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우체부 :: '자동차여행' 카테고리의 글 목록 (12 Page)

달력

5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우연히 발견한 신안리 오프로드는 지난 5월부터 시작한 오프로드 투어 코스 중에서 가장 달리기 어려웠다. 돌길, 진흙길, 구덩이, 수풀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경사도 가파른 곳이 많다. 9월 단풍이 우거질 즈음이나 추석연휴에 전북 진안으로 차를 몰아 보면 좋을 듯하다

먼저 ‘오프로드 투어’ 페이지를 열심히 정독하는 독자들에게 고해성사부터 해야겠다. 이달의 오프로드 투어는 지난 6월에 취재한 코스다. 7월호에 실린 백운동계곡 오프로드의 취재를 마치고 철수하던 중 우연히 발견해 들어섰다가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 카메라에 담아 왔다. 여름에 다시 한번 오리라 마음먹고 있었건만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연일 뿌리는 비 때문에 아쉽게도 기억을 더듬어내는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었으니 독자들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란다.
우연히 발견한 신암리 오프로드는 참으로 재미있는 코스였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에 있는 임도로 수목을 관리하기 위해 다져놓은 길이지만, 몇몇 곳은 ‘차가 지난 지 1년도 더 되었겠다’싶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돌길, 진흙길, 구덩이, 자갈길, 수풀길까지 각종 오프로드 코스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노면이 적당히 거칠고 좁아 긴장의 끈을 늦춰서는 안 된다. 그만큼 오프로딩의 재미는 큰 코스다.

가을이 기대되는 알토란같은 오프로드
백운동계곡 오프로딩을 마치고 숙식을 위해 가까운 장수군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높은 산을 굽이굽이 끼고 도는 742번 도로를 타고 가다 왼쪽으로 알차게 생긴 임도를 하나 발견했다. 저 멀리 산꼭대기에 보이는 송신탑까지 이어지는 임도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지프 커맨더를 들이댔다.
하지만 초입부터 달리기가 쉽지 않았다. 아스팔트와 비포장이 만나는 부분에는 꽤 깊은 구덩이가 패여 있어 고개를 창 밖으로 내밀고 건너야 했고 구덩이를 건너자마자 크고 작은 돌들이 무수히 많아 진행은 더디기만 했다.
그렇게 2km 정도를 오르니 시멘트 포장길이 나왔다
여기서 끝나는가 싶었는데, 시멘트 길은 산과 산을 잇는 백운교를 떠받치기 위해 지반을 다져놓은 것으로 300m 정도 지나자 다시 오프로드가 이어졌다.
시멘트 길이 끝나는 곳부터는 길이 훨씬 편했다. 바닥에 깔린 돌들은 아기 주먹보다 작았고 경사도 밋밋했다. 그렇게 느긋한 마음으로 한참을 달리니 이 길의 정상인 듯한 넓은 분지에 닿았다. 내비게이션에 찍힌 정상의 해발은 753m. 임도 초입에서 산 정상의 송신탑까지 이어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송신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신암리 오프로드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은 아주 어려웠다. 오르막길의 바닥은 배수가 빠른 자갈이었지만, 내리막길은 흙이 대부분으로 약간이라도 패인 곳에서는 여지없이 진흙구덩이가 도사리고 있었다. 로 기어를 물리고 어기적거리기를 몇 차례 거듭한 끝에 커맨더는 깊은 진흙구덩이를 지날 수 있었다.
내리막에서 2km 되는 지점은 그야말로 밀림이라는 단어가 꼭 맞아떨어질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었다. 차가 다닌 지 1년은 족히 지났을 법하게 온간 잡풀이 우거져 있어 바닥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길도 좁아 사이드 미러를 접고 내려와야 했다. 길을 잃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차에서 내려 걷기를 몇 번씩 반복하며 그렇게 신암리 오프로드를 내려왔다.
우연히 발견한 신암리 오프로드는 지난 5월호부터 연재를 시작한 ‘오프로드 투어’코스 중에서 가장 어려우면서 가장 재미있는 길이었다.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쿵덕쿵’ 길도 있고, 정면에 하늘이 보일 정도로 가파른 언덕도 있다. 잡목이 우거진 숲도 만날 수 있으니 가을 단풍철 찾아볼 만한 오프로드 코스로도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
경기도 양평은 오프로드의 천국이라고 할 정도로 오프로드가 많다. 야트막한 산에는 임야관리를 위한 임도가 양평 전체를 휘감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스므나리고개도 길게 뻗은 오프로드 코스 중 하나다. 취재당일 벌목들로 길이 막혀 있었지만, 벌목들이 치워진다면 반나절을 달릴 수 있는 오프로드 코스가 될 것이다

녹음이 짙게 우거진 산길을 자동차로 달리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신나고 즐거운 일이다. 산길을 산보하듯 걷는 것도 괜찮지만, 한여름의 태양아래서는 아무래도 산행이 무척 힘들다. 자동차로 산을 오르면 땀 흘릴 일도 없고 지쳐 쓰러지는 법도 없다. 창문을 활짝 열고 상쾌한 공기를 얼굴 한가득 맞으며 달리는 기분은 여름철 팥빙수만큼이나 짜릿한 감동이다. 도시에서는 귀청을 찢을 것 같던 매미 울음소리도 산 속에서는 아리아의 선율만큼이나 아름답고, 이방인을 경계하는 산새소리도 귀를 간질이는 듯 미소를 짓게 한다.
이달 오프로드 투어는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의 임도이다. 수목을 관리하거나 벌목한 나무를 실어 나르는 임도는 오프로드 난이도가 쉬운 편이어서 네바퀴굴림 SUV라면 쉽게 지날 수 있다.
양평에는 이러한 임도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깔려 있다. 오프로드 코스를 찾기 위해 양평군의 지도를 들추다가 노란색의 비포장도로가 거미줄처럼 얼키설키 깔려 있는 것을 보고 지도책을 들고 양평으로 향했다.

도시형 SUV도 쉽게 오를 수 있어
6번 국도를 타고 양평으로 가는 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드라이빙 길이다. 서정과 낭만 그리고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남한강변을 지나 청운면에서 양동 방향 349번 도로로 우회전해 27km가면 양동역에 닿는다. 역을 지나 계정방향 11번 도로를 타고 3km가면 제1대월교에 닿는다. 다리를 지나자마자 우회전하면 스므나리고개를 넘는 오프로드가 시작된다.
지도상으로 확인한 이 오프로드는 족히 50km 정도는 될 긴 길이다. 양평군 전체를 휘감아 도는 긴 오프로드는 그 끝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긴 시간의 오프로드 투어를 위해 배를 든든히 채우고 지프 커맨더로 코스에 들어섰다.
아스팔트-시멘트 포장길을 1.5km 정도 지나니 오프로드가 시작된다. 하늘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고 노면에는 풀이 무성하다. 길의 폭도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로 좁지만 바닥은 평탄화가 잘되어 있어 로 기어를 넣지 않아도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산길의 경사도 완만한 편이어서 도시형 SUV도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창문을 모두 내리고 자연이 선사한 나무와 풀 향기를 맡으며 나가는 길은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지프 커맨더도 고향 땅을 밟은 것처럼 신바람이 난 듯 가벼운 몸놀림으로 기자를 산 속 깊숙이 몰아넣었다.
전날까지 많은 비가 내려 진흙길을 예상했지만 다행히도 스므나리고개 길은 지면에 흙과 모래가 섞여 있어 배수가 빨랐다. 또 물이 자주 고이는 두 곳에는 시멘트로 포장을 해 놓았다. 운전이 쉽고 편해 울창한 숲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달리는 길 양옆이 울긋불긋하다. 차에서 내리니 산딸기가 지천에 깔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진기자와 둘이서 산딸기로 배를 채울 정도로 먹고 다시 차를 몰았다.
자연이 선사하는 예상 못한 선물(산딸기)로 기분이 더욱 좋아져 바쁜 길은 재촉했으나, 50km를 예상했던 오프로드는 8km에서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벌목해놓은 나무들을 길에 그대로 방치해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차를 두고 한참을 걸어가 보니 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조만간 벌목들은 치워질 테고 스므나리고개는 반나절을 달릴 수 있는 길고 긴 오프로드 코스가 될 것이다.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
선사시대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 언양 반구대는 아직 원시적인 분위기가 남아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물이 차 있는 까닭에 벽화를 보려면 봄에 가야 한다. 동해로 삐죽 튀어나온 간절곶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해가 뜨는 곳. 인적 없는 해돋이는 왠지 쓸쓸했다
글·최주식<본지 편집장> 사진·임재천<다큐멘터리 사진기자>


지나고나면 만화경처럼 장면들이 찰칵찰칵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그 장면들이 어떤 때는 엊그제 일인 듯 하다가도 십여 년 전의 일처럼 까마득해지곤 하는 것이다. 기억이란 그만 떠나가 주었으면 좋은 것들은 잘 가지 않고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 것들은 흔적 없는 것인가. 철 지난 바닷가를 거닐며 송창식의 노래를 흥얼거린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는지 아니면 아주 먼 옛날의 일이었는지 기억은 오랜 시간의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영역을 다투었다. 이번 울산행은 뭐랄까. 기억의 부채를 갚기 위한 여정이었을까. 그럼에도 가라앉지 못하고 떠도는 기억들은 어떻게 하나. 문득 기형도의 시가 생각났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이제 겨울에 접어든 것이다.

언양 반구대, 아직 원시적인 분위기가 남아있는
울산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적인 도시 중 하나다. 근대화란 곧 공업화와 도시화의 진행을 동반하게 되는데, 1962년 울산공업단지를 조성하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한적한 읍에 지나지 않았던 울산이 시로 승격된 것이다. 도시는 공업시설이 없어도 발전하지만 공업은 도시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논리에 따른 것이다. 물론 근대화를 통한 성장의 그늘이 간과된 것은 비단 이 지역 뿐만은 아니지만…….
도시 이미지는 실제 가보지 않은 지역의 경우, 교과서적인 지식에 많이 의존하게 되는 듯 하다. 울산만 해도 산업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한 데 반해 역사적으로 경주와 이웃한 지역으로서의 문화유산이나 동해를 끼고 있는 풍광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게다가 1997년 울주군과 통합해 광역시로 커지면서 언양 반구대며 석남사, 간절곶 등의 명소를 품에 안게 되었고 그만큼 외연이 넓어진 것이다.
반구대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경부고속도로 언양 IC가 무슨 이유인지 폐쇄되어 있은 까닭에 서울산 IC로 빠져나와 경부와 나란히 뻗어있는 언양-경주간 35번 국도를 타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안내판도 코앞에 다다라서야 나타나기 때문에 미리 차분히 살펴야 한다.
큰길에서 벗어나 좁은 길을 한참 들어가야 하는데, 거리는 3~4km에 불과해도 굽이진 산길이라 걸어가기에는 꽤 먼 거리다. 아무튼 어렵게 찾아간 반구대는 초입부터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요즘도 이런 데가 있나 싶게 원시적인 느낌이 가득했다.
천전리 계곡을 지나 반구대 가는 길은 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병풍처럼 둘러 선 계곡의 절벽이며 얕은 물 위로 드러난 너른 바위 등이 숲과 어울려 운치를 뽐내는데, 무척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산은 마지막 단풍의 절정으로 몸을 떨고 있어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조그만 다리를 건너 숲길을 빠져 나오면 탁 트인 곳에 반구대가 자리한다. 반구대(盤龜臺)는 구릉 모습이 거북이 엎드려 있는 모양새라 해서 붙여진 이름. 옛날 이 부근에서 귀양 살던 정몽주가 자주 찾은 곳이라고 하는데, 그보다 더 오랜 옛날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에 새겨 놓은 벽화 때문에 유명세를 탔다. 여기에는 사람과 고래, 사슴 무리 등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 조상들의 얼굴과 생활양식을 상상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시인 정일근 씨 등이 주축이 되어 우리나라에 고래가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그 고래가 선사시대 때부터 우리나라를 찾았던 귀신고래이고, 근거로 제시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에 새겨진 귀신고래 그림이다. 새끼고래를 업고 가는 어미고래의 모습이 그것이다.
이곳에서 설명을 해주는 문화유산해설가 한 분이 멀리 암각화가 그려진 절벽을 가리키며 사연댐의 물이 빠지는 3~5월경 봄에 오후 3시쯤 오면 암각화 그림을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준다. 지금은 물이 차서 볼 수 없는데 이끼 낀 수초 등에서도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이곳을 찾은 중년의 한 남자는 자기가 20년 전에 이곳을 찾아 벽화를 탁본했었노라고 감회에 젖어 말했다. 3장을 탁본했는데 모두 나눠주고 없다고. 당시는 그 가치를 잘 몰랐었다는 말이 공허하게 들렸다.
흐르는 물은 모두 바다를 지향하는 모양이다. 반구대 일대를 흐르는 대곡천은 두동면 천전리와 언양읍 대곡리에 걸쳐 흐르다가 사연댐에 머무른 뒤 태화강에 섞여 동해로 빠져나간다. 댐이 없었던 시절에는 물길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고, 어느 때건 암각화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울산시내에 접어들자 태화강이 모습을 드러내고 강 건너 십리대밭이 어슴푸레 보인다. 퇴근 무렵 차들은 분주하게 태화교를 오고간다. 도시의 강은 저물 무렵 석양이 질 때 라서야 존재감을 드러내는 듯하다. 대낮에 무심하게 보이는 강물이 붉은 기운이 감돌고서야 서정적이 되는 것이다.
한때 현대자동차와 현대조선, 현대중공업 등 현대그룹 종업원들이 울산 공업 인구의 절반을 넘었으니 ‘현대시’라 불린 것도 과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대그룹이 해체된 데다 현대차 울산 공장도 연구시설이 경기도 남양으로 옮겨가고, 일부 생산라인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예전과 같은 절대적인 비중은 많이 줄어든 느낌이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퇴근 무렵인데도 현대자동차가 있는 염포동 일대는 한산한 모습이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방어가 많이 잡혔다고 이름 붙여진 포구 방어진이 나온다.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
새는 겨울을 나기 위해 먼길을 날아 우리나라를 찾았고 사람들은 그 새를 보러 겨울바다로 향한다. 새들은 자신들에게 씌워진 조류독감의 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추수가 끝난 논에서 먹이를 찾거나 군무를 펼치며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겨울 철새들의 천국 충남 서산의 천수만을 찾아 아름다운 새들의 모습과 겨울바다의 고요를 즐겼다

새가 보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평소 새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환경이나 생태를 고민한 적도 많지 않으니 다분히 충동적이다. 그나마 이유라고 생각되는 한 가지는 언젠가 자유로에서 만났던 새들의 평화로운 비행모습 정도. 겨울바다를 볼 수 있다는 점도 철새 여행을 부추겼을 것이다.
봄이 오면 꽃을 찾고 가을이 되면 단풍을 보러 길을 떠나듯, 여름과 겨울의 발걸음은 바다를 향하게 된다. 둘 중 더 마음이 끌리는 쪽은 겨울바다. 북적임과 소란스러움이 없는 것이 첫 번째, 을씨년스러움과 고즈넉함이라는 야누스의 얼굴이 두 번째 매력이다. 철 지난 바닷가의 한가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싱숭생숭하다가도 해넘이의 노을을 만나면 한없이 차분해진다.

철새들의 낙원, 천수만
고등학교 때 우리나라는 대륙과 바다를 연결하는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유난히 침략과 전쟁이 많았다고 배웠다.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해 바다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와 한반도를 통해 대륙으로 뻗어 가려는 일본, 대충 이런 이야기들이다. 이는 계절에 따라 먼길을 떠나는 철새들에게도 고스란히 들어맞는다.
겨울 철새는 겨울을 나기 위해 러시아 등지에서 우리나라를 찾고 여름 철새는 동남아나 오스트레일리아 등 남쪽에서 겨울을 나고 봄에 우리나라에 온다. 겨울 철새들의 고향은 러시아의 시베리아와 캄챠카 반도 혹은 아무르강 근처. 아시아 대륙의 극한지역인 이런 곳들은 봄과 여름에는 새들의 번식지로 아주 좋지만 겨울에는 영하 수십℃ 아래로 기온이 떨어지면서 완전히 얼어붙은 땅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이곳의 새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는다.
철새를 만나러 가는 길은 험했다. 길이야 서해안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렸지만, 언론에서 흘러나오는 조류독감(정확한 명칭은 ‘조류 인플루엔자’) 소식 탓이다. 일단 걸리면 치사율이 70∼80%라니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도 여행을 강행한 것은 ‘나는 예외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사람이 조류 인플루엔자에 감염될 확률은 0%에 가깝다는 정보 덕분이다.
천수만을 향한다. 서울에서 가까울뿐더러 300여 종, 40만 마리의 새들이 찾는 철새들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뉴스 끝자락의 영상뉴스나 신문의 지면을 장식하는 가창오리의 군무(群舞)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천수만에 자리잡은 간월암 역시 발걸음을 잡아끌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홍성나들목으로 빠져나가면 이내 천수만을 만나게 된다. 천수만은 충남 서산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안면도와 육지 사이의 바다. 길이가 200km에 이르는 좁고 긴 만이다. 천수만(淺水灣)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심이 얕아 큰 배들은 다닐 수 없다. 대신 갯벌이 넓다.
철새를 볼 수 있는 곳은 엄밀히 말하면 천수만이 아니라 간월호와 부남호다. 간월호와 부남호는 천수만의 북쪽 끄트머리를 막아 만든 담수호다. 홍성군 서부면 궁리와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를 이어 간월호가 생겼고 여기서 다시 태안군 남면 당암리를 연결해 부남호를 만들었다
간월도리에서 간월호라는 이름을 따왔고, 부석면+남면에서 부남호를 만들었다 한다. 남아 있던 바닷물을 오랜 시간에 걸쳐 빼내 이제는 완전한 담수호가 되었다.
담수호만 생긴 것은 아니다. 4천700만 평이라는 넓은 땅도 생겼다. 예전 대통령 선거 때 150만 명이 모였다는 여의도 광장보다 400배 정도 큰 넓이다. 경비행기로 볍씨를 뿌리는 이 너른 논에 추수가 끝나고 남은 나락은 새들에게 중요한 먹이가 된다. 요새는 대형 콤바인으로 작업하면서 낟알이 남아나지 않아 서산시에서 낟알을 남겨 놓으면 보상한다고 한다. 철새는 절로 날라 오는 것도, 공짜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새, 새, 새……
새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이 없는 이에게도 천수만이 유명한 것은 가창오리의 군무 때문이다. 가창오리는 ‘멸종위기 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에 의해 보호받는 종으로 개체수가 그리 많지 않다. 가창오리의 정식이름은 ‘바이칼 오리’(baikal teal). 하지만 이들의 고향인 러시아의 조류학자들도 기껏해야 열댓 마리를 볼 수 있을 뿐이란다. 하지만 천수만에 해가 지면 수십만 마리가 날아오르는 장관을 볼 수 있다.
겨울해가 빨리 지는 것을 걱정해 서두른 덕인지 간월호에 도착해도 시간이 여유롭다. 가창오리는 야행성이라 낮에 쉬고 밤에 먹이를 찾아 날아오른다. 그래서 탐조버스로 간월호를 둘러보기로 했다. 시간이 남으면 간월암까지 다녀올 생각이다.
탐조버스에 올라 간척지에 들어섰다. 추수가 끝나 퀭한 논을 짙은 갈색의 기러기들이 덮고 있다. 탐조 가이드에 따르면 기러기는 식물성 먹이만 먹기 때문에 배설물이 알카리성이다. 그래서 기러기가 많이 오는 이듬해는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 된다고 한다. 더구나 성격마저 가족적이라고 하니 행동이나 성격이나 여러모로 익조(益鳥)인 셈이다.
논 가운데를 지나 물가로 왔다. 간월호를 끼고 도는데 갖은 새들이 평화롭게 쉬거나 먹이를 먹고 있다. 그렇다고 아무데서나 내려 새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간에 탐조대를 만들어 놓아 정해진 곳에서만 볼 수 있다. 탐조대라고 해서 별 것은 아니다. 새들이 방해받지 않도록 사람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볏짚으로 커다란 벽을 만들고 거기에 구멍을 내 새들을 볼 수 있도록 한 정도다.
새에 대해 잘 모르니 크기와 색만 비슷하면 같은 새로 보여 답답하다. 가이드에게 일일이 물어 새의 이름을 알아내지만 다시 보면 ‘이 새가 그 새던고?’ 싶어 가슴을 친다. 제일 먼저 물어본 것은 왜가리. 황새목에 속해 생긴 것은 황새처럼 잘 생겼지만 하는 짓은 참 미련하다. 미련한 먹보의 상징인 돼지도 위의 80%가 차면 구정물통을 발로 찬다는데, 이 녀석은 실컷 먹고 토하고 또 먹는다. 더구나 원래는 여름 철새로 가을이면 남쪽으로 내려가야 되지만 먹을 것이 많아 그냥 머물면서 텃새화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
본디 태백과 삼척은 한 지역이었다. 태백산맥의 산중에 들어앉은 '하늘 아래 첫 도시' 태백은 한때 '한국의 루르 지방'이라 할만큼 규모가 큰 탄광도시였으나 이제 그 흔적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선탄장이 아직 남아 그 역사성을 보여준다. 고개를 넘으면 삼척의 시리고 푸른 바다가 반긴다. 아스라하게 이어지는 바다는 굽이마다 다른 풍광을 보여주었다

하필이면 가장 추운 날, 가장 추운 곳으로 떠난다. 겨울에는 아무리 추워도 동해로 가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은 내심 겨울바다를 보고 싶었던 때문이다. 이번에는 태백과 삼척을 하나로 묶어보기로 했다. 한때 탄광지대로 이름높았던 태백이나 동굴관광도시를 내세우는 삼척이나 사실 막막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가장 겨울다운 풍경이 거기 있을 것 같았다. 높은 산악지대를 넘으면 바로 바다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본디 태백과 삼척은 한 지역이었다. 삼척은 강원도에서 가장 큰 지역이었으나 1980년 북쪽의 북평읍을 동해시에 떼어주고 이듬해에는 서남쪽의 황지읍과 장성읍을 떼어내 태백시로 독립시켜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겨울나무는 스스로 잎을 모두 떼어냈지만 머지않아 다시 무성할 것이다. 자, 겨울 속으로 출발이다.

사북, 고한 지나면 ‘하늘 아래 첫 도시’ 태백
서울 쪽에서 태백으로 가는 길은 영동고속도로를 끝까지 타고 동해까지 가서 태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과, 중앙고속도로로 갈아 탄 다음 제천에서 빠져 영월을 거쳐 태백으로 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앞의 길이 조금 편할 수는 있겠지만 거리가 휠씬 더 멀다. 가는 길에 영월, 태백을 지나 삼척으로 들어가고, 오는 길에 동해를 거쳐오면 보다 다양한 풍경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가는 길이 같지 않다는 데서 길의 단조로움도 줄여준다.
이상하게도 서해 남부 쪽으로는 대설주의보가 내리는데, 강원도 동해 쪽으로는 눈발도 구경할 수 없었다. 눈꽃을 보고도 싶었으나 교통을 생각하면 차라리 다행이기도 하다. 눈을 대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다. 눈 대신 하늘은 시리도록 푸른빛을 안겨주었다. 사진을 찍기에는 춥지만 착한 날씨다.
어느새 영월 부근이다. 차창으로 스쳐가는 겨울산은 정말 쓸쓸하고 삭막했다. 사북, 고한 표지가 이어서 지나가는 이곳은 정선. 아우라지의 고장이라는 표지가 바람에 날려 가는 종이처럼 부질없어 보였다. 이른바 ‘사북사태’라는 1980년 격동의 현장으로 기억되는 사북에는 더 이상 거친 탄가루가 날리지 않았다. 카지노 강원랜드를 가리키는 표지가 여기서 또 저기서 나타났다 사라지고 이따금씩 전당포 간판이 보이는 골목이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매서운 추위에 학교 갔다 오는 아이들의 어깨가 좁아 보였다.
철로 차단기 앞에서 차는 몇 번이나 멈춰 섰다. 겨울의 철로는 차디차다
햇살이 부딪쳐 얼음처럼 차갑게 쨍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관사 처마 끝의 고드름은 예리하게 무엇인가를 노리는 듯 보였다.
태백산맥의 산중에 들어앉은 ‘하늘 아래 첫 도시’ 태백에 들어섰다. 한때 국내 석탄 생산의 30%를 차지해 ‘한국의 루르 지방’이라 불리던 곳.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산굽이를 돌아가는 철길이 그 기억을 더듬고 있을 뿐이다. 지나는 길에 낙동강의 발원지라는 황지연못을 찾았다.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도 이곳 태백에 있는데 멀고 먼 낙동강의 발원지까지 품고 있다니 무언가 신비스런 느낌이 들었다.
황지연못은 외딴 곳에 있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동네 한가운데에 있었다(물론 동네가 나중에 들어선 것이겠지만). 아담하게 꾸며진 공원 안에 그저 보통의 연못처럼 자리하고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야말로 명경지수(明鏡止水)다. 물이 깨끗하기가 이루 비할 데가 없다. 그야말로 물의 원천인 것이다.

근대문화유산, 철암역 선판장에서
1930년대 말부터 형성된 탄광마을 철암의 내력을 고스란히 지녀온 철암역사는 외벽의 붉은 벽돌이 허물어지는 바람에 새로 단장을 하고 있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을 역사는 한적하기 이를 데 없었고, 거리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식당이며 구멍가게, 미용실, 호프집 등이 늘어선 거리의 가게건물 중 절반 이상은 비어 있고, 그나마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얼마 있지 않아 차선확장공사가 시작되면 모두 철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80년대의 호황을 끝으로 90년대 들어 대부분의 군소탄광이 모두 폐광하면서 철암의 인구도 급격하게 줄어들고 도시는 활기를 잃기 시작했다. 철암지역 최대의 탄광이었던 강원산업이 폐광한 것이 93년. 지금은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철암분소 하나만 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런데 꽤 부산한 움직임이 보인다. 최근 고유가로 연탄 사용이 늘어나면서 탄광이 활기를 되찾고 있는 것. 산자락에 가득 쌓아놓은 정부 비축분 석탄을 꺼내고 있는가 하면 지하 막장에서도 새로 석탄을 캐내고 있다. 이렇게 캐낸 석탄은 화차에 실어 동해 발전소로 가고, 대형 덤프트럭에 실려 연탄공장 등지로 간다. 철로는 묵호항까지 이어지는데 1930년대 말 장성탄광에서 채굴한 석탄을 반출하기 위해 묵호항과 철암을 잇는 철도가 처음 가설되었다.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