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우체부 :: 페라리의 GT를 무시하지 말라, 페라리 GTC4루쏘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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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밟으세요. 더, 더, 더, 더, 더.”

 

거참 환장할 노릇이다. 눈앞에 닥쳐온 코너를 돌지 못하고 밖으로 튕겨나갈까봐 잔뜩 겁에 질려 있는데 더 밟으라니. 아니 잠깐, 브레이크 페달을 세게 밟으란 얘기 아닐까?

 

 

 

아무튼 옆자리의 남자가 나지막이 말한 ‘더’의 마지막쯤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오른발을 냉큼 왼편으로 가져갔다. 페달을 밟기도 전에 “쾡” 기어가 내려가고 회전수가 튕겨진다. 뒤이어 지그시 브레이크를 밟았다. 순간 기자의 얼굴을 덮칠 듯 앞차의 빨갛고 동그란 테일램프가 커지면서 다가온다.

아악, 이러다 집 한채 값 물어주겠다!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오른쪽 다리를 냅다 뻗었다. 다시 “쾡” 하고 회전수가 튀는가 싶더니 “빠박” 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소리의 진원지는 앞쪽 어디지만 수억원짜리 차의 엉덩이에 수억원짜리 차의 코를 박아서 난 소린 아니다.

 

 

렌즈 경통을 휙 돌려 줌인된 듯했던 앞차는 그에 못지않은 속도로 다시 줌아웃되고 있다. 휴, 후들거리는 팔로 간신히 스티어링 휠을 감아 큰 호를 그리며 멀어져가는 앞차의 궤적을 쫓기 시작했다. 코너 출구를 바라보며 아무일 없었다는 듯 부드럽게 재가속을 하려 했지만 이번엔 발끝의 미세한 움직임만으로도 차 앞머리가 덜컹거린다. 하아 어렵다. 하지만 정말 끝내준다. 얼마 남지 않은 체력이 몽땅 소진될 때까지 이 순간을 즐기리라.

여긴 인제스피디움이고, 기자가 쥔 스티어링 휠은 페라리 GTC4루쏘 T의 것이다. 앞에서 주행라인을 잡아주며 달리는 캘리포니아 T는 페라리 인스트럭터가 운전하고, 보조석의 남자도 모터스포츠에서 잔뼈가 굵은 인스트럭터다.

 

 

양쪽에서 채찍질을 당하는 것 같은 상태로 인제스피디움 트랙을 돌고 또 돌았다. 페라리 수입판매사인 FMK의 초청을 받아 이곳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다.

페라리가 국내 공식판매를 시작한 이후 미디어를 대상으로 레이스 트랙에서 시승행사를 개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행사의 주인공은 현행 라인업에서 가장 페라리답지 않은 차라고 이야기되는 GTC4루쏘 T다. 4명이 탈 수 있는 왜건형에 12기통 모델에서 4개의 실린더와 2,407cc의 배기량을 덜어낸 다운사이징 모델이란 말이다. 심지어 국내엔 시승차가 없어 이탈리아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최신 페라리를 서킷에서 타봤다는데 의의를 두는 형식적인 시승회일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주최측의 제품에 대한 자신감은 (인제스피디움 옆으로 흐르는)내린천을 찌를 듯했다. 천장에 헬멧이 부딪혀 목에 깁스를 한 것마냥 뻣뻣한 자세로 안간힘을 써야 했기에 몇바퀴를 더 돌았더라면 “이제 그만 내려달라”며 울먹였을지 모른다.

이리저리 쏠리는 몸뚱이에 목이 뽑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혹한 주행이 이어졌다. 길이 4.9m가 넘고 너비가 2m에 가까운 새빨간 차체는 직선 내리막에선 순식간에 240km/h에 도달했고, 세라믹 브레이크와 피렐리 P제로 타이어를 이용해 거짓말처럼 속도를 줄였다가 앞머리를 꺾어 획 치고 올라갔다. 3m에 이르는 긴 휠베이스는 네바퀴조향장치 덕분에 구간에 따라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먼저 탄 488 GTB는 말할 것도 없고 직전에 탄 캘리포니아 T가 보여준 기대 이상의 몸놀림에 비하면 비슷한 엔진을 쓰는 GTC4루쏘 T는 굼떴고 계속되는 가혹한 주행에 저질체력을 가진 기자 못지않게 지쳐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 와중에도 운전자의 미천한 실력을 너그럽게 감싸줬으며, 끝까지 페라리로서의 체통을 잃지 않았다.

둘이 탔던 캘리포니아 T와 달리 GTC4루쏘 T의 뒷자리엔 헬멧을 쓴 장정 둘이 앉아 있고, 그 뒤에 450L의 짐공간까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차의 주행실력에 흠을 잡고 싶지 않다. V12 대비 먹먹한 사운드가 아쉽다면 모를까.

 

 

GTC4루쏘 T가 페라리의 주장처럼 도시에서 일상적으로 탈 수 있는 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트랙에서 4명을 태우고도 어지간한 고성능차, 스포츠카들을 발라버릴 수 있는 차인건 확실하다. 이처럼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능력을 지닌 차들을 우린 슈퍼카라고 부른다.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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