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우체부 :: 해치백에 다시 눈이 갈 줄이야, 골프 G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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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사심이 드러나 버렸다. 난 골프 GTI를 좋아했다. 아니, 어쩌면 과거형이 아닐지도…

잠시 잊고 살았다. 마치 유년 시절 즐거웠던 기억처럼. 하지만 다시 마주한 순간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마치 추억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처럼. 함께 추억 쌓은 세월은 생각보다 오래되었고, 둘의 사이 또한 깊었다. 폭스바겐 골프 GTI와 나의 이야기다. 인연은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처음 시작되었다. 둥글둥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화끈한 성격을 내비치는 5세대 골프 GTI의 반전 매력은 어린 학생의 마음을 뺏기 충분했다.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오렌지보다 더 산뜻한 주황색 페인트로 칠한 골프 GTI 3도어 모델이 자리를 꿰찼다.

6세대 골프 GTI와는 독일 아우토반을 함께 달렸다. 큰마음 먹고 떠난 배낭여행에서 알뜰살뜰 여비를 아껴 골프 GTI를 타고 독일 아우토반을 달리겠다는 꿈을 이뤘다. 들뜬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겁도 없이 속도 무제한 구간에서 최고시속을 찍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뉘르부르크링 서킷, 슈투트가르트에 자리한 메르세데스-벤츠, 포르쉐 박물관까지 오롯이 자동차만으로 일정을 꾸린 여정을 골프 GTI가 함께 했다. 7세대는 이제 막 폭스바겐 딜러로 취업한 학교 선배를 조르고 졸라 타봤던 기억이 남아있다.

골프 GTI를 꿈꾸고, 함께 추억을 쌓은 게 과연 나뿐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골프 GTI는 등장과 동시에 자동차를 좋아하는 이라면 한 번쯤 꿈꾸는 드림카로 자리 잡았다. 딱 5000대만 만들어 보자고 했던 1세대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7년 동안 46만1690대가 팔려나갔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9.2초 만에 가속하고, 최고시속은 187km에 달하는 고성능 자동차에 친근한 가격표를 붙인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손에 닿을 듯 가까이에 있는 가격은 지금까지도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모두를 위한 핫해치라는 수식어는 단시간에 얻어낸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대단하다. 세대를 교체할 때마다 성능은 더 높이면서 가격 상승은 최소로 묶는 폭스바겐이 기특할 따름이다. 8세대 골프 GTI도 모두를 위한 핫해치라는 가치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지난 2015년에 판매한 7세대와 비교해 불과 29만원 비쌀 뿐이다. 물가 상승률을 반영하면 기존보다 저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격은 (거의) 그대로지만 디자인과 성능은 역대 최고다. 첨단 운전자보조 시스템도 경쟁력을 높이는 요소다.

사실 폭스바겐이 8세대 골프 GTI가 공개했을 때 마음에 큰 동요는 없었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성능이 별 볼 일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저 관심 밖의 차였을 뿐이다. 어느새 가장이 된 내게 C 세그먼트 해치백은 눈길을 뺏지 못했다. 어쩌면 골프 GTI에 대한 추억을 기억 저편에 고이 접어두고 잊고 산 이유도 이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정을 이루면 운전이 즐거운 차보다 안락한 세단, 실용적인 SUV에 더 눈이 가는 법이니까.

그런데 견물생심하고 말았다. 골프 GTI와 눈을 마주한 순간, 시트를 몸에 맞추고 운전대를 잡는 찰나에, 시동 버튼을 눌러 가르릉 메마른 기침을 내뱉는 소리를 듣는 동시에 번쩍하고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이거였지…. 합리적인 가격까지 더해 과거에 골프 GTI를 갈구하던 열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관심이 생기니 그제야 디자인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가장 돋보인 요소는 역시 부리부리 매섭게 뜬 눈 위로 선명하게 그은 빨간색 선. 시멘트보다 조금 더 진한 돌핀 그레이 메탈릭 컬러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레드 라인은 이 차의 비범한 성능을 암시했다.

육각형으로 가득 채운 큼직한 벌집무늬 라디에이터 그릴도 고성능 이미지를 불어 넣는다. 그 속에 자리 잡은 대용량 라디에이터는 이 집이 그냥 벌도 아닌 말벌의 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등골이 오싹한 말벌 집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흘러넘친다. 괜히 손에 땀이 나기도 했다. 다시 한번 내 취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대놓고 고성능이라고 박박 우기는 편보다는 은근슬쩍 내비치는 방식이 내겐 더 자극적이다.

성능을 엿볼 장소로는 어디가 좋을까? 기억이 되살아난 김에 추억 팔이 한 번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에 차가 드문 밤이 오면 자주 찾았던 와인딩 코스로 향했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펜과 종이만 있으면 안 보고도 지도를 그려낼 수 있는, 홈그라운드나 다름없는 곳이다. 생소한 곳에서 괜한 오기로 과격하게 주행했다가 화를 부를 수 있어서 보다 익숙한 장소를 고르기도 했다.

 

외모 감상은 이제 그만.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고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긴장감이 감도는 실내 분위기도 잠시뿐이다. 골프 GTI는 오랜 시간 함께 한 자동차처럼 익숙했다. 시트는 내 몸에 맞춘 가죽 재킷처럼 편안했다. 스티어링휠 두께도 딱 적당하다. 꼭 화면 커다란 스마트폰을 쓰다가 한 손에 폭 들어오는 아이폰 미니로 바꿨을 때처럼 기분 좋은 그립감이었다. 대중을 위한 해치백을 밑바탕 삼아 시야도 시원스럽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사각지대를 샅샅이 뒤져 보아도 찾기 쉽지 않았다.

골프 GTI의 실력을 빨리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절실한데 서울 도심은 여유를 가지라고 길을 막아 세운다. 고속도로가 가까워질수록 주변 차가 점점 줄더니, 이내 곧 길이 뻥 뚫렸다. 고구마와 건빵, 계란을 한꺼번에 먹은 듯했던 내 기분도 함께. 골프 GTI의 0→시속 100km 가속 시간은 6.2초다. 최고출력은 245마력. 낮은 회전수에서도 넉넉한 토크를 내뿜어 가속 페달에 조금만 힘을 줘도 곧장 튀어 나가려고 움찔움찔한다. 경쾌하다는 말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 골프 GTI의 움직임은 가볍고 상쾌했다.

한참을 달리다가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니 눈에 익은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이곳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노면 상태도 확인할 겸 차분히 코스 한 바퀴를 빙 둘러보았다. 도로 주변에는 얼마 전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쌓여있었다. 다행히 아스팔트 위는 제설을 잘해서 깨끗한 상태였다. 영상의 따뜻한 날씨도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나를 반기는 듯했다.

준비 운동을 끝내고 주행 모드를 스포츠로 바꿔 실내를 붉게 물들였다. 그러자 서스펜션은 스포츠 모드에 알맞게 허벅지 근육을 단단하게 조인다. 순간 평범한 패밀리 해치백과 다름없던 승차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딱딱한 튜닝 서스펜션을 얹은 차로 옮겨 탄 기분마저 들었다. 골프 GTI는 배기 플랩을 활짝 열어 달릴 준비를 마쳤다고 신호를 보냈다. 잠깐. 내가 아직 준비가 덜 됐다. 계기판 중앙에 태코미터를 크게 띄우고 왼쪽엔 터보 압력, 오른쪽엔 중력가속도를 표시하도록 설정을 마쳤다. 굳이 참고하지는 않더라도 오랜만에 스포티한 분위기를 내기에 제격이었다.

8세대 골프 GTI의 성능은 잠들어 있던 스포츠카에 대한 동경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가장 놀라웠던 건 현저하게 줄어든 터보랙이다. 적시적소에 출력을 바로 꺼내 쓸 수 있어 가속 타이밍을 놓치는 일이 확실히 적었다. DSG 변속기도 한층 더 영민하게 진화했다. 굳이 수동으로 변속하지 않아도 스스로 주행 상황에 따라 알맞은 기어를 찾아 집어넣는다. 빠릿빠릿한 반응 속도와 똑똑한 변속기 덕분에 가속과 감속이 반복되는 연속 헤어핀 구간을 보다 쉽고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같은 구간을 보다 짧은 시간 안에 달리는 주행 성능도 중요하지만 핫해치라면 매콤한 자극, 짜릿한 운전 재미도 포기할 수 없다. 빠른 랩타임과 운전 재미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요소처럼 보이지만 랩타임은 빨라도 재미는 덜한 모범생도 더러 있다. 골프 GTI는 언제나 타의 모범이 되는 학생보단 질끈 묶은 머리쯤은 언제든 풀어 헤칠 수 있을 만큼 화끈하지만 성적은 우수한 우등생에 가까웠다. 항상 올곧은 자세를 유지하고, 최적의 라인을 정확히 따라 그리며 달릴 필요는 없다. 때론 차를 내던지듯 무리한 속도로 코너로 돌진해 미끄러뜨리며 달리는 일탈도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도 차를 안전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다면 일탈은 불가능하다. 번지점프도 안전하다는 믿음으로 하는 거니까. 골프 GTI는 괜찮다고 말하며 일탈을 부추겼다. 더 큰 운전 재미를 경험해보라는 듯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용기를 내 템포를 높이자 피가 쏠리는 중력가속도와 함께 타이어가 비명 소리를 내지르고, 누가 뒤에서 권총이라도 쏘는 듯 펑펑 터지는 배기음이 울려 퍼진다. 골프 GTI의 뾰족한 자극에 잠시나마 멀리하고 있었던 빨간 맛 로맨스가 번뜩 깨어났다. 이런 젠장. 아직도 골프 GTI를 좋아하고 있었다. 철들려면 아직 멀었다.

 

 

이런 GTI도 있어?

GTI W12-650

놀라지 마시라. 무려 12기통 트윈터보 엔진을 품은 골프 GTI다. 2007년 폭스바겐 그룹의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해 제작했다. 이를 위해 벤틀리 컨티넨탈 GT 엔진을 얹고, 아우디 RS 4의 앞브레이크를 빌려왔다. 리어 액슬과 뒷브레이크는 람보르기니 가야르도 것을 가져다 썼다. 변속기는 폭스바겐 가문 가장이었던 페이톤이 하사했다. 최고출력은 무려 650마력. 정지 상태에서 시속 97km까지 가속은 4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최고시속은 323km에 이르렀다.

MK6 GTI 카브리올레

골프 카브리올레는 국내 시장에도 들어온 적 있다. 아쉽게도 GTI 모델은 아니고 2.0L TDI 모델만 가져와 팔았다. 하지만 오픈톱 모델은 역시 고성능이 진리 아니겠는가. 폭스바겐도 이를 알았는지 GTI 버전 카브리올레를 출시했다. 1세대 골프를 끝으로 자취를 감춘 전설의 깜짝 등장에 마니아들은 열광했다. 소프트톱을 벗기는 데 걸리는 시간은 9.5초, 1세대 골프 GTI가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 시간과 거의 비슷했다. 닫기까진 11초가 걸렸다.

MK8 GTI 클럽 스포츠

8세대 골프 GTI 가운데 가장 강력한 버전이다. EA888 에보4 엔진의 잠재력을 끌어내 최고출력을 300마력까지 높였다. 클럽 스포츠는 지난 2016년 골프 GTI 탄생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모델이었다. 시장의 반응이 꽤 괜찮았는지 폭스바겐은 7세대에 이어 8세대에도 클럽 스포츠 버전을 선보였다. 높은 출력 외에도 전자식 디퍼렌셜 록과 가변식 섀시 컨트롤을 통합한 VDM(Vehicle Dynamic Manager)을 통해 더욱 정확하고 날카로운 움직임을 구현했다.

 이현성 사진 이영석

자동차 전문 매체 <탑기어 코리아>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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