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우체부 :: '자동차역사' 카테고리의 글 목록 (6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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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을 맞은 지금은 소형 크로스오버의 대두로 인해 힘이 다소 빠지기는 했지만 '준중형 세단'은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여전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준중형 세단은 전통적으로 소형차와 동등한 세율이 적용되는 것과 더불어 소형차를 뛰어 넘는 실내공간과 편의성으로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생애 첫 차'로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아 왔다.

하지만 초기의 준중형차는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초기의 준중형차는 중형차를 기반으로 설계되어 중형차와 동등한 체적을 지니면서도 1,500cc 미만의 엔진을 탑재하여 가격 및 세제 상의 부담을 억제한 형태였다. 준중형차는 크기와 공간은 중형차에 '준'하면서도 세제 상으로는 소형차로 분류된, 이름에 어울리는 차급이었다.

준중형차는 80년대의 호황에 따라 소형차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본격적인 중형차는 아직도 부담이 컸던 당시 소비자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고 들었다. 그 중에서도 현대자동차의 스텔라는 덩치는 중형이면서 엔진은 중형이 아닌 이 당시의 준중형차의 전형을 보여주는 모델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준중형차들은 어딜 가나 노면의 구배가 큰 우리나라의 도로환경에서 고장을 일으키는 경우가 잦았다. 중형차의 덩치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소형차의 엔진을 그대로 사용했으니 무리가 가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현대자동차가 새롭게 내놓은 준중형차는 이러한 준중형차의 개발 사상에서 탈피를 이루고, 보다 현대적인 형태의 준중형 세단으로 나아가기 위한 초석을 닦았다. 이 차가 바로 '엘란트라'다.

준중형차의 대명사, 아반떼의 아버지
 현대 엘란트라는 현대자동차가 1990년 내놓은 준중형급 세단으로, 4년 여의 시간 동안 총 4,100억원을 투입하여 개발한 독자 개발 모델이다. 차명인 엘란트라는 프랑스어로 '열정'을 의미하는 단어 엘랑(Elan)과 '운송'을 의미하는 단어 트랜스포트(Transport)에서 'Tra'를 따서 지어졌다. 프로젝트명 'J'로 개발된 엘란트라는 쏘나타와 포니엑셀의 중간급의 체급을 갖는 차량으로 개발했다.

현대자동차는 이전의 독자모델이었던 포니와 스텔라 등을 디자인하던 시절에는 이탈리아의 주지아로에게 디자인을 위탁해 왔다. 하지만 엘란트라의 외관 디자인은 현대자동차의 독자적인 디자인이다. 엘란트라의 외관 디자인은 기존 주지아로 스타일의 직선적인 실루엣을 벗어나, 유선형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채용한 점이 특징이다. 이렇게 유선형을 강조한 디자인을 통해 당시의 젊은 소비자 층에게도 상당히 어필할 수 있었다.

현대자동차 엘란트라는 길이 4,375mm, 폭 1,675mm, 높이 1,395mm의 컴팩트한 체구를 지녔다. 3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는 B세그먼트급 소형 세단 수준의 크기지만, 당시에는 일반적인 소형 세단보다 큰 몸집을 지니고 있었다. 하체는 전륜에는 맥퍼슨 스트럿, 후륜에 토션 빔 방식의 서스펜션을 채용했다. 또한 크기는 스텔라 대비 작아졌지만 미쓰비시 미라쥬의 전륜구동 플랫폼을 채용하면서 후륜구동이었던 스텔라 보다도 넉넉한 공간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당시 국산 세단으로서는 선진적인 접이식 뒷좌석까지 제공하여 공간 활용성을 더욱 높였다.

초기형 엘란트라는 미쓰비시의 1.5리터 오리온 SOHC 엔진과 1.6리터 시리우스(4G61) DOHC 엔진을 사용했다. 1.5리터 오리온 엔진은 90마력/5,500rpm의 최고출력과 13.5kg.m/3,000rpm의 최대토크를 내는 엔진으로, 초기형 엘란트라 판매의 주역이었다.

시리우스 엔진은 126마력/6,000rpm의 최고출력과 15.3kg.m/5,000rpm의 최대토크를 발휘했는데, 이는 당시 동급에서 최강의 성능을 자랑한 기아 캐피탈의 1.5리터 GTX 엔진을 뛰어 넘는 성능이었다. 이 엔진은 본래 미쓰비시 미라쥬의 일본 내수시장용 고성능 버전인 사이보그 트림에 탑재되는 터보 사양 엔진에서 터보차저를 떼어낸 것으로, 당대 최강의 성능을 자랑했다. 현대자동차는 이 엔진을 실은 엘란트라 1.6 모델로 호주 랠리의 1.6리터 이하 비개조 부문에 참전하여 세 차례(`91,`95, `96)의 우승을 거머쥐기도 했다. 하지만 시리우스 엔진을 탑재한 모델의 판매량은 매우 저조했다. 왜냐하면 이 당시는 자동차 세법 상 소형차의 기준이 배기량 1,500cc 미만이었기 때문이다.

엘란트라는 1990년대 국내 자동차 시장의 요구를 반영하여 개발된 자동차였다.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는 88올림픽을 전후하여 이른 바 '3저 호황(저금리, 저유가, 저환율)'의 시대였고, 고속성장과 물가안정 등으로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삶의 질'을 추구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국내 자동차 시장은 통상적인 세단을 벗어나, 보다 스포티한 성능과 스타일을 가진 자동차에 대한 열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의 스페셜티카인 스쿠프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며, SUV 및 승합차 등, 레저용 차량도 크게 각광받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현대자동차는 차량의 컨셉트를 '고성능'에 초점을 맞춘 홍보활동을 전개하면서 차별화된 인상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허위/과장광고' 내지는 '포르쉐가 1단으로 주행했다' 등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포르쉐 911과의 대결을 그린 광고 역시 그러한 배경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DOHC'를 '고성능'을 대변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를 전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엘란트라의 첫 시작은 다소 미약했다. 차의 크기에 유달리 집착했던 국내 시장의 전통적인 성향에 따른 것이었다. 기존의 스텔라 대비 한참 줄어든 몸집을 가진 엘란트라는 출시 초기, 큰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엘란트라는 출시 첫 해에는 인상적인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1992년도 최다 판매차종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엘란트라는 1993년, '뉴 엘란트라'라는 이름으로 페이스리프트를 맞았다. 페이스리프트를 맞은 엘란트라는 전/후면부 디자인을 크게 손봤다. 전면부는 보다 작아진 크기의 반투명 헤드램프와 더욱 유연해진 형상으로 빚어졌고, 뒷모습에서는 'L'자형 테일램프를 도입하여 세련된 느낌을 강조했다. 뉴 엘란트라는 국산 준중형 세단 최초로 ABS와 운전석 에어백이 도입된 차종이기도 하다.

뉴 엘란트라는 기존에 사용했던 1.5리터 오리온 SOHC 엔진만 남기고 엔진 라인업을 일신했다. 새롭게 적용한 엔진은 1.5리터 및 1.8리터 사양의 시리우스 DOHC 엔진들이다. 1.5리터 시리우스 엔진은 108마력/6,000rpm의 최고출력과 14.6kg.m/4,500rpm의 최대토크를 냈다. 이 엔진은 비록 초기형의 1.6리터 사양에 비하면 부족한 성능이지만, 오리온 엔진 사양에 비해 뛰어난 성능을 제공했다. 그리고 1.8리터 사양은 미쓰비시의 1.8리터 시리우스 엔진(4G67)을 현대자동차가 개조한 G4CN엔진으로, 1,796cc의 총배기량으로 135마력/6,000rpm의 최고출력과 17.5kg.m/4,500rpm의 최대토크를발휘했다.

뉴 엘란트라는 초기형 엘란트라의 뛰어난 상품 경쟁력을 발전시켜, 준중형차 시장을 장악했다. 뉴 엘란트라가 출시된 1993년도에는 초기형 엘란트라에 이어, 연간 국내서 가장 많이 팔린 차종에 오르기도 했다. 엘란트라는 쏘나타와 더불어, 현대자동차의 수출 역군이기도 하다. 현대자동차는 엘란트라 초기형부터 꾸준히 수출 시장을 공략했으며, 1994년도에는 단일 모델로 100만대 판매량을 돌파하는 등, 내수와 수출 모두 좋은 실적을 올렸다. 엘란트라의 성공은 1996년 등장한 후속차종인 아반떼(Avante)에게 이어졌다.

엘란트라라는 이름은 비록 대한민국에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지만, 그 후신인 아반떼의 수출명으로는 계속 사용되고 있다. 엘란트라는 수출 시장에서 초기에는 로터스 엘란(Elan)의 존재로 인해, 처음에는 'E'를 뺀 란트라(Lantra)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었다. 그러다가 90년대에 기아자동차가 로터스 엘란에 대한 판권을 사들였고, 외환위기 이후 현대가 그 기아를 합병하게 되면서 아반떼XD부터는 '엘란트라'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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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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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포니 쿠페 컨셉트카

 

우리 국내 자동차 업체들이 외제차 조립에만 급급하던 1970년대 초 정부는 우리 자동차산업을 국산화 쪽으로 유도하기 위해 대중형 승용차의 국산 고유모델 개발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정책에 따라 1975년 현대자동차가 제일 먼저 국산 고유모델 1호인 ‘포니’를 개발했다.

 
국내외 주위로부터 불가능하다는 냉대를 무릅쓰고 개발에 착수해 1974년 말 이탈리아의 토리노 모터쇼에 포니가 출품되었을 때 세계가 놀랐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고유 모델을 갖는 세계 16번째의 나라가 되었다. 4기통 1,238cc급 80마력의 엔진을 가진 포니는 연료 경제형에 우리 도로 사정에 맞는 내구성을 지녀 ‘막 타도 좋은 국산차‘로 인정받아 마이카시대와 수출의 길을 열어준 차였다.

*현대 포니 1200 

 
그런데 포니의 디자인을 당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던 젊은 이탈리아의 디자이너인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에게 맡길 때 현대자동차는 젊은 세대를 위한 쿠페형 스포츠카도 같이 주문해 2도어 스포츠카인 `포니 쿠페 로드스터` 컨셉트 카도 만들었으나 당시 어려운 국내의 경제사정에 맞지 않고 사치성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시작 차 한 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포니 로드스터 쿠페 대신 유럽 수출용과 젊은 층의 수요를 위해 세단형의 3도어 쿠페(Hyundai Pony 1200 TL 3-door coupe)를 생산했으나 역시 4도어 세단을 좋아하는 국내 수요자들의 성향과 젊은층의 빈약한 경제 수준 때문에 국내 판매는 시원치 않았지만 포니 3도어 쿠페가 명목상 최초의 국산 시판용 쿠페였다. SOHC 4기통, 1238cc, 55마력의 일본 미쓰비시 세턴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155km를 냈다.

 

*현대 포니 1200 3도어 쿠페

컨셉트카는 자동차 제조사의 새로운 디자인과 스타일, 새로운 기술력을 선보이기 위해 개발하는 일종의 시작차(Prototype Model)이다. 주로 모터쇼 같은 자동차 전시회에 선보이는 모델로 관람객들과 소비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을 보이는지 알기 위한 모델이다. 그렇기 때문에 컨셉트카는 바로 출시와 함께 양산할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바로 현대차가 처음으로 만든 포니 쿠페 컨셉트카도 그렇다.

 
이 차는 현대 포니 세단에서 파생된 컨셉트카로서 이탈리아의 카 디자이너인 이탈디자인의 조르제토 쥬지아로가 포니 세단과 함께 디자인했으나 현대에서 생산하지 않는 바람에 1970년대 미국 GM자동차 왕국을 꿈꾸던 자동차의 도박사인 미국 존 드로리언이 만든 DMC-12의 베이스 모델로 이용 됐다. 말하자면 두 차는 형제차인 셈이다. 1985년작 미국의 SF영화로 유명한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에서 순식간에 과거, 현제, 미래로 오가는 타임머신으로 변신해 큰 인기를 끌었다.

*1981년 들로리언  DMC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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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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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대표하는 클래식 로드스터라고 하면 외국의 마니아들이 십중팔구 선택할 쉘비 코브라! 영국의 백야드 빌더였던 AC 카즈(AC Cars)가 MG B나 폭스바겐 비틀의 부품을 차용하여 생산하던 로드스터에 미국 캐롤 쉘비의 '감'을 더해 포드 289 엔진 또는 포드 427 엔진을 올려 만든 것이 쉘비 코브라(Shelby Cobra)입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포드VS 페라리'를 통해 더욱 유명해진 쉘비 코브라를 일본의 한 전문 판매 및 정비업체에서 만났습니다.

우렁찬 시동음과 배기음,
 운전은 쉽지 않아

이날 라라클래식이 시승해 본 차는 7.0L 엔진이 올라간 것으로, 오래전 만들어진 오리지널 쉘비 코브라는 아니지만 현재 다시 부활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쉘비 본사가 직접 만든 것이었습니다.

운전석에 앉아 키를 돌리면, 먼저 그 우렁차고 박력있는 시동음과 배기음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절로 "와~~" 라는 탄성이 나올 정도입니다. 영국 AC 카즈가 만든 AC 에이스(Ace)에 미국의 엔진이 올라가면서 이름이 바뀐 쉘비 코브라는 마치 머슬카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듯 합니다. 튜브 프레임 위에 탑재된 엔진으로부터 몸으로 전달되는 진동도 운전하기 전부터 드라이버를 흥분시키기 충분합니다.

하지만, 실제 주행을 해보니 최근의 기술이 적용된 자동차들에 익숙해진 보통 사람들이 운전하기는 쉽지 않을 듯 하더군요. 스티어링 휠을 약간씩 움직여가며 직진성을 확보해야만 했고, TCS 기능이 들어있지 않아 액셀러레이터를 조금만 밟아도 바퀴가 헛돌며 자세가 무너지게 되죠. 익숙해지는데 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쉘비 코브라의 이름 뒤에 붙는 427 또는 289 등은 큐빅인치(cu. in.) 즉 세제곱 인치를 뜻하는 숫자로 엔진 배기량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리터 단위로 환산하면 대략 7.0L와 4.2L가 되는데요. 모두 포드 V8 엔진에 뿌리를 두고 있죠. 캐롤 쉘비가 코브라를 개발할 당시에는 GM과 포드의 힘겨루기를 이용해 포드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엔진을 제공받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멋진 곡선 라인의 차체가 주는 매력은 압도적입니다. 완전한 오픈 로드스터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로드스터 문화가 발달한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는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미국 쉘비가 직접 만들었다는 플레이트가 실내에 장착되어 있습니다. 워낙 인기있는 로드스터이다 보니, 많은 백야드 빌더나 레플리카 메이커가 간단하게 프레임을 만들고 FRP 보디를 씌워 차를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도너 차를 활용해 적당히 모습만 흉내낸 차량을 만들기도 하지만, 혈통을 이어받은 곳과 그렇지 않은 곳에서 만든 차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AC 코브라의 아름다움
, 파란색 차체가 매력적

연한 하늘색 코브라는 쉘비 코브라의 형제뻘 되는 AC 코브라입니다. 미국의 캐롤 쉘비에 의해 포드 엔진이 탑재된 AC 카즈의 로드스터인 AC 에이스는 엔진과 일부 시스템 변경에 따라 이름도 바뀌어 AC 코브라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AC 코브라의 차체와 여러 시스템은 영국에서 만들어진 후 쉘비에 수출되었고, 쉘비는 AC 카즈로부터 전달받은 차체와 여러 시스템을 최종 확인하고 포드 엔진을 탑재해 쉘비 코브라를 완성하는 방식이었죠.

거꾸로 미국 포드의 엔진은 영국으로 실려가 AC 코브라에 탑재되는데요. 이렇게 같은 특성을 지닌 차가 미국 쉘비와 영국 AC 카즈 두 곳에서 생산되게 됩니다. 당시로서는 동일한 설계를 바탕으로 두 회사가 사이 좋게 생산했지만, 이런 생산 방식은 결국 코브라라는 차에 관한 권리에 혼선을 주게 되고, 수많은 레플리카 업체가 이런 상황을 틈타 코브라의 레플리카를 판매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위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AC 코브라(연한 파란색)는 쉘비 코브라(진한 파란색)에 비해 휠아치 등의 디자인이 다르며, 볼륨감이 작은 편입니다. 쉘비 코브라는 포드와의 협업으로 더욱 육감적인 몸매의 디자인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가 지금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코브라의 모습은 마지막 단계까지 진화된 쉘비 코브라의 디자인입니다.

수많은 레플리카들, 
코브라라불릴 수 없어

코브라 전문점이다 보니, 미국 쉘비가 만든 정통 쉘비 코브라 이외에도 다양한 레플리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특히 사진 속 코브라는 슈퍼포먼스(Superformance)가 만든 코브라로서 원형과 거의 유사하지만 4각 튜브 프레임을 사용해 만든 것입니다.

엔진의 기본 규격 등은 같고 성능면에서는 더 나은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코브라라는 브랜드는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레플리카들의 신세인데요. 엔진 부품의 한쪽에 슈퍼포먼스사의 로고가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모 업체도 비공식적으로는 코브라라는 브랜드를 사용하는 듯 한데, 팩토리 5 라는 미국 레플리카 업체가 만든 제품인 만큼 코브라라는 단어를 모델 이름으로 써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머스탱을 베이스로 하는
 오리지널 쉘비 GT500

쉘비는 코브라를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업체는 아니고, 레이싱 및 튜닝을 전문으로 하는 브랜드였습니다. 주로 포드 차를 바탕으로 하는 여러 튜닝을 했는데, 이날 포드 머스탱을 바탕으로 튜닝한 오리지널 쉘비 GT500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쉘비의 명성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머스탱의 외관을 쉘비 GT500으로 꾸민다거나, 일부 같은 규격의 엔진을 얹어 기계적 부분을 튜닝까지 하곤 하지만, 이렇게 오리지널 쉘비 GT500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캐롤 쉘비의 여러 차를 보면서 자동차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자동차에 대한 생각과 철학을 함께 공유하며 공감하는 수요가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튜닝 문화도 그렇게 발전해 가기를 기대합니다.

글 김주용(엔터테크 대표, 인제스피디움 클래식카박물관 관장)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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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심으로 일군 세계 최초의 기아차, 기아자동차 브랜드 히스토리(4)

프라이드 국산 최초의 승용차 브리사 단종 이후 위기를 맞은 기아는 ‘원박스카’ 봉고로 승부수를 던져 기사회생했다. 1986년, 정부의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가 풀리면서 기아산업은 다시 승용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1990년 사명을 ‘기아자동차’로 바꿨고, 네 가지 카드를 차례차례 꺼내들었다. 프라이드와 콩코드, 스포티지, 세피아 등 차세대 승용차 라인업이다.

프라이드

1987년 기아와 포드, 마쓰다 등 3개 자동차 제조사가 새로운 소형차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주인공은 기아 최초의 해치백, 프라이드. 합작 프로젝트가 낳은 글로벌 전략 소형차로, 세 회사의 장점을 모아 개발비용은 줄이되 시너지는 극대화했다. 마쓰다는 설계를 맡고, 생산은 기아, 판매는 포드가 책임졌다. 기아에겐 봉고 뒤를 잇는 새 주역이었다. 3개 회사는 각자 전략적으로 업무를 분담했다. 가령 소형차 제조기술 뛰어난 마쓰다가 ‘DA’ 플랫폼과 직렬 4기통 엔진을 개발했다. 포드는 전 세계에 걸친 판매조직을 갖췄다. 대량생산 능력도 가장 뛰어났는데, 문제는 비용이었다. 기아가 이 판에 낄 수 있었던 배경이다.

프라이드 신문 광고

물론 브리사와 봉고 사례를 통해 우수한 제조 실력을 인정받은 결과였기도 했다.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포드로서는 미 정부의 ‘일본차 대미수출 자율규제’를 피할 묘안이기도 했다. 덕분에 기아는 포드에 페스티바란 이름으로 이 차를 공급했다. 합작 프로젝트의 결실은 알찼다. 차체는 현대차 엑셀보다 200㎏ 이상 가벼웠다. 그 결과 1.3L 엔진을 얹고도 대관령 고갯마루를 거뜬히 넘었다. 공인연비도 수동 기준 17㎞/L로 뛰어났다. 또한, ‘DA’ 플랫폼은 강성이 제법 높았다. 마쓰다는 이 골격으로 데미오 등을 만들며 16년 동안 활용했고, 포드는 토러스의 V6 3.0L 가솔린 엔진을 얹고 0→시속 100㎞ 가속을 4초대에 끊는 핫 해치를 만들었을 정도다. 국내 소비자의 평가도 긍정적이었다. 뛰어난 차체 강성과 작은 몸집 덕분에 굽잇길에서 운전하는 재미가 기대 이상 쏠쏠했으니까.

프라이드

기아차의 첫 중형세단, 콩코드

하지만 프라이드 홀로 경쟁사에 대항할 순 없었다. 이미 현대와 대우는 중‧대형 세단 앞세워 국내 승용차 시장을 양분하다시피 했다. 기아는 세단 라인업을 보강하기 위해 마쓰다에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당시 기아가 점찍은 차종은 마쓰다 626(카펠라). 1970년부터 마쓰다가 생산한 중형세단으로, 포드는 이 차를 텔레스타란 이름으로 판매한 바 있다. 기아는 3세대 마쓰다 626을 라이선스 생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다만 안팎 디자인을 소폭 다듬었다. 그 결실이 콩코드로, 국내 최초의 앞바퀴 굴림(FF) 세단이었다. 뒷바퀴 굴림(FR) 방식인 현대 쏘나타, 대우 로얄 프린스와 뚜렷이 차별화했다.

콩코드

차체 길이와 너비, 높이는 각각 4,550×1,705×1,405㎜로 브리사보단 크되 경쟁 중형세단보단 작았다. 콩코드는 직렬 4기통 2.0L 가솔린 SOHC 엔진을 품었다. 5단 수동 또는 4단 자동변속기와 맞물려 최고출력 99마력을 냈다. 국내 중형차 최초로 전자제어식 연료분사 시스템을 갖춰 높은 효율을 뽐냈다. 이듬해 1.8L 가솔린 및 LPG 엔진을 더해 1988년 서울올림픽에 투입할 택시에 얹었고, 2.0L 디젤 엔진을 마련해 중형 디젤차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프라이드처럼 탄탄한 섀시도 콩코드의 매력을 높이는 데 한 몫 했다. 또한, 앞뒤에 맥퍼슨 스트럿 서스펜션을 넣어 쏘나타보다 주행성능이 뛰어났다. 덕분에 콩코드는 경주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1991년엔 길이를 늘이고, 2.0L DOHC 엔진을 얹은 뉴 콩코드를 선보였다. 그러나 경쟁차보다 작은 차체 때문에 쏘나타와 로얄 프린스의 판매량을 넘진 못 했다.

콩코드 후기형

콩코드 광고

국내 최초의 소형 SUV, 스포티지

페스티바(프라이드)의 성공 이후 포드는 두 번째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SUV는 트럭 섀시에 차체 얹은 사륜구동차가 대세였다. 반면 포드가 준비하던 코드네임 ‘UW-52’는 오늘날 인기 뜨거운 소형 SUV였다. 포드의 뛰어난 상품기획력을 엿볼 단서였다. 포드는 기아에게 “연간 15만 대 생산해 10만 대를 공급해 달라”고 제안했다. 연간 생산대수가 20만 대도 안 됐던 기아에겐 솔깃한 제안이었다. 조건이 붙었다. 포드는 기아의 지분 50%를 요구했다. 기아는 발끈하자 포드는 공장을 별도 법인화한 뒤 그 주식 절반을 달라고 했다. 결국 합작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스포티지

기아는 청사진으로나마 엿본 소형 SUV를 직접 개발하기로 마음먹는다. 코드네임 ‘NB-7’의 스포티지 프로젝트다. 기아는 1991년 도쿄모터쇼에서 스포티지 콘셉트카를 선보였다. 세계 최초의 승용형 SUV로, 기아는 양산에 앞서 파리-다카르 랠리에 출전시켜 완주에 성공했다.

다카르랠리에 출전한 스포티지

스포티지는 1993년 정식 데뷔했다. 이후 토요타 RAV4(1994년)와 혼다 CR-V(1995년), 랜드로버 프리랜더(1997년)가 나왔다. 정작 포드는 2000년에서야 이스케이프로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스포티지는 강력한 험로주행 실력만큼 남다른 안전성도 지녔다. 세계 최초로 챙긴 무릎 에어백이 대표적이다. 보디 온 프레임 방식을 쓰되 뒤 차축에 판스프링 대신 코일 스프링을 끼웠다. 또한, 지상고를 낮춰 승하차가 편했고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었다. 2002년 단종할 때까지 국내에서 약 9만 대, 해외에서 약 45만 대가 팔리며 기아의 주역으로 우뚝 섰다.

스포티지 컨버터블

기아의 첫 독자개발 승용차, 세피아

콩코드와 캐피탈 이후 기아는 새로운 세단 개발에 나섰다. 밑바탕으로는 마쓰다 323을 골랐다. 그러나 위기감을 느낀 마쓰다가 공급을 거절하면서 결국 기아는 ‘홀로서기’에 나섰다. 스포티지의 개발 과정에서 얻은 노하우를 바탕 삼아 처음부터 온전히 자체적으로 설계하기로 결정했다. 총 개발비용은 5,300억 원. 세피아 프로젝트가 싹튼 순간이었다.

세피아

세피아란 이름은 ‘Style Economy Power Hi-tech Ideal Auto’의 앞 글자를 따서 지었다. 안팎 디자인은 물론 골격까지 기아가 개발했다. 1992년 나온 첫 모델엔 마쓰다의 직렬 4기통 1.5L 가솔린 엔진, 1997년 선보인 세피아Ⅱ엔 기아가 독자 개발한 1.8L 가솔린 T8D 심장을 얹었다. 당시 세피아의 라이벌은 현대 엘란트라와 대우 에스페로였다. ‘기술의 기아’답게 세피아는 동급에서 주행성능이 가장 뛰어났다.

 

고회전까지 맹렬히 돌릴 수 있는 1.5L 엔진과 튼튼한 차체 강성이 매력이었다. 일례로, 1995년엔 1세대 카레이서 박정룡이 월드 랠리 챔피언십(WRC) 호주 대회에 세피아로 출전해 비개조부문 우승을 차지했다. 시장 반응 또한 폭발적이었다. 출시 후 12개월 만에 10만 대 판매를 달성했다. 캐피탈로 겪은 부진을 완벽히 씻어낸 셈이다. 특히 뉴 세피아는 최고출력 139마력을 뿜었고, 최고속도는 시속 196㎞로 국내 시장에서 ‘동급최강’이었다. 아쉽게도 양산까진 이르지 못했지만, 기아는 도쿄모터쇼에 세피아 컨버터블까지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세피아 후기형

1997년엔 2세대 세피아를 앞세워 현대 아반떼, 대우 누비라 등과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이처럼 1980~1990년대의 기아는 열정적이었다.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 등 숱한 위기를 ‘기술’로 극복하며 국내 자동차 산업을 이끌었다. 1995년엔 ‘기아의 역작’ 중형차 크레도스를 선보이며 소형-준중형-중형-SUV-미니밴 등의 탄탄한 승용 라인업을 갖췄다. 크레도스 개발로 맺은 로터스와 인연은 엘란 생산, 로버와 엔진 공동개발로 이어졌다.(5부에서 계속)

 

글/강준기(로드테스트) 사진/기아자동차

 

*참고문헌 : <자동차 문화에 시동걸기|황순하>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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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말, 그동안 미국에서 전혀 볼 수 없던 모습의 새로운 차가 캐나다 온타리오에 있는 크라이슬러 공장의 최종 조립라인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에는 플리머스 보이저, 나머지 차들에는 닷지 캐러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소화물 운반을 비롯해 상용으로 주로 쓰이던 밴과 비슷한 모습이면서도, 일반 밴에 비해 작은 크기에 실내에는 6~7명이 탈 수 있는 좌석이 들어찬 이 차를 가리켜 사람들은 미니밴이라고 불렀다.

1983년 말에 선보인 미국의 첫 미니밴, 플리머스 보이저

이 낯선 장르의 차가 소비자들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한 번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미니밴은 순식간에 미국 주요 도시 외곽 주택단지의 차고를 점령해 나갔다. 그런 흐름은 1990년대 내내 이어졌고, 미국에서 차를 파는 거의 모든 브랜드가 크고 작은 미니밴을 쏟아냈다. 인기가 절정이던 2000년에 미국 소비자들이 산 미니밴은 약 133만 대에 이르렀다. 전체 승용차 판매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를 조금 넘긴 정도였지만,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장르의 차는 당당히 시장의 주류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1984년 유럽에 선보인 미니밴, 르노 에스파스

시장 규모가 큰 다른 지역에서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에서 크라이슬러가 첫 미니밴을 선보인 직후인 1984년, 프랑스에서는 르노가 첫 유럽식 미니밴인 에스파스를 출시했다. 에스파스에 대한 유럽 소비자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초반 판매는 부진했지만, 오래지 않아 유럽 시장에는 미니밴 열풍이 몰아쳤다. 일본에서는 그보다 조금 이른 1982년에 닛산이 프레이리를 내놓으며 일본식 미니밴 시대가 열렸다. 미국이나 유럽과는 다른 접근방식으로 만들어졌을 뿐, 일본식 미니밴도 역할과 성장과정은 비슷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베이비 붐 세대가 도래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미니밴이라는 장르가 등장해 붐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이른바 ‘베이비 붐 세대’라고 부르는 소비자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로, 20여 년 남짓한 시기에 걸쳐 세계 주요 지역에서는 경제발전과 전후복구가 활발했다. 그와 더불어 출산율이 크게 높아지며 인구도 크게 늘었다.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대거 가정을 꾸리기 시작한 시기가 1970~1990년대 중반이었다.

자동차는 베이비 붐 세대들의 필수품이었다

비록 석유파동과 같은 걸림돌이 있기는 했지만, 베이비 붐 세대는 전반적으로 물질적 풍요와 경제적 안정을 누렸다. 그와 더불어 교육과 생활수준이 높아졌고, 생활환경과 양식도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생활필수품이 된 자동차를 고르는 기준에도 달라진 라이프스타일이 반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가족과 함께 움직이며 소비와 여가에 더 편리하게 쓸 수 있는 차를 원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그런 사람들에게 미니밴은 더없이 편리하게 다가갔다.

폭스바겐 타입 2 마이크로버스

단순히 차 크기에 비해 공간 효율이 높은 차는 미니밴이 등장하기 전에도 있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이미 1940년대 후반부터 상자형 차체의 다인승 차들이 다양하게 나왔다. DKW 슈넬라스터를 필두로 마이크로버스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폭스바겐 타입 2, 피아트 물티플라, 시트로엥 타입 H, 르노 에스타페트 등을 유럽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1960년대 들어서는 일본에서도 스바루 삼바, 스즈키 캐리, 다이하츠 하이제트와 같은 이른바 ‘원박스카’가 속속 등장했다.

1세대 플리머스 보이저와 형제차인 닷지 캐러밴

그러나 그런 차들은 대부분 상용 목적으로 개발되었고, 승용 성격의 차들도 사실상 미니버스 개념에 가까웠다. 1960년대 미국 히피 문화에 편입된 폭스바겐 타입 2가 유명세를 떨쳤을 뿐, 대부분 자동차 시장이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나온 미니밴은 승용차의 차체 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어,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승용차처럼 ‘차고에 넣을 수 있는 다목적차’라는 개념부터 온전히 베이비 붐 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했고, 그들의 요구를 채우기에 충분했다. 미니밴이 시대와 세대를 엮는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다.


1세대 카니발

우리나라에서는 미니밴이 조금 늦게 빛을 보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을 겪은 탓에 베이비 붐이 10년 남짓 늦게 시작했고, 경제 발전에 따른 자동차 보급도 1980년대 중반 이후로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일본식 미니밴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고, 1998년에 기아차가 정통 미국식 미니밴인 카니발을 내놓으면서 우리나라의 미니밴 시대가 활짝 열릴 수 있었다.

1세대 카니발

왜건의 지붕을 높여 공간효율을 조금 높인 수준에 머물렀던 일본식 미니밴과 달리, 카니발은 승용차 플랫폼을 바탕으로 했으면서도 처음부터 거주성에 초점을 맞췄다. 1열부터 3열 좌석까지 평평하게 이어지는 바닥, 차체 양쪽에 단 대형 슬라이딩 도어, 안락한 독립식 2열 좌석을 갖춰, 국내 소비자들도 미니밴의 편리함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었다.

2세대 그랜드 카니발

국내 법규와 시장 환경을 반영해 1세대 카니발은 9인승 모델, 2세대 그랜드 카니발은 11인승 모델이 주력이었지만, 부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돋보인 여러 장점은 카니발을 국내 승용차 시장에서 탄탄히 자리를 잡고 스테디셀러로 명맥을 이을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아울러 카니발은 2001년부터 미니밴의 고향이라 할 미국 시장에 수출되기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 판매되고 있다.

크라이슬러 퍼시피카

세월이 흘러, 지금은 베이비 붐 세대가 노년에 접어들고 있고, 그들이 미니밴을 맞이했던 나이대는 X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차지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사회와 환경도 바뀌었고, 미니밴의 상황도 전성기 때와는 사뭇 다르다. 지난해 미국에서 판매된 미니밴은 48만 대가 조금 넘었다. 전성기 때의 1/3 수준이며, 승용차 시장 점유율은 2.5%로 낮아졌다. 

미국에서 판매 중인 카니발(현지명 세도나)

판매 감소와 더불어 여러 브랜드가 미니밴 시장에서 발을 빼면서 현재 미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미니밴 모델 수는 다섯 가지로 줄었다. 이미 미국 빅 스리 가운데 GM과 포드가 2000년대 중반에 손을 뗐고, 적극적으로 시장에 뛰어들었던 일본 브랜드도 이제는 두 곳만 미니밴 시장에 남아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기아 카니발(수출명 세도나)이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카니발은 미국에서 선택할 수 있는 5개 미니밴 중 하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에도 여전히 미니밴의 절대적인 판매량은 무시할 수 없다. 다만 미니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그리고 미니밴의 이미지와 활용방식이 과거와 달라졌을 뿐이다. 1990년대 미국에서는 미니밴을 자녀와 친구들의 통학과 방과 후 활동에 활용하는 ‘사커 맘(soccer mom)’의 차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지금은 미니밴이 그런 용도로 널리 쓰이지도 않고, 그렇게 쓰려는 사람도 많지 않다.

카니발 하이리무진

국내 브랜드가 만들어 국내 시장에 팔고 있는 유일한 미국식 미니밴인 기아 카니발도 마찬가지다. 베이비 붐 세대의 나이대가 미국이나 유럽보다 낮은 우리나라에서는 여유 있는 가족용 차로 미니밴을 찾는 사람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유명 인사나 기업체의 의전용 차라는 이미지도 강해지고 있다. 

SUV 모하비와 미니밴 카니발

물론, 이전까지 미니밴이 하던 역할을 지금은 SUV가 넘겨받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SUV도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면서, 미니밴의 특징과 장점들을 참고해 꾸준히 개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조적인 한계 때문에 SUV가 미니밴을 따라 하기 어려운 특성들은 분명히 있다. 넉넉한 공간 구성과 승하차 편의성, 자유로운 좌석 조절 및 배치 기능 등 기능적 특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SUV가 특유의 형태를 유지하는 한, 승차감과 주행특성에서 미니밴만큼 안정감을 느끼기는 어렵다.

웨이모는 미니밴 퍼시피카를 자율주행 테스트카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기술 발전이 미니밴의 쓰임새에도 변화를 주리라는 예측을 하는 사람도 있다. 자율주행 기술의 발전과 공유 모빌리티 개념의 결합이 새로운 미니밴의 중흥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구글의 자회사인 웨이모는 크라이슬러의 미니밴인 퍼시피카를 자율주행 기술 개발과 시험에 활용하고 있다. 자율주행 기술이 발전해 무인 택시가 실제로 구현된다면, 미니밴은 가장 이상적인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타다의 주력 모델인 카니발

출처타다

자율주행 실현에 앞서, 새로운 형식의 모빌리티 서비스로 각광받고 있는 라이드 헤일링(차량 호출 이용)이나 라이드 셰어링(승차 공유 또는 합승)에 쓰기에도 미니밴은 안성맞춤이다. 국내에서도 타다를 비롯해 소비자 중심의 이동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여러 업체가 가장 선호하는 장르의 차도 기아 카니발 같은 미니밴이다. 한마디로 여러 사람이 타고 내리고 이동하기에는 미니밴만큼 좋은 장르의 차가 드물다.

미니밴은 앞으로 어떻게 변신할까?

전성기만큼 높은 인기를 누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니밴의 장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미니밴 역시 사회와 환경의 변화에 발맞춰 꾸준히 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니밴은 다가올 미래에 과연 어떤 기술과 매력을 담아 우리의 생활을 더 편리하고 즐겁게 해 줄까?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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