리고 배기 사운드 좋은 차 정도였다그 때문에 중고차로 나왔을 때 가격 방어에 실패했다시간이 흘러 더 이상 AMG에는 자연흡기 엔진을 볼 수 없었고 호불호가 갈리던 디자인에는 팬덤이 두터워지기 시작했다지금은 중고차 가격에도 프리미엄이 붙어 비싼 몸값을 자랑한다.

LEXUS LFA
역대급 차가 등장했다일본 자동차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차다토요타가 작정하고 만들면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지는 제대로 보여준 모델이다야마하와 함께 제작한 10기통 엔진은 하이톤 배기 사운드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호랑이의 포효가 아닌 울부짖음이다그동안 10기통 자연흡기 엔진의 최고 자리는 포르쉐 카레라 GT의 것이었다단종되었고 시간이 흘러 그 톤을 LFA가 이어받았다디자인은 화려하지 않다보통의 쿠페처럼 생겼지만 롱노즈 숏데크 타입의 실루엣을 강하면서 우아해 보이기까지 한다. V 10기통 4.8ℓ 엔진은 최고출력 560마력 최대토크 48.9kg·m의 힘을 생산하고 6단 자동변속기를 통해 뒷바퀴를 굴린다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7초 최고시속은 325km에 달한다.

자동차 전문 잡지 <모터매거진>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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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동차기업 현대자동차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자동차 사업을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세계 10위권에 해당하는 거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조선, 반도체 등과 함께 대한민국의 주요 수출품인 자동차를 제조하는 큰 축으로 성장한 현대자동차. 하지만 당시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미답의 영역을 홀로 개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현대자동차는 여느 후발 자동차 제조사들과 마찬가지로 '스승'의 역할을 해 줄 기업이 필요했다. 제조업에서 선발주자의 제품을 라이센스 생산하는 경험은 제품의 생산 및 개발에 대한 노하우를 획득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선발주자가 짧게는 십 수년, 길게는 수십년에 걸쳐서 얻은 성과를 빠르게 흡수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와 같이 고도의 기술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분야에서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성장한 기업들이 많다.

현대자동차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기업으로는 대체로 일본의 미쓰비시자동차를 꼽는다. 현대자동차와 미쓰비시자동차와의 관계는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바 있다. 하지만 현대자동차가 처음으로 스승으로 모신 자동차 제조사는 당대의 자동차산업 최강국인 미국의 기업, 포드자동차(이하 포드)였다. 현대자동차의 본격적인 역사는 포드와 기술제휴관계를 맺고, 포드에서 공급하는 차량을 라이센스 생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대와 포드의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면허생산 체계의 현실이 냉혹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포드는 현대자동차를 동등한 사업 파트너라기 보다는, 자사의 아시아권 생산 기지 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현대자동차는 기술 제공사인 포드의 요구에 그저 수동적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시장의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이 당시 국내업체로서는 이례적으로 일찌감치 포드와의 결별을 준비하고 독자생존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고군분투 했던 것도 이러한 현실을 일찍 간파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자동차와 포드와의 관계는 적어도 1980년대 초중반까지는 유지되고 있었다. 스텔라의 기반설계와 고급 세단인 포드 그라나다 등으로 아직은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자동차는 이후 포드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독자생존의 길로 나서면서 지금은 그 포드조차도 쉽게 넘볼 수 없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현대자동차의 손에서 생산되어 국내의 도로를 누볐던 포드의 자동차들을 한 데 모았다.

포드 코티나
포드 코티나는 현대자동차의 첫 양산차다. 현대자동차의 첫 양산차라 하면, 으레 '포니'를 떠올릴 수 있지만, 이는 '독자 개발 모델'을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고, 실제로 처음 대량생산을 하기 시작한 차는 이 차다. 포드 코티나는 포드자동차의 유럽지부(이하 유럽 포드)에서 개발한 중형급 승용차로, 영국에서는 코티나, 유럽대륙에서는 타우누스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현대자동차는 이 차를 CKD(Complete Knock down, 완전분해제품) 방식으로 생산, 모든 부품을 현대자동차가 직접 조립했다.

포드 20M
포드 20M은 현대자동차가 처음으로 생산한 대형 고급 세단으로, 시 유럽 포드가 생산하고 있었던 고급 대형세단 타우누스 20M(Taunus 20M)을 현대자동차가 라이센스 생산한 것이다. 1968년, 유럽포드의 중형 승용차 코티나(Cortina)를 생산한 것을 시작한 이래 불과 1년 만에 추가된 현대자동차의 두 번째 양산차이기도 하다. 이 차는 등장하잠마자 당대를 주름잡았던 신진자동차의 크라운과 경쟁을 벌였다.

포드 그라나다
현대자동차가 생산한 포드 그라나다는 유럽포드의 서독(Ford-werke GmbH)지부에서 개발한 의 2세대(Mk. II) 모델로, 고급 자동차 수요층 공략을 목표로 1978년부터 생산을 시작했다. 정통 '구라파' 스타일을 내세운 후륜구동 고급 세단 그라나다는 전/후륜에 모두 코일 스프링과 가스식 쇽업소버를 탑재한 전륜 더블위시본, 후륜 세미 트레일링 암 형식의 4륜 독립식 서스펜션, 현대적인 유압식 랙 앤 피니언 타입 파워스티어링 시스템, 이중 유압식 브레이크, 충돌안전을 위한 보닛 설계와 충격흡수 구조 등, 당대에서 가장 선진적인 기술들이 사용된 자동차였다. 2차 석유 파동 이후에는 2.0리터 4기통 엔진을 추가하는 등으로 명맥을 잇다가 그랜저의 등장과 함께 단종을 맞았다.

R버스
현대자동차는 승용차 뿐만 아니라 상용차 부문에서도 포드와 협력했다. 1969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이 차는 현대자동차가 유럽포드의 영국측 법인과의 기술제휴로 생산된 차량으로, 도심을 운행할 시내버스 용도로 생산되었다. 이 버스는 오늘날의 국내 대형버스들과는 달리, 엔진을 전방에 탑재하고 후륜구동 방식으로 구동되는 버스였는데, 당시 경쟁사였던 신진자동차의 버스에는 다소 밀렸다. 당시만 해도 국내의 도로 포장율이 형편 없었고, 이 때문에 유럽의 매끈한 도로 위를 달리도록 설계된 R 버스는 국내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버스는 총 2종의 모델이 생산되었으며, 1977년경 생산이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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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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