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로 누비는 슈퍼컴퓨터
모든 지형의 슈퍼컴퓨터. 랜드로버는 올 뉴(이후 신형) 디펜더를 이렇게 정의했다. 랜드로버에서 디펜더는 구형과 신형 모두 내구성의 상징. 그렇다고 힘만 장사인 ‘무식쟁이’로 오해해선 곤란하다. 오히려 IT 기술의 결정체다. 무선으로 업데이트하는 인포테인먼트 시스템부터 차세대 전기 아키텍처까지 자동차 최신 기술 트렌드를 오롯이 투영한 주역이다.
운전자가 이 모든 기술과 만나는 접점은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인 ‘피비 프로(Pivi Pro)’. 센터페시아의 10인치 터치스크린으로 각종 정보 띄우고 운전자의 지시를 읽는다. 기존 ‘인컨트롤 터치 프로’의 후속 개념이다. ‘피비’는 다른 랜드로버에도 있는데, 신형 디펜더의 시스템이 가장 스마트하다. 예컨대 터치스크린으로 기능에 접근하는 단계를 절반까지 줄였다.
랜드로버에 따르면 피비는 특정 문구나 단어의 머리말이 아니다. 별 의미도 없다. 짧고 분명하며 외우기 좋아 고른 이름이다. 피비 프로는 기존 피비에 교통상황, 충전소 이용현황 등 실시간 정보 업데이트 기능을 더한 강화판. 듀얼 모뎀을 갖춰 두 대의 스마트 폰과 동시에 연결할 수 있다. 또한, 강력한 프로세서를 기반으로 한층 짧은 반응 시간을 자랑한다.
아울러 피비 프로는 자체 내장 배터리를 갖췄다. 따라서 시동 버튼 눌러 전원을 켠 뒤 시스템 부팅부터 내비게이션 초기화까지 단 몇 초 내로 해치운다. 요즘 유행인 무선기기 충전과 애플 카플레이, 안드로이드 오토는 당연히 기본. 특히 내비게이션이 똑똑하다. 학습 알고리즘과 동적안내로 경로를 최적화하고, 무선 업데이트로 최신 버전의 지도를 유지한다.
디펜더의 최신 피비 프로는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치른 ‘CES 2020’에서 데뷔했다. 진화의 핵심은 ‘실시간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이후 SOTA: Software-Over-The-Air)’. 퀄컴이 2016년 선보인 ‘스냅드래곤 820Am’과 ‘X12’를 쓰는 듀얼 eSIM과 모뎀을 갖췄다. 기반이 될 운영체제는 과거 쿼티 자판 휴대폰으로 유명한 블랙베리의 ‘QNX’다.
통합 제어 소프트웨어
“2020년 우리 신차는 바퀴 달린 스마트 폰으로 변신해 있을 거예요.” 지난 2016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당시 폭스바겐 그룹 CEO 마틴 빈터콘의 말이다. 디젤 게이트로 기소될 자신의 운명(?)은 예상 못했지만, 그의 예언은 현실로 거듭나고 있다. 자동차와 컴퓨터의 공통분모가 빠르게 늘고 있다. 스마트 폰은 휴대전화 속으로 PC가 들어간 경우다.
이제 자동차가 그 유행에 합류 중이다. 이 같은 변화를 함축할 키워드는 ‘디지털화’, 궁극적 목표는 자율주행이다. 신형 디펜더는 자동차와 IT 산업이 어떻게 융합 중인지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다. 랜드로버와 재규어를 통틀어 처음으로 ‘통합 운영체제(이후 OS: Operating System)’를 쓴다. 애플의 iOS와 구글의 안드로이드를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OS는 하드웨어를 제어하고 응용 프로그램의 원활한 작동을 위한 기반 환경을 제공한다. 기존엔 파워 윈도, 공조장치, 에어백, 인젝터 등 각 기능별로 두뇌 격인 ‘전자제어유닛(이후 ECU)’과 OS를 갖췄다. 요즘 자동차 한 대에 들어가는 ECU는 웬만한 PC방 이상으로 많다. 게다가 빠르게 늘고 있다. 따라서 각각의 유닛을 통합해 제어할 OS가 필요해졌다.
디펜더에선 ‘QNX’가 이 역할을 맡는다. 지난 7월, 블랙베리는 “QNX 소프트웨어를 내장한 자동차가 1억7,500만 대를 넘었다”고 밝혔다. QNX는 ‘첨단운전자지원시스템(ADAS)’, 인포테인먼트, 보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 중이다. 블랙베리 CEO 존 첸은 “차량의 전기 아키텍처가 ‘하드웨어 중심’에서 ‘소프트웨어 정의’로 진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전 아우디 회장 루퍼트 슈타들러가 공동저자로 참여한 단행본 <자율주행>에 따르면, 최근 나오는 자동차의 소프트웨어 코드는 이미 1억 줄이 넘는다. 현존하는 최강의 전투기로 손꼽히는 F22 랩터는 500만 줄, 페이스북이 대략 6,000만 줄 정도라고 한다. 지금까지처럼 부품 공급사마다 다른 ECU와 OS를 섞어 소화할 수준의 복잡성을 한참 넘어선 셈이다.
자연스럽고 은밀한 기술
조선일보 최원석 기자는 뉴스레터 ‘디코드’를 통해 “자동차 업계가 OS의 중요성에 눈 뜬 계기는 테슬라였다”고 설명한다.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만으로 다른 제품 되는 경험을 스마트폰에서 자동차로 확장한 선구자로, 현재 ECU와 OS 모두 직접 개발한다. 또한, ‘풀 셀프 드라이빙(FSD)’ 옵션을 선택하지 않아도, 이를 구현할 성능의 ECU를 기본으로 갖춘다.
실제로 당장 필요한 이상의 스펙을 미리 갖추는 개념으로, IT 업계에선 ‘OP(Over-Provisioning)’라고 정의한다. 테슬라가 주도면밀하게 진행해온 디지털화의 실체는 메르세데스-벤츠가 모델3을 해체해 분석하며 널리 알려졌다. 방심한 사이 발등에 불 떨어진 기존 자동차 제조사는 강력한 ECU(반도체)와 효율적인 OS(소프트웨어)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그 결과 자동차 제조사와 IT 기업의 짝짓기가 줄을 잇고 있다. 자사 시스템에 맞게 개발한 반도체를 공급받고, 자체 소프트웨어 개발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엔비디아, BMW는 인텔 산하의 모빌아이, 폭스바겐과 토요타는 일본 르네사스와 손잡았다. 신형 디펜더의 경우 반도체는 퀄컴, OS는 블랙베리, 피비 프로는 LG전자가 파트너다.
언뜻 ‘오프로드의 제왕’ 디펜더와 자율주행은 어울리지 않는 한 쌍. 그러나 주행보조 및 안전, 다른 기기와 연결성을 위해 디지털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신형 디펜더는 ‘플렉스레이’ 통신망을 갖춰 85개 ECU가 주고받는 1만3,000~2만1,000개 메시지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 또한, 최대 14개 전자제어 모듈이 ‘SOTA’를 통해 스스로 업그레이드한다.
디지털화의 혜택은 오너 몫이다. 신형 디펜더는 조작에 번개 같이 화답하고, 원격 제어가 가능하다. 최대 170만 화소 카메라 6대, 초음파 센서 12개, 레이더 4개로 주변을 파악하고, 클리어 사이트 뷰로 시야를 확장하며 헤드업 디스플레이로 정보를 꽂아준다. 게다가 지금까지 소개한 내용을 전혀 몰라도 될 만큼 쓰기 쉽고 자연스럽다. 이런 게 기술의 힘이다.
글 김기범 편집장(ceo@roadtest.kr)
사진 랜드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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