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우체부 :: '자동차역사' 카테고리의 글 목록 (5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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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SUV'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람보르기니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되어주고 있는 차가 있다. 바로 '우루스(Urus)'다. 람보르기니 우루스는 람보르기니의 슈퍼카를 크로스오버로 번역한 듯한, 강렬한 인상의 외관 및 실내 디자인과 더불어, 막강한 성능의 파워트레인과 사륜구동 시스템으로 주목 받으며 SUV의 전성시대인 오늘날, 람보르기니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기능하고 있다.

하지만 우루스는 람보르기니 최초의 SUV가 아니다. 최초의 '크로스오버'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람보르기니 우루스는 기반 설계부터 전통적인 방식의 SUV와는 거리가 먼, 현대식의 크로스오버형 차량에 훨씬 가깝다. 그렇다면, 람보르기니 최초의 SUV는 과연 어떤 차인가? 람보르기니가 만든 최초의 SUV는 개발 목표부터 남달랐다. 람보르기니가 독자적으로 진행했던 이 프로젝트는 전 세계의 험지를 누비는 '미 육군'의 발이 되는 것을 목표로 개발된 '정통파' SUV였다. 이 차의 이름은 'LM002'다.

'미군의 발'을 목표로 만들어지다
람보르기니 LM002는 최초기형 개발 당시부터 미 육군을 위한 기동차량으로 설계된 진정한 정통파 SUV였다. 정통파 SUV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지프(Jeep)'가 군용의 기동차량에서 출발했다는 점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정통 중의 정통이라고 할 수 있다. 람보르기니 LM002는 이 당시 만들어졌던 여러 바리에이션 중 민수용으로 제작된 차량으로, 정확히는 'LM 시리즈'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람보르기니 LM 시리즈의 역사는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냉전의 긴장이 한껏 고조되었던 70년대 당시는 방산 분야에서는 매우 크고도 다양한 사업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미 육군이 그 동안 사용했던 지프들을 대신하는 새로운 기동차량을 선정하는 '고기동성 다목적 차량(High Mobility Multipurpose Wheeled Vehicle, HMMWV)'사업이었다.

미군은 나날이 첨단화, 전문화되어가고 있었던 자국의 지상군에 대해 보다 '안전'하면서도 확실한 기동성을 보장 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그 동안 사용해 왔던 지프들에 있었다. 뛰어난 험로돌파능력과 생산성을 우선해 짧은 차체와 높은 최저지상고를 가졌던 탓에, 전복사고가 심심치 않게 벌어졌고, 이로 인한 비전투 손실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전반적인 장비의 노후화까지 겹쳐, 교체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에 미군은 신규 차량을 선정하는 고기동성 다목적 차량 사업이 진행되면서 미국 내의 여러 회사에서 시제차량을 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모빌리티 테크놀로지 인터내셔널(Mobility Technology International, 이하 MTI)'이라는 회사에서 제안한 설계안과 시제차량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MTI가 람보르기니와의 설계 분야에서의 협업을 추진하면서 람보르기니 최초 SUV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람보르기니는 BMW의 슈퍼카 M1의 설계용역 계약을 따내면서 획득한 자금으로 이 사업에 뛰어 들었다.

코드네임 '치타(Cheetah)'로 개발되고 있었던 이 차량은 기본적으로 픽업트럭에 가까운 차체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미국의 고기동성 다목적차량 사업에서 요구한 형태로, 기존의 지프 대비, 한층 긴 전장과 휠베이스, 그리고 낮은 무게중심을 구현해 전복의 위험을 최소화하면서도 높은 험로 돌파능력을 모두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개발된 람보르기니 치타는 1977년 3월,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되며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익명의 중동 부호들에게 주문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람보르기니 치타는 최초 개발 당시에는 최고출력 180마력의 크라이슬러 5.9리터 V8 엔진을 사용했다. 여기에 운전수 1명과 중무장한 보병 4명이 충분히 탑승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으며, 다양한 무장과 장갑 키트, 그리고 통신장비를 적재할 수 있었다. 람보르기니 치타에는 TOW 대전차미사일과 미군이 사용하는 무반동총, 소구경 로켓발사기, 중기관총 등의 무장을 탑재할 수 있었으며, 정찰 차량이나 지휘차량, 전투 지원차량 등, 다양한 형태로 활용이 가능한, 군용 차량으로서의 범용성도 갖추었다.

하지만 이 차는 미군의 발이 된다는 당초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이는 '메이드 인 USA', 즉, 자국산에 집착하는 미군의 성향 탓이 아닌, 차량 자체의 근본적인 문제에 있었다. 미군이 요구하는 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군은 디젤 엔진을 원하고 있었는데, 가솔린 엔진을 탑재하고 있었고, 변속기 또한 수동변속기를 사용했다.

게다가 180마력의 크라이슬러 V8 엔진은 장비중량 2톤 남짓의 치타를 움직이기에는 동력성능이 부족했고, 차량의 후방에 무거운 엔진을 탑재한 탓에, 조종성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미군은 이 차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이 차를 테스트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업을 통해 채용된 신형 기동차량이 그 유명한 AM 제너럴의 '험비(Humvee)'다.

치타의 미군 도입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이 차를 설계했던 MTI사는 다른 기업에 합병되어 버렸고, BMW는 이전에 람보르기니에 의뢰했던 설계용역 계약을 파기해버렸다. 이에 람보르기니는 졸지에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든 되살리려는 궁리를 했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었던 '초호화 SUV'라는 개념으로 이 차를 어떻게든 완성해 판매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람보르기니 LM 시리즈의 첫 차, LM001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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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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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한국판 유니목으로 활약

 지금의 기아자동차가 있기까지는 몇 차례의 변곡점이 있었다. 그 중 1980년대 초에 있었던 봉고 신화는 현대차그룹의 인수만큼이나 중요했던 순간으로 꼽힌다. 당시 봉고 신화로 재기에 성공한 기아차는 소형 트럭 다변화의 일환으로 농업 종사자를 위한 보급형 트럭 출시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물이 '세레스(Ceres)'다.

 세레스는 1983년 등장했다. 세레스의 핵심은 당시 300만원 대의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는 전천후 트럭이었다. 세레스는 봉고를 기반으로 지상고를 높이고 앞뒤 범퍼를 치켜 올려 험로주파력이 강한 체격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차명은 로마 신화 속 농경의 여신인 세레스에서 가져왔다. 농업용 트럭 이름으로 제격이라는 판단이다.

자동차 히스토리갤러리 이동

세레스 초기형


 외관은 봉고보다 작다. 농어촌의 좁은 골목길에서 기동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각진 차체와 사각형 커버에 담은 원형 헤드램프, 껑충한 차체는 세레스의 상징이었다. 지붕은 방수포로 덮어 원가를 줄였다. 1988년에 이르러서야 철판 지붕의 하드탑이 출시됐다.

 실내는 이동, 수송의 용도에 집중한 나머지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편의품목은 라디오가 유일했다. 파워 스티어링 휠, 파워 윈도우 등은 사치였다. 계기판은 속도계와 연료계, 수온계, 방향지시 정도만 표시했다. 싱글 캡에는 3명이 탈 수 있었다. 적재함에는 그늘막과 역방향 벤치를 설치해 3명이 더 앉을 수 있었다.

 엔진은 2.2ℓ 디젤을 탑재해 최고 60마력, 최대 14.5㎏·m를 발휘했다. 지금 1t 트럭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낮은 수치이지만 차체가 가볍고 동력 손실이 적어 성능이 턱없이 모자라진 않았다. 구조가 간결해 정비도 쉬웠다. 구동계는 뒷바퀴굴림 방식을 채택했다. 1986년이 돼서야 소비자 요구를 반영한 4WD가 출시됐다. 기계식 트랜스퍼 케이스를 장착한 4WD는 세레스를 진짜 전천후 트럭으로 만들어줬다.

세레스 중기형


 세레스는 '한국판 유니목'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4WD 외에도 다양한 기능을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동력 인출 장치(Power Take Off) 때문이다. 양수, 탈곡, 분무 등 농기계만이 할 수 있었던 작업을 도로와 논밭을 자유룹게 오갔던 세레스도 할 수 있었던 것. 덕분에 세레스는 해외 시장에서도 은근히 잘 나갔다. 특히 중동과 남미, 아프리카 등에 적지 않게 판매됐다. 섀시는 카고, 덤프 두 가지를 얹었지만 탱크로리, 소방차 등의 특장도 주문할 수 있었다.

 1992년 기아차는 세레스의 부분변경을 단행했다. 사각형 헤드램프와 그릴 장식을 더한 전면부가 특징이다. 안전성 향상을 위해 적재함에 있던 벤치는 없앴다. 1996년에는 최고 80마력의 2.4ℓ 디젤 엔진을 얹었다. 배출가스 규제인 유로2에 대응하기 위함이다. 세레스는 새 엔진과 함께 편의성 향상 추세에 따라 파워 스티어링 휠, 에어컨 등의 품목을 더했다. 부드러운 인상을 연출한 새 원형 헤드램프도 특징이었다.

 그러나 1997년 한국 IMF 외환 위기가 터지면서 기아차의 형세도 기울어졌다. 결국 기아차는 현대차에 인수되면서 대대적인 제품군 정리에 나서야 했다. 1999년 세레스는 엘란, 파크타운과 함께 라인업에서 사라졌다. 새 배출가스 규제인 유로3에 대응하기 어려웠고 봉고보다 작은 체구가 안전상 문제가 된 탓도 컸다. 이후 기아차의 1t 4WD 트럭 계보는 프론티어, 봉고3가 이어 나갔다.

세레스 후기형 덤프


 세레스는 비교적 최근 단종해 국내에서도 적지 않게 운행되고 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현재(2020년 10월 기준) 국내에 돌아다니는 세레스는 1만7,311대에 이른다. 한편으로는 캠핑용 오프로더와 리스토어를 원하는 사람에게 또 다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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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30여년 전많은 소년들의 방에 포스터로 붙어있던 차가 있다바로 람보르기니의 디아블로. 1990 1월 출시된 디아블로는 어느덧 출시 30주년을 맞이했다

글 조현규 수습기자 사진 | 오토모빌리 람보르기니

 

람보르기니의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모델 중 하나인 디아블로의 이야기는 1985년부터 시작한다기존 람보르기니 제품군의 최상위에 위치해있던 쿤타치(Countach)를 대체할 목적으로 Project 132라는 코드명과 함께 개발이 시작됐다람보르기니 특유의 쐐기형태의 깔끔하면서도 공격적인 라인은 디자이너 마르첼로 간디니의 작품이다.

 

 

첫 출시부터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디아블로는 공식적으로 최고 시속 325km를 낼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차 중 하나였다디아블로는 5.7리터에 4개의 오버 헤드 캠축 및 하나의 실린더에 4개의 밸브를 갖춘 람보르기니의 V12 엔진을 운전석 뒤에 장착했다덕분에 최고 출력 485마력에 최대 토크 59.1kg.m라는 당시 기준으로는 무시무시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어로 악마라는 뜻을 가진 디아블로는 그 이름에 걸맞게 다루기도 어려웠다앞서 말한 저 높은 출력을 오로지 뒷바퀴에만 전달했다심지어 1993년 모델까진 운전 보조 장치나 파워스티어링 조차 장착되지 않았다.

 

 

1993년 람보르기니는 4륜 구동을 장착한 디아블로VT를 출시하며 출력 개선과 약간의 디자인 변화를 거쳤다또한 같은 해에 람보르기니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며 최고 출력을 523마력까지 올린 스페셜 에디션 SE30이 출시됐다.

 

 

1995년 제네바 모터쇼에서는 디아블로 SV가 데뷔했는데 SV Super Veloce의 약자로 한글로 번역하면 매우 빠름이라는 직관적이고 당당한 네이밍을 사용했다디아블로 SV는 최고 출력 510마력을 뒷 바퀴로만 전달했으며탈착이 가능한 지붕이 장착됐다같은 해 12월에는 디아블로 VT 로드스터가 출시됐다람보르기니 최초의 12기통 오픈톱 람보르기니는 약간의 디자인 변경과 함께 4륜 구동 모델만 출시했다.

 

 

1999년 아우디 그룹이 람보르기니를 크라이슬러로부터 인수했다그리고 람보르기니 최초의 사내 디자이너이며 현재 현대자동차의 CCO인 루크 동커볼케가 디자인한 디아블로 SV의 후기형 모델이 공개됐다그리고 VT VT 로드스터 모델 또한 후기형 모델을 출시하며 외부 디자인을 다듬었다. 특히 가장 큰 변화는 팝업 라이트가 보행자 충돌 시 더 위험하다는 안전규정으로 인해 사라졌다는 점이다.

 

 

후기형의 최고 출력은 529마력에 61.7kg.m의 최대 토크를 가지고 있었다여기에 가변 밸브 리프트 시스템과 람보르기니 최초의 ABS 브레이크를 장착한 모델이 됐다. 2001년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가 출시되기 직전까지 디아블로는 총 2903대가 판매됐으며이는 당시 람보르기니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자동차였다.

 

 

이제는 클래식카의 반열에 올라버린 람보르기니 디아블로는 분명 시대를 풍미했던 자동차다. V12 엔진낮고 넓은 차체막강한 성능까지소년들의 방을 장식하기에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자동차였다그리고 그때 포스터로 람보르기니를 가지는 꿈을 꾸던 소년들 중 누군가는 람보르기니를 가지는 꿈을 이루지 않았을까솔직히 말하자면부럽다!

 

자동차 전문 잡지 <모터매거진>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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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를 대표하는 우리나라 자동차 중 하나로 현대 스텔라는 빼놓을 수 없는 차가 아닌가 싶습니다.

코티나, 마크 4, 마크 5 등 중형급 모델을 포드로부터 기술도입 생산하던 현대자동차는 1983년에 스텔라를 통해 본격적으로 독자 디자인 중형 세단 시대를 열게 되었고, 로얄 시리즈로 중형차 시장에서 철옹성과 같았던 대우자동차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스텔라는 지금까지도 국민차의 하나로 사랑받는 쏘나타의 첫 세대 모델(Y1)에 바탕이 되기도 했죠.

포니와 함께 북미 시장인 캐나다에까지 수출되면서 자동차 산업을 수출의 첨병으로 성장할 수 있는 비즈니스로 만들어 준 모델이기도 한 자동차가 바로 이 스텔라인데요. 이렇게 현대자동차의 스텔라는 우리도 독자적인 중형차를 개발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긍지를 가지게 하며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귀중한 자동차 아닌가 합니다.

최근 라라클래식이 컬렉션에 추가한 89년식 스텔라는 스텔라 88등과는 다르게 헤드램프에 검은색 베젤이 있는 타입입니다. 포니나 스텔라 등 중에서도 캐나다 수출형 차들에서 볼 수 있었던 디자인이죠.

 

초기형 스텔라는 쥬지아로의 디자인 그대로 유선형 범퍼를 달고 있었는데요. 전방 충돌에 대비해 5마일 범퍼가 적용되어야 하는 등, 국제적 안전 기준이 높아지면서 수출형 차에 적용하기 위해 디자인한 각지고 두툼한 범퍼가 모든 스텔라에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차는 스텔라 GX라는 서브 모델명이 붙어 있는데요. 정확히 고증한 것은 아닙니다만 'Global eXport'의 약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포니 2 CX와 스텔라 CXL의 CX가 'Canada eXport'의 머릿글자였으니 말이죠. 

기존에 현대차가 만들던 중형차인 코티나의 플랫폼을 베이스로 하고 기본적 시스템은 포니의 것을 바탕으로 삼았지만, 새로운 중형차답게 여러 실내 편의장치는 당시로써는 호화롭기까지 했습니다. 디지털 시계는 물론 엔진 회전수를 표시하는 태코미터, 에어컨, 파워 윈도, 고성능 카스테레오까지 있었죠.

지금은 대부분의 자동차에 기본 사항이지만, 손으로 돌려 창문을 열고 내리던 시절에 자동으로 작동하는 파워 윈도, 오토도어록 기능이 있다는 것은 고급차를 상징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자동차에 직물 시트가 기본이었는데요. 포니에는 없었던 뒷좌석 센터 암레스트가 중형차로서 스텔라의 위상을 이야기해 줍니다.

 

후속 모델인 소나타/쏘나타가 본격 출시되면서 고급 중형차로서 스텔라의 위상은 한풀 꺾였지만, 택시 시장에서는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1997년까지 계속 생산되기도 했습니다. 

자동차 말소제도 등의 불합리함 때문에 우리나라는 오래된 차들을 장시간 보존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건강한 상태로 남아있는 스텔라는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요. 우리나라의 중형차 역사를 다시 쓴 현대 스텔라를 지금도 많은 클래식카 마니아들이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순정 휠이 없어지고 실내 여러 곳도 추가로 순정 상태로 돌려 놓을 부분이 있습니다만, 현대 스텔라가 가진 한국 자동차 산업에서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며 라라클래식 컬렉션의 하나로 소중하게 복원하고 관리할 예정입니다.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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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라이선스 생산을 주로 하던 이전과 달리 차를 독자 개발하고 활발하게 수출하는 등, 한국 자동차 산업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일들이 펼쳐지고 있었죠.

특히, 현대 포니 2의 후속으로 개발된 엑셀과 프레스토는 한국 자동차로서는 미국시장에 처음 진출하며 한국 자동차 산업이 급격한 발전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도 했는데요.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 역사에서 첫 독자 모델인 포니는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하지만, 엑셀과 프레스토 역시 중요성이 상당하다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라라클래식이 보유하고 있는 국산 올드카 중 하나인 현대 프레스토에 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현대 프레스토는 포니 2의 뒤를 이어 1985년에 출시되었습니다. 포니 2와 동일한 해치백 형태의 차체에 4도어와 2도어인 엑셀과 엑셀 스포티와 함께 생산된 세단형 자동차로 우리나라에서는 별도로 이름을 붙여 프레스토라 칭하였고, 해외에는 엑셀 4도어 세단으로 수출했습니다.

 

엔진이 앞에 있고 구동축은 뒤에 있는 FR 레이아웃 밖에 없었던 국내 승용차에 FF 방식(앞 엔진 앞바퀴 굴림 방식)을 처음 소개하기도 했고, 도어 프레임이 A필러와 루프의 위까지 올라가는 풀 도어 시스템을 처음 시도한 차이기도 합니다. 

 

엔진은 1.3L, 1.5L 등이 있었는데요. 현대가 차는 독자적으로 개발했지만 엔진까지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준은 아니어서, 미츠비시 엔진 설계를 받아 국내에서 라이선스 생산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현대자동차와 함께 여러 디자인 작업을 했던 이탈디자인의 주지아로가 디자인을 맡았고, 그 덕분에 외부 디자인은 물론 실내 여러 요소의 디자인 테마는 기존 포니는 물론 당시 주지아로의 디자인을 채택했던 여러 다른 메이커의 모델들과 비슷했습니다. 

엔진 회전계와 속도계, 몇 가지의 경고 램프 정도가 있는 단순한 기능의 계기판 좌우에 배치된 열선 스위치나 에어컨 스위치는 당시의 콕핏형 계기판 디자인 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운전자의 시점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여러 스위치를 조작할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주지아로의 디자인에서 자주 발견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보기 어려운 레버식 공기 조절장치, 그리고 이퀄라이저까지 오디오 한쪽에 배치되어 있는 순정 카세트 플레이어는 올드카와 클래식카 마니아를 즐겁게 해 줍니다. 스티어링 컬럼 오른쪽에는 실내 램프의 조도를 조절하는 스위치와 간헐식 와이퍼의 속도를 조절하는 스위치가 함께 달려 있습니다.

운전석과 조수석 옆 유리는 파워 윈도가 적용되어 있고, 그 스위치는 기어 레버 뒤쪽에 있는데요. 뒷문에 달린 유리에는 파워 윈도가 적용되지 않아, 손으로 돌려 열어야 합니다. 당시만 해도 이런 파워 윈도 시스템은 고급차에나 적용되는 고급 장비면서 첨단 시스템이기도 했습니다.

대시보드 상단에 있는 이 디지털 시계는 포니 2 시절부터 이어져 오는 주지아로의 특징적인 디자인인데요. 포니 2에서는 시계가 삽입되는 위치만 있었을 뿐 실제 시계는 장착되지 않았지만, 프레스토와 엑셀로 오면서 기본 사항이 되었습니다.

엑셀과 프레스토에서 가장 불편했던 부분은 바로 시트의 등받이 각도를 조절하는 시트 리클라이닝 레버였습니다. 현대의 다른 모델들처럼 레버를 당겨 바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돌려 시트의 각도를 조절해야 했는데요. 당시 이 프레스토를 오랫동안 소유했던 적이 있지만, 늘 불편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초기에 출시되었던 엑셀이나 프레스토와는 달리 이 차에는 미국 시장에 수출하기 위한 5마일 범퍼 등의 개선 사항이 적용되었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AMX(AMerican Export의 약자)라는 엠블럼이 붙어 있기도 한데요. 1988년에는 휠과 라디에이터 그릴 등을 특별하게 디자인한 한정 모델 '올림픽 에디션'이 출시되기도 하는 등, 엑셀과 프레스토는 당시 현대자동차가 핵심차종으로서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인 차라고 하겠습니다.

2000년대가 되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자동차 산업의 주변국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외국의 앞선 기술을 가진 메이커가 생산하던 차의 도면과 설비를 전달받아 라이선스 생산을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죠. 지금의 현대자동차나 기아자동차 등 우리나라 자동차 메이커들의 발전된 모습에서는 과거의 이런 초라한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던 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을 주변국가가 아닌 중심국가로 만든 커다란 초석을 놓은 것이 바로 이 현대 프레스토, 그리고 엑셀이 아닌가 싶습니다. 앞으로도 현대자동차나 기아자동차, 그리고 우리나라의 자동차 업계에 속한 모든 기업의 지속적 발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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