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우체부 :: 좌절 40년, 과연 꽃은 필 것인가 - 국산 왜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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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신진 퍼블리카 왜건을 시작으로 지난 40년 동안 다양한 국산 왜건이 선보였다.
몇 차례 반짝 인기를 보기는 했지만 세제와 시장여건, 소비자 인식의 벽에 가로막혀 왜건은 매번 내수 시장에 쉽게 발을 붙이지 못했다. 이번 GM대우 라세티 왜건의 출시는 정통 왜건 제자리 찾기의 성공여부를 확인할 기회가 될 것이다


왜건은 자동차 메이커에게는 세단을 바탕으로 비교적 쉽게 가지치기할 수 있는 모델로, 소비자에게는 일반 세단의 주행특성과 높은 실용성을 고루 갖춘 차다. 여러 장점들 때문에 미국과 유럽 등 해외에서는 오래 전부터 가족용 차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이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왜건의 불모지라 할 만큼 왜건이 인기를 끌지 못했다. 왜건에 불리한 세제와 수시로 변화한 시장여건, ‘왜건은 짐차’라는 소비자의 인식은 그동안 왜건이 내수 시장에 쉽게 발을 붙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그러나 짧은 자동차 생산 역사 가운데에도 다양한 왜건들이 등장해 어려운 여건들을 극복하고 자리를 찾기 위해 애써왔다.

첫 국산 왜건은 신진 퍼블리카 왜건
승용차를 바탕으로 한 첫 국산 왜건은 1967년 신진자동차가 일본 토요타와 제휴로 생산한 퍼블리카 왜건이다. 2도어 4인승 쿠페 스타일로 나온 퍼블리카의 차체 뒤쪽을 왜건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든 것이었다. 당시 소형차 수요가 많지 않았던 탓에 판매대수도 적었고, 결국 1971년 퍼블리카와 함께 생산이 중단되었다. 4도어 세단을 바탕으로 2열 좌석과 차체 옆면 유리창, 짐 공간까지 완벽하게 갖춘 정통 왜건이 국내에서 생산된 것은 1972년의 일이다. 현대가 1969년 내놓은 4도어 세단 포드 20M의 왜건 모델을 조립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즈음까지만 해도 승용차는 일부 부유층 중심으로 팔렸기 때문에 왜건과 같은 가지치기 차종의 수요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 때문에 포드 20M 왜건은 주로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의료수요가 빠르게 늘어난 도시지역 대형 병원의 앰뷸런스로 쓰였다. 그러던 중 신진 크라운에 밀려 포드 20M이 단종되면서 국산 왜건 시장은 한동안 공백기에 들어갔다.
기아 브리사와 현대 포니의 출시로 승용차 대중화 시대가 시작된 직후인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국내 메이커들은 왜건 시장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영업자의 다목적차와 관공서 및 기업체 업무용차 수요를 노린 것이다. 1975년부터 1977년 사이에 현대 뉴 코티나 왜건을 시작으로 GM 코리아의 시보레 카라반, 현대 포니 왜건까지 세 종류의 왜건이 새롭게 등장했다.
이들 중 현대 포니 왜건은 첫 국내 고유 모델 왜건으로 의미가 깊다
1976년 12월부터 판매가 시작된 포니 왜건은 처음에는 1.2ℓ 엔진 모델만 나왔으나 1979년 8월에는 1.4ℓ 엔진 모델도 더해졌다. 기아도 1978년 말 소형차 K303을 바탕으로 한 K303 왜건을 출시해 왜건 러시에 동참했다. 포니 왜건과 K303 왜건은 시보레 카라반이 판매부진으로, 뉴 코티나 왜건은 뉴 코티나가 코티나 마크Ⅳ로 모델 체인지되며 단종된 후 이들의 수요를 흡수해 한동안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러나 왜건 시장이 빛을 본 것은 잠시뿐이었다. 당시 많은 소비자들은 고정된 지붕으로 적재공간이 한정된 왜건보다 소형 픽업 트럭을 선호했다. 게다가 1979년 시작된 2차 석유파동과 1981년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 등의 여파로 1980년대 전반기의 국내 자동차공업은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정부가 자동차 생산을 차급과 차종에 따라 특정 메이커로 특화시키면서 승용차를 생산할 수 없게 된 기아는 1981년 K303 왜건을 단종시켰다. 현대 역시 포니의 뒤를 잇는 포니 2를 수요가 많은 5도어 해치백과 2도어 픽업으로 단순화시키면서 왜건 생산을 중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1981년 기아가 봉고 1톤 트럭과 12인승 원박스카인 봉고 코치를 내놓은 것은 왜건의 몰락에 부채질을 했다. 경제적인 디젤 엔진을 얹은 봉고는 소형 픽업보다 넉넉한 적재능력을 가진 트럭과 활용도가 뛰어난 코치 모두 경영난에 빠진 기아를 순식간에 회생시킬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봉고 코치는 상용차와 레저용차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었고, 그 즈음 시작된 바캉스 붐과 함께 왜건의 수요층을 고스란히 가져갔다.
봉고로 시작된 원박스카의 인기는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가 해제된 1987년 이후로도 현대 그레이스, 쌍용 이스타나 등이 합세해 199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이어지면서 왜건이 발붙일 틈을 주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내 메이커는 한동안 왜건 개발 및 판매에 손을 끊었다. 1980년대 중반 현대가 스텔라 왜건을 만들기는 했지만,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내무부 치안본부(현재의 경찰청) 등 정부기관에 소량 납품했을 뿐 일반 소비자에게는 판매하지 않았다.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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