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우체부 :: '모터스포츠' 카테고리의 글 목록 (24 Page)

달력

5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챔프카는 팀이 직접 머신을 만들지 않고 섀시나 엔진, 타이어를 제작회사에서 구입해 그것들을 적절하게 세팅시켜 경기에 출전하면 된다. 이는 경주차 개발 투자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코스워스와 경주차 한 대당 100만 달러의 엔진 공급계약을 맺고 페이노즈로부터 30만 달러에 섀시를 구입한다. 타이어는 연간 20만 달러, 기어박스는 13만 달러의 비용을 지불한다

챔프카 월드 시리즈는 F1 그랑프리, 인디 레이싱 리그(IRL)와 함께 지구촌 포뮬러카 레이스의 정상주자로 꼽힌다. 최근 미국에서 유럽과 아시아로 발을 뻗고 있는 챔프카 월드 시리즈는 비록 지난해 무산되었지만 우리나라의 경기도 안산에서도 유치계약을 맺은 적이 있다. 또한 2001년에 실베스터 스탤론이 주연한 영화 ‘드리븐’으로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자동차 경주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챔프카’라는 이름은 F1에 비해 아직 낯선 게 사실.
챔프카는 원래 챔피언 오토 레이싱 팀즈(CART)사가 운영하는 포뮬러 머신의 이름으로, 대회 공식 명칭은 챔프카 월드 시리즈다. 이 대회의 특징은 F1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일부 서킷에서 관중들에게 더 빠른 속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 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 비밀은 F1과는 다른 머신의 제작 과정에 있다. F1에서는 규정상 팀마다 섀시를 직접 만들어 써야 한다. 그 때문에 팀을 컨스트럭터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팀의 재정상태에 따라 머신의 수준이 달라져 경쟁력에서 큰 차이가 난다.
반면 챔프카는 팀이 직접 머신을 만들지 않고 단지 조립을 할 뿐이다. 규정상 팀 자체적인 머신제작을 허가하지만 대체로 섀시나 엔진은 제작회사에서 구입하거나 빌려오므로, 팀은 그것들을 적절하게 세팅시켜 경기에 출전하면 된다. 이는 직접적인 경주차 개발 투자비용을 상대적으로 줄이는 효과가 있다.

엔진(Engine)
F1 그랑프리가 르노, 벤츠, BMW, 페라리, 토요타, 혼다 등 여러 자동차 메이커의 각축장인 데 반해 챔프카 대회는 포드 한 곳에서만 엔진을 공급한다. 이 엔진은 영국 코스워스가 만든 제품이다. 코스워스는 포드와 함께 DFV라는 걸출한 엔진을 만들어 F1에서 엔진 부문 통산 최다우승을 기록한 전문회사다. J. 빌르너브와 N. 만셀, 그리고 M. 안드레티가 챔프카에서 포드 엔진을 빛낸 드라이버들이다.
챔프카 월드 시리즈 참가팀들은 코스워스와 100만 달러(약 9억2,700만 원)의 엔진 공급계약을 맺는데 1,200마일(약 1,930km) 정도 쓰면 무상으로 교체한다. 1년간 레이스를 펼칠 수 있는 충분한 거리다.

섀시(Chassis)
챔프카 머신이 F1과 다른 또 하나의 특징은 섀시다. 챔프카는 경주차의 몸통 자체가 다운포스 효과를 내는 그라운드 이펙트 카다. 차 바닥이 비행기 날개처럼 약간 둥글게 만들어져 있다. 그라운드 이펙트 카는 본래 F1팀이 개발했으나 코너 진입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 위험하다는 이유로 정작 F1에서는 금지되어 있다. F1은 바닥을 평평하게 만드는 플랫 보텀(F1at Bottom) 섀시를 의무화하고 있다.
이 때문에 챔프카에서는 공기역학적인 디자인에 많은 자금을 투자하지 않고도 뛰어난 다운포스 효과를 얻고 있다. 챔프카의 섀시는 지난해까지 영국의 경주차 전문회사인 롤라가 45만 달러(약 4억1,715만 원) 수준으로 팀 전체에 공급하고 있다. 한 단계 아랫급 모델은 25만∼30만 달러(약 2억3,175만∼2억7,810만 원)에 공급된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3년간 페이노즈가 새 챔프카 섀시 단독공급자가 되었다. 현행 롤라 섀시가 낡은 데다 부품마저 시즌 끝까지 간신히 뒷받침할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이노즈는 롤라보다 제작비도 훨씬 싸다. 초기 추산에 따르면 공급가는 롤라보다 35% 밑돌고 예비 부품값도 절반으로 떨어진다. 따라서 올 시즌 팀들은 섀시 한 대에 약 30만 달러(약 2억7,810만 원)와 부대비용을 쓰면 된다.

타이어(Tyres)
엔진과 섀시 이외에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는 타이어다. 챔프카 타이어 역시 지난 2002년부터 일본의 브리지스톤이 독점 공급하고 있다. 브리지스톤은 올 시즌부터 라이벌 미쉐린이 불참해 F1에도 단독 공급하게 되었다. IRL 경주차에는 브리지스톤 자회사인 파이어스톤 타이어를 끼운다. 따라서 F1, 챔프카, 인디카 모두 브리지스톤/파이어스톤의 독점체제로 운영되는 셈이다.
챔프카는 F1과 달리 표면에 아무런 홈이 없는 슬릭 타이어를 쓴다. 규정상 경기에 따라 28∼48개의 타이어를 신을 수 있다. 이 때문에 브리지스톤은 8일간의 의무 테스트를 거쳐 팀이 한 해 동안 소요될 타이어 수량을 계산해 공급한다. 팀들은 경주차 한 대당 연간 20만 달러(약 1억8,540만 원)의 타이어 비용을 브리지스톤에 지불한다.

기어박스(Gearbox)
트랜스미션은 F1 머신 반자동 전진 7단, 챔프카와 IRL은 전진 6단 시퀀셜 방식을 쓴다. F1 머신은 스티어링 휠 뒤에 달린 패들을 당겨 변속하고, 챔프카와 인디카는 앞뒤로만 움직이는 기어레버를 사용한다. 챔프카 기어박스의 경우 팀들은 연간 13만 달러(약 1억2,051만 원)에 구입한다.

총 예산(Overall Budget)
현재 챔프카 월드 시리즈에서는 뉴먼하스, 러스포트, 포사이스, CTE, 데일코인, 마이잭, 오스트레일리아, PKE, HVM, 로켓레이싱 등 10개 팀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재정상태에 따라 팀마다 차이가 있지만 연간 800만 달러(약 74억1,600만 원) 가량의 운용비용이 든다. 사고에 의한 파손이나 여러 가지 부품들의 소모 정도에 따라 50만 달러(약 4억6,350만 원) 가량 추가된다. 결국 경주차 한 대당 400만 달러(약 37억800만 원)가 드는 셈이다. 여기에는 드라이버의 연봉(200만∼300만 달러)과 팀원 연봉(50∼100명) 등이 포함된 것이다.
뉴먼하스는 최근 3년간 해마다 한 대당 700만 달러(약 64억8,900만 원)씩 투자해 2004∼2006년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지난 2005년 시즌에 대당 290만 달러(약 26억8,830만 원)를 들여 종합 7위(A. 타글리아니)에 그치자 이듬해 800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하지만 W. 파워와 A. 타글리아니는 종합 6, 8위를 기록해 희비가 엇갈렸다. 흔히들 자동차 경주는 투자하는 만큼 성적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많은 자금을 쏟아 부을수록 성적이 좋아진다는 이야기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팀의 사례로 볼 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한편 F1 페라리의 경우 약 3,400만 달러(약 315억1,800만 원)의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해 챔프카팀과 큰 차이를 보였다. F1은 두 대의 머신으로 운영되므로 경주차 한 대당 약 1,700만 달러(157억5,900만 원)가 들어 챔프카와 두 배 가량 차이 난다.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
서키트 레이스가 시작된 1995년, 에버랜드 스피드웨이는 현대 스쿠프와 기아 콩코드가 점령했다. 이듬해 등장한 티뷰론은 기아차와 대우차를 밀어내고 국내 레이스의 주연으로 올라서서 오랫동안 활약했다. 2000년 GT 클래스가 도입되고, 2002년에는 투스카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GT2 클래스도 생겼다. 도요타 IS200, BMW 318i, 혼다 인테그라 등 수입 경주차도 뛰어들어 국내 모터스포츠는 새로운 경쟁구도를 잡아가고 있다

1995년 국내에서 서키트 레이스가 처음 시작될 때만 해도 경주차의 성능은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많았다. 직선주로 약 400m에 급코너가 10여 개나 되는 테크니컬 코스인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는 엔진 성능보다는 서스펜션과 브레이크 세팅이 성적을 좌우했다.
당시 톱 클래스였던 투어링A에는 현대 스쿠프 터보와 기아 콩코드가 유력한 우승후보였다. 초기 스쿠프 터보는 드라이버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값이 싸고 기본 메커니즘이 레이스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차체가 낮아 고속 코너링 때 무게 중심의 변화가 작고, 터보가 달려 동급 엔진보다 출력을 10% 높일 수 있는 것도 매력이었다. 배기량에서 앞선 콩코드 2.0 DOHC는 출력과 토크가 큰데다 서스펜션이 안정되어 개막전 우승을 차지하는 등 큰 활약을 보였다.

수입 경주차 투입으로 판도 변화 예상되어
1995년 개막전 투어링A 출전자 25명 중 20명이 선택했던 스쿠프는 이듬해 티뷰론에 자리를 내주었다. 티뷰론은 96년 투어링A 최종전의 16대 중 8대를 차지하면서 국내 투어링카 레이스의 주연으로 떠올랐다. 기아는 스페셜 팩으로 무장한 세피아 1.8을 데뷔시켰다. 하지만 티뷰론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97년 기아는 크레도스로 다시 티뷰론에 정면도전했으나 티뷰론의 압도적인 승리를 막지 못했다. 드라이버들은 너도나도 티뷰론으로 바꿔 탔고, 97년 최종전은 티뷰론만 달리는 원메이크가 되어 버렸다.
98년 중반 기아는 슈마 2.0을 투입했다. 슈마는 표창대에 오르며 가능성을 인정받았지만 티뷰론을 누르기에는 여전히 버거웠다. 슈마는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99 시즌 3승을 챙기는 성과를 거두었다
반면 대우는 98년에 누비라2 해치백을 내보냈으나 티뷰론과 슈마의 그늘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대우는 1.6ℓ DOHC 엔진의 라노스 로미오로 투어링B 사냥에 만족해야 했다.
2000년의 최대 화두는 250마력의 GT카. 시리즈 초반에는 경주차 트러블로 인해 피니시를 못하고 전멸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경기가 진행되면서 안정을 되찾았고, 경주차의 완성도도 높아졌다. 2002년 서키트에 새로운 차종이 등장했다. 현대는 티뷰론을 잇는 스포츠 쿠페 투스카니를 2001년 말에 발표하고, 이듬해 GT1에 투입했다. 한동안 불안한 세팅으로 힘겨워 했지만 이내 방향을 찾고 선두를 달리게 되었다.
올해 스피드웨이에는 수입차가 잇따라 도전장을 내밀었다. 과거에도 BMW와 닛산차가 스피드웨이를 달린 적이 있지만 이번에 수입차 메이커들이 지원자로 나서 그 모습이 새롭다.제3전부터 렉서스 IS200이 GT2 클래스에 이름을 올렸고, BMW 318i와 혼다 인테그라가 최고 클래스 GT1에서 투스카니와의 승부를 준비하고 있다. 수입 경주차들은 몸 만들기가 끝나지 않은 탓에 성능을 발휘하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 하지만 기본 성능이 좋은데다 수입차 메이커들이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어 내년에는 투어링카 레이스의 판도가 다시 짜여질 것으로 예상된다.

GT1

터주대감 투스카니 vs 용병 BMW의 대결
GT챔피언십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경주차는 GT1 클래스에서 달리는 현대 투스카니다. 일본 GT300을 본보기로 2000년 만들어진 GT 클래스에는 현대 티뷰론 터뷸런스가 첫 타자로 올라왔다. 2년 후 개조범위에 따라 GT1, 2로 분리되고 GT1에 투스카니가 데뷔했다.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
F1 세계에서 지난 57년 동안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모터스포츠 팬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감동적인 스토리도 많았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불미스런 일도 적지 않았다. 지난해까지 치러진 771회 그랑프리 중 팬들의 관심을 끌었던 10개 대회의 순간들을 영화 작품 소개형식으로 구성했다
글·김병헌 차장 사진

Scene1
제7전 독일 GP
제작연도 1957년 8월 4일
무대 뉘르부르크링 서킷
주연 M. 호손, J.M. 판지오
조연 P. 콜린스
관람 포인트 레이스 중반 1코너 사우스 커브에서 펼쳐진 3대의 경주차 대결

예선 1위 J.M. 판지오는 본선에서 스타트가 순조롭지 않아 M. 호손과 P. 콜린스의 뒤로 처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첫 바퀴에서 자신이 1년 전에 작성한 뉘르부르크링 서킷 코스 레코드 9분 41초 6을 7초 가량 단축시키면서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3랩에서는 선두까지 앞질러 버렸다. 그는 연료보충과 타이어 교환을 위한 피트스톱 작전도 미리 짰다.
페라리 드라이버들은 계속 달릴 듯했다. 총 22랩을 달리는 독일 GP에서 판지오는 11랩째 2위보다 27.8초 앞서 있었다. 피트스톱을 하고도 선두를 탈환하는 데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일은 생각대로 안 될 때가 더 많은 법. 피트 작업이 늦어져 무려 1분을 허비했다. 판지오에게 승리의 여신은 등을 돌린 듯했다. 그는 트랙으로 돌아온 후 몇 랩째 숨을 고르며 달렸다.
레이스가 종반에 접어들면서 판지오의 스피드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한참 앞에서 달리고 있는 호손과 콜린스의 랩타임보다 8∼9초 앞선 기록이 나왔다. 관중들은 역사적인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레이스에 몰입했다. 페라리 머신들이 눈에 들어오자 그랜드스탠드의 관객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수십m 뒤에 판지오가 나타났기 때문. 코스 레코드는 9분 17초 4. 관중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2대의 페라리와 1대의 마세라티가 굉음을 울리며 스탠드 앞을 지나간 후 첫 번째 사우스 커브에서 판지오는 콜린스의 트랜스미션 뒤에 코를 붙이고 있었다. 순간 코너를 돌면서 판지오의 경주차가 코스를 벗어나는 듯했다. 안쪽으로 파고든 판지오는 흙을 밟았고, 잔돌이 튀어 올라 콜린스의 고글을 깨뜨렸다. 호손은 그들보다 앞서 달리고 있었지만 맹렬하게 쫓아오는 판지오를 보고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마지막 랩을 맞이한 후 트랙을 반쯤 돌았을 때 판지오는 페라리 머신들을 뒤로 제치고 당당히 앞서 나갔다. 그리고 레이스는 막을 내렸다. 그날 판지오는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레이스를 펼쳤고,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다섯 번째 월드 챔피언에 오른 날이기도 했다.

Scene2
제4전 프랑스 GP
제작연도 1961년 7월 2일
무대 랭스 서킷
주연 G. 바게티, D. 거니
조연 J. 보니어
관람 포인트 피니시 라인 100m 가량 남긴 지점에서 슬립스트림 주법으로 역전승

레이스가 시작되자 P. 힐과 W. 폰 트립스가 선두에 서서 대열을 이끌었다. 둘은 부담 없이 앞장서서 달렸고, 뒤따르는 R. 긴더에게는 S. 모스를 방어하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모스는 페라리 소속이 아닌 드라이버로는 유일하게 우승권에 들었다. 잠시 후 모스가 긴더를 제치고 3위에 올랐지만 그 이상의 성적은 힘들어 보였다. 관중의 시선은 5위 다툼에 모아졌다. J. 클라크, I. 아일랜드, G. 힐, G. 바게티 등이 꼬리를 물고 달렸다. 누구 하나가 실수를 하면 모두가 엉켜 버릴 것 같은 숨막히는 상황이었다.
바게티가 버겁게 경주차들을 헤치고 5위로 올라섰을 때 선두권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우선 폰 트립스는 경주차의 라디에이터에 구멍이 나 피트에 오래 머무르는 바람에 우승권에서 멀어졌다. 몇 랩 뒤에 힐이 헤어핀에서 스핀 후 트랙에 복귀하다가 모스와 부딪쳤다. 다행히 경주차에 큰 피해가 없어 10위 자리에 복귀했다. 선두를 달리던 긴더의 경주차는 엔진오일을 모두 태우고 정지했다.
페라리 군단이 전멸하고 비공식적으로 출전한 바게티만 남았다. 바게티는 챔피언십과 관계없는 시라큐스 레이스에서 페라리 156의 잠재력을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경험 많은 포르쉐 드라이버 D. 거니와 J. 보니어에 맞서 당당히 싸우고 있었다. 결국 바게티가 우승하며 페라리는 명예를 지켰다.
당시 <오토스포트> 기자였던 G. 그랜트는 그 때의 긴박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마지막랩 틸로이 커브에서 거니가 약간 앞서 나가더니 결승선을 약 100m 남긴 지점에서 거니 뒤에 붙어 있던 바게티가 슬립스트림 주법으로 가속을 살려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습니다."

Scene3
제9전 이태리 GP
제작연도 1971년 9월 5일
무대 몬자 서킷
주연 P. 게틴, R. 피터슨, F. 세베르,
M. 해일우드
조연 H. 갠리
관람 포인트 최종랩 마지막 코너에서 승부수 던진 P. 게틴

레이스 리더는 쉴새 없이 바뀌고 또 바뀌었다. 10여 대가 뭉친 선두 그룹에서 누가 우승할지 점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7랩을 남겨둔 상황에서 운명의 여신은 선두 C. 아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헬멧의 바이저에 붙였다가 더러워지면 제거하는 비닐커버를 떼어내는 순간 바이저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아몬은 거센 바람 때문에 앞을 잘 볼 수 없어 선두를 내어 주고 말았다.
그때 게틴은 선두그룹의 뒤에서 달리고 있었다. 선두에 피터슨이 서고 바로 뒤에 세베르, 해일우드, 게틴이 기차놀이하듯 가까이 붙어 달렸다. 이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종착역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레이스가 막바지로 치달으며 경쟁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서킷 중간쯤 있는 레스모 코너에서 세베르가 피터슨을 추월, 선두로 올라섰다. 게틴 역시 해일우드를 제치고 3위가 되었다. 그들은 마지막 코너인 파라볼리카로 몰려들었다.
게틴은 마지막 코너에서 결판을 내기로 마음먹었다. 무모한 방법이지만 2위인 피터슨을 추월하기 위해 풀밭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스핀하지 않고 피터슨을 추월했다. 그러나 파라볼리카를 돌아 나가기에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뒤늦게 풀브레이킹을 시도했으나 타이어에서 연기를 내며 미끄러졌다. 양 옆에서는 세베르와 피터슨이 접촉을 피하며 코너를 돌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결국 게틴, 피터슨, 세베르, 해일우드, 갠리가 피니시라인을 무리지어 통과했다. 우승자 게틴과 5위 갠리가 결승선을 통과한 시차는 0.61초에 지나지 않았다. 1위 게틴과 2위 피터슨의 시차는 0.01초.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간발의 차다. 이 기록은 F1 역사상 가장 짧은 1, 2위간 시차로 남아 있다.

Scene4
제9전 영국 GP
제작연도 1973년 7월 14일
무대 실버스톤 서킷
주연 P. 레브슨, R. 페테르손
조연 D. 흄
관람 포인트 중반전부터 펼친 4대의 머신의 숨막히는 레이스

R. 페테르손, J 헌트, D. 흄, P. 레브슨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1973년 영국 GP는 맥라렌-포드를 몬 레브슨의 첫 승 무대였다. 선두 레브슨과 2위 페테르손의 시차는 2.8초. 1∼4위 드라이버가 거의 동시에 피니시 라인을 통과해 실버스톤 서킷을 찾은 관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경기를 앞두고 도박사들은 71년 월드 챔피언 J. 스튜어트에게 돈을 걸었다. 그러나 미국 드라이버 P. 레브슨은 자신에게 100파운드를 걸었다. R. 피터슨이 28대의 경주차 대열을 이끈 레이스 초반에 참극이 벌어질 뻔했다. 제1주가 끝날 무렵 맥라렌의 젊은 기사 J. 쉑터가 사고를 일으켰기 때문.
재출발에서 로터스의 페테르손이 N. 라우다, J. 스튜어트, E. 피티팔디, 흄과 레브슨을 앞질렀다. 30주 가량 남긴 상황에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페테르손이 고전했다. 2주가 지나지 않아 레브슨이 앞질러 나갔다. 선두를 잡았으나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2위 이하 드라이버들과의 시차는 겨우 1∼2초 밖에 나지 않았다. 바로 뒤에서는 페테르손, 흄, 헌트가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후 몇 차례 순위 변화가 있었다.
최종랩 마지막 코너에서 2∼4위 트리오는 한 덩어리로 보였다. 페테르손이 밖으로 나갔다가 쉑터의 사고를 재현하는 아찔한 장면을 연출했다. 흄이 페테르손의 실수를 이용하려고 안쪽을 파고들었다. 헌트는 듀오를 앞지르려고 덤볐다. 하지만 페테르손, 흄, 헌트는 아슬아슬한 시차로 순위를 지켰다. 헌트와 흄은 0.4초, 페테르손과 흄은 0.2초 차이였다. 선두 레브슨은 겨우 2.8초 차이로 표창대 정상을 밟았다.

Scene5
제3전 남아공 GP
제작연도 1978년 3월 4일
무대 키알라미 서킷
주연 R. 페테르손, P. 드파예
조연 J. 와트손
관람 포인트 5년 만에 첫 승을 노리는 드파예와 페테르손의 추격전

폴포지션은 브라함의 N. 라우다가 차지했으나 같은 열에 섰던 로터스의 M. 안드레티가 번개 같은 스타트로 앞서 나갔다. 그러나 L. 쉑터, R. 파트레제 순으로 선두가 바뀌었다. 다음 타자는 P. 드파예. 2위 그룹과 상당한 거리를 띄운 채 선두를 유지했다. R. 페테르손은 트랜스미션 이상으로 6열에서 출발했다. 주목할 만한 실력을 보이면서 침착하게 6위까지 올랐지만 우승을 바라보기는 힘들었다. 팀동료 M. 안드레티가 완벽하게 회복된 로터스로 드파예를 밀어붙여 또다시 선두탈환에 성공했다. 그러나 안드레티의 엔진 역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경주차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연료를 너무 아낀 탓이다.
하지만 로터스는 우승을 포기하지 않았다. 페테르손은 아직도 꾸준히 달리는 반면 드파예의 경주차는 연기를 길게 뿜으며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마지막랩, 페테르손은 흔들림 없는 추격을 계속했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드파예가 데뷔 5년 만에 첫 승을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페테르손이 역전극을 펼쳐 부활의 노래를 부를 것인가에 모아졌다.
눈 깜짝할 사이 페테르손은 드파예의 오른쪽 꼬리를 무는가 싶더니 휠을 부딪치며 승리를 향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코너에 접어들면서 티렐 경주차가 옆으로 조금 흔들렸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끼어 든 검은색 로터스는 불과 0.466초 차이로 체커기를 먼저 받았다. 페테르손은 이 경기에서 부활의 신화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같은 해 이태리 GP에서의 스타트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Scene6
제2전 포르투갈 GP
제작연도 1985년 4월 21일
무대 에스토릴 서킷
주연 A. 세나
조연 A. 프로스트, M. 알보레토
관람 포인트 A. 세나의 팀 동료 E. 데안젤리스의 화려한 교란작전

폴포지션은 세나가 잡았다. 숨막히게 아름다운 드라마를 연출하는 예선 질주는 뒷날 그의 상표로 통했다
스타트와 함께 선두에 나서 뒤차와의 간격을 벌려나갔다. 서킷에는 쉬지 않고 폭우가 쏟아졌다. 하지만 A. 세나는 전혀 흔들림 없이 매끈한 달리기를 이어갔다. 뒤따르는 라이벌들은 여기저기서 미끄러지고 충돌했다. 번들거리는 검정 로터스에 살짝 솟아오른 노란 형광 헬멧은 세나의 타이어가 일으킨 구름 같은 물보라에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머지않아 그의 상표가 된 노란 헬멧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끌어주듯 까다로운 서킷을 유연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그의 속도가 아니었다. 그 속도에 도달하는 그의 테크닉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나중에 그가 지적한 순간 이외에는 실수를 하는 기미마저 보이지 않았다.
세나 뒤에서는 불꽃 튀는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로터스팀 동료 E. 데안젤리스는 맥라렌의 A. 프로스트와 페라리의 M. 알보레토를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치열한 접전으로 경기 조건이 얼마나 험악했던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세나의 테크닉은 더욱 빛났다. 중반에 접어들어 프로스트는 데안젤리스의 교란작전에 분통이 터졌다. 그러다가 피트 앞의 직선코스에서 물웅덩이를 쳤다. 당장 수막현상이 일어나 머신이 미끄러졌다. 당시 수중전의 명수로 통하던 프로스트는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가며 장벽을 들이받았다.
경기 2시간이 지나 67주(68주 예정)에 피니시 체커기가 나왔다. 데뷔 후 첫 승리를 눈앞에 두고 세나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빗속에서 상반신을 들어올리고 두 팔을 번쩍 든 채 피니시라인을 돌파했다. 세나는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했다.
“위험천만이었다. 뒤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때는 프로스트처럼 직선코스에서 스핀할 뻔했다. 84년 모나코보다 격렬한 수중전이었다”

Scene7
제16전 호주 GP
제작연도 1986년 10월 26일
무대 애들레이드 서킷
주연 N. 피켓, A. 프로스트
조연 N. 만셀
관람 포인트 N. 만셀의 머신 트러블로 프로스트와 피켓 경쟁으로 좁혀진 종반의 혈투

1986년 F1 그랑프리에서 85년도 챔프 맥라렌 포르쉐팀의 알랭 프로스트가 연속 우승했다. 최다 득점팀에게 주는 컨스트럭터즈 타이틀은 윌리엄즈 혼다가 차지했다. 호주 그랑프리에서 프로스트는 1위로 시즌 4승째를 기록하면서 72점으로 윌리엄즈 혼다팀의 나이젤 만셀을 2점차로 누르고 연속 우승했다. 2년 연속 우승은 1959∼60년의 잭 브라밤 이후 21년 만의 일이다.
1986년 F1 레이스는 예상대로 윌리엄즈 혼다팀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 진행되었다. 컨스트럭터즈 챔피언은 일찌감치 윌리엄즈 혼다팀의 차지가 되었으나 드라이버 챔피언은 윌리엄즈 혼다의 나이젤 만셀과 넬슨 피켓, 맥라렌 TAG 포르쉐의 알랭 프로스트가 치열한 3파전을 벌여왔다. 최종전을 앞둔 세 드라이버의 종합 유효 득점은 만셀 70점(우승 5회), 프로스트 64점(우승 3회), 피켓 63점(우승 4회)으로 만셀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이었다. 프로스트나 피켓이 우승해도 만셀은 3위 입상으로 4점만 더하면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
레이스는 1위 입상으로 9점(2위는 6점)을 얻어야 역전 우승이 가능한 프로스트와 피켓의 수위 다툼으로 시작되었다. 느긋한 만셀은 시종 3, 4번째로 달렸다. 그러나 행운은 85년 챔피언 프로스트에게 돌아갔다. 총 82주(1주 3.28km) 레이스에서 종반에 접어든 64주째에서 만셀의 경주차는 타이어가 터져 아깝게 레이스를 중단, 점수를 얻을 수 없게 되어 첫 우승의 꿈이 날아갔다.
그 뒤 레이스는 프로스트, 피켓의 종합우승을 건 볼만한 경주가 되었다. 연속 우승을 노리는 프로스트, 81년과 83년 우승(그 당시 브라밤팀 소속)에 이어 세 번째 챔피언을 노리는 피켓의 볼만한 선두다툼은 마지막까지 이어졌으나 프로스트가 82주 309.878km를 1시간 54분 20초 388(평균시속 162.609km)로 피켓을 4.205초 앞서 1위로 골인했다.

Scene8
제17전 유럽 GP
제작연도 1997년 10월 26일
무대 스페인 제레즈 서킷
주연 M. 슈마허, J. 빌르너브
조연 D. 쿨사드
관람 포인트 48랩에서 일어난 M. 슈마허와 J. 빌르너브의 충돌사고

유럽 그랑프리는 95전 만에 첫 우승을 차지한 M. 하키넨보다 2년 만에 드라이버즈 왕좌에 도전한 슈마허와 빌르너브의 충돌이 관심을 모았다. 47주에 선두를 달리던 슈마허가 48주에 들어와 뒤집기를 시도하는 빌르너브를 들이받았다. 당시 상황을 되짚어 보면 48주째 드라이삭 헤어핀에서 선두 슈마허의 인사이드를 빌르너브가 파고들었다. 약 600m의 짧은 직선코스를 가속으로 추격하는 빌르너브. 왠지 인사이드를 비운 채 코너에 들어가던 페라리의 품으로 윌리엄즈가 뛰어든 것이다. 순간 슈마허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우발접촉? 고의충돌? 두 머신이 접촉하기 전부터 슈마허의 페이스가 0.2초씩 처졌다. 빌르너브는 2주 전 단번에 1.6초까지 시차를 압축. 그때 과연 슈마허가 빌르너브를 따돌릴 여력이 있었을까? 아무튼 빌르너브는 위기를 모면하고 첫 챔피언 타이틀을 잡았다.
앞서 말한 대로 경기심사위원회가 경기 중 사고로 넘어간 48주의 충돌 사건은 F1계 안팎의 거센 반발로 11월 11일 영국 슬로에서 열린 FIA 세계평의회에 넘어갔다. 재심결과 슈마허의 고의충돌로 판정, 시즌 총득점 몰수의 처벌이 내려졌다. 다만 컨스트럭터즈 점수는 그대로 인정되어 페라리는 워크스 2위를 지켰다. 무득점으로 끝난 슈마허와는 달리 3위로 4점을 보탠 빌르너브가 세계 챔피언의 영예를 누렸다. 캐나다인으로 첫 타이틀 획득, CART 월드 시리즈에 이은 더블 타이틀이다. 게다가 F1 데뷔 2년째의 챔피언으로 F1이 시작된 50년대를 제외하면 최단기 정상정복 기록이다.
한편 윌리엄즈와 맥라렌의 승부조작설도 심판대에 올랐다. 두 팀이 합동작전을 펴 페라리의 슈마허를 침몰시키고 그 대가로 빌르너브가 맥라렌 듀오에게 원투승을 안겨주었다는 담합 또는 음모설. 그러나 판정은 무혐의였다.

Scene9
제12전 헝가리 GP
제작연도 1998년 8월 16일
무대 헝가로링 서킷
주연 M. 슈마허, R. 브라운
조연 M. 하키넨
관람 포인트 3스톱으로 바꾼 페라리의 승부수에 농락(?)당한 하키넨과 맥라렌

레이스가 시작되자 M. 하키넨의 자신감은 더욱 굳어졌다. 충실한 팀 동료 D. 쿨사드가 2그리드에 포진해 후방을 지켰다. 타이틀전의 라이벌 M. 슈마허는 3위로 밀려났다. 만사는 맥라렌의 작전계획대로 진행된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제 레이스는 예상을 크게 빗나갔다.
그랑프리 전문가들과 관중들은 하나같이 맥라렌 듀오가 레이스를 완전히 장악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페라리의 브라운은 머릿속에서 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슈마허에게도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제1차 피트스톱 뒤 R. 브라운은 슈마허에게 지시했다. 레이스 전에 짜놓은 2스톱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모험일 수밖에 없는 3스톱 작전에 운명을 걸기로 했다. 대신 예선과 마찬가지로 랩타임을 최대한 단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슈마허는 3스톱 작전과 전속질주에 나섰다.
작전에 따라 슈마허가 일찍 피트인하자, 맥라렌이 덩달아 쿨사드를 일찍 불러들였다. 이때 맥라렌은 페라리의 덫에 걸렸다. 페라리의 번개 피트작전으로 슈마허는 쿨사드를 꺾고 2위로 올라섰다. 이후 가벼운 연료를 싣고 달리면서 하키넨을 바짝 뒤쫓았다. 하키넨이 2차 피트스톱에서 나왔을 때 슈마허는 이미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뒤이어 하키넨은 또 다시 곤경에 빠졌다. 머신 서스펜션에 돌이 하나 박혀 스피드를 마음대로 낼 수 없었다. 순위는 점차 떨어졌고, 끝내 6위로 레이스를 마감했다. 쿨사드가 2위, 윌리엄즈 소속 J. 빌르너브가 3위 체커기를 받았다. 페라리팀 로즈 브라운의 작전에 말려들어 헝가리 그랑프리 우승을 놓친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키넨과 맥라렌을 강타했다.

Scene10
제11전 영국 GP
제작연도 2003년 7월 20일
무대 영국 실버스톤 서킷
주연 R. 바리첼로, K. 라이코넨
조연 트랙에 뛰어든 관중
관람 포인트 트랙에 뛰어든 관중 때문에 레이스 판도 변화 발생

결승 레이스에서 정체불명의 남자가 트랙에 뛰어들어 항의소동을 벌이는 바람에 혼란에 빠졌다. 그 때문에 R. 바리첼로는 최고의 날을 망칠 뻔했다. 스타트와 동시에 J. 트룰리가 선두로 치고 나갔지만 워밍업에서 트룰리에 막혀 타이어 공기압이 낮아진 바리첼로는 K. 라이코넨에게도 밀려났다. 라이코넨은 트룰리의 슬립스트림을 타고 2위로 1코너 콥스로 들어갔다.
4주째 그리드 12위에서 9위로 뛰어오른 쿨사드의 머신이 말썽을 부렸다. 콕핏을 에워싸고 있는 충전제가 콥스 출구의 고속 코너에 흩뿌려졌다. 세이프티카가 들어왔고, 쿨사드는 충전제를 갈기 위해 피트로 들어갔다. 7주째 재출발에서 트룰리는 침착하게 선두를 지켰다. 라이코넨, 바리첼로, R. 슈마허, M. 슈마허, 몬토야, 알론소와 다마타가 뒤를 이었다.
뒤이어 10주째 애비 코너 바깥을 찌르며 바리첼로가 라이코넨을 따돌렸다. 행어 직선코스에서 다시 문제의 항의자가 트랙에 뛰어들었다. 세이프티카가 나오자 거의 모든 드라이버가 서둘러 피트로 들어갔다. 몬토야, M. 슈마허와 알론소 등은 피트 서비스 순서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빼앗겼다.
그러자 1차 세이프티카 때 피트에 들어갔던 토요타 듀오 다마타와 파니스가 원투체제를 갖추었다. 쿨사드가 3위로 올라왔다. 제30주에 다마타가 피트인하고 라이코넨이 선두에 나섰다. 몬토야가 피트인한 사이 바리첼로가 2위로 뛰어올랐다. 선두 라이코넨과는 10초, 3위 몬토야와는 3초차였다. 라이코넨이 35주째 피트인하면서 바리첼로에게 선두를 허용했다. 바리첼로는 거리를 벌린 뒤 38주에 마지막 피트스톱 후 트랙에 나왔을 때 라이코넨에게 뒤졌다.
바리첼로는 애비 코너에서 바깥쪽으로 추월을 시도했으나 실패, 초고속 브리지 벤드에서 재공격에 들어갔다. 라이코넨이 외곽을 방어하다가 잔디밭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그 순간 바리첼로가 뚫고 나가 5.4초차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2002년 미국 GP에서 팀오더라는 승부조작으로 우승한 뒤 처음 올라선 표창대 정상이었다.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
레이싱 스쿨은 F1을 꿈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노년의 사업가도 참여하는 드라이빙 테크닉의 교육장이다. 서양과 일본에서는 퇴역한 드라이버들이 자신의 이름을 따 레이싱 스쿨을 세우고 체계적이고 철저한 교육을 실시한다. 레이싱 스쿨의 마지막 과정인 스쿨선수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스쿨의 후원으로 프로 레이스에 진출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지난 2002년부터 이명목 레이싱 스쿨이 운영되고 있다
글·김병헌 차장


유럽과 미국에는 레이싱 스쿨이 많이 있다. 가까운 일본에도 몇 곳이 있다. 레이싱 스쿨이란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한마디로 자동차 경주를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기관이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레이싱 스쿨이 세워져 쟁쟁한 드라이버들을 배출하고 있다. 모터스포츠의 정상 F1에서 활약했거나 활약하고 있는 A. 프로스트와 J. 알레시, 챔프카 월드 시리즈에서 뛴 J. 빌르너브, M. 안드레티와 D. 설리반 등 일일이 들자면 끝이 없다.
거의 모든 레이싱 스쿨은 입학 연령을 16세 이상(단 16세의 경우에는 부모의 승낙이 있어야 한다)으로 규정하고 있다. 신체조건은 특별한 제약이 없고 뜀뛰기를 할 수 있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입학생들의 목적은 다양하다. F1 출전을 꿈꾸는 10대, 30세의 공격적인 사업가, 어릴 때부터 경주차를 타는 것이 꿈이었던 50대 후반의 정년 퇴직자, 그리고 적지 않은 여성들이 참가한다. 65세의 남성이 무사히 졸업한 적도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은퇴한 드라이버가 스스로 학교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붙인다. 일본에서는 그 학교 후원자(타이어나 자동차 메이커 등)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스킵 바버와 보브 본듀런트, 영국의 짐 러셀, 프랑스의 윈필드가 좋은 본보기다. 일본의 경우 니스모 레이싱 스쿨이 대표적이다.
미국과 일본에서 이런 학교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누구나 손쉽게 비교적 싼 비용으로 다닐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입문 코스의 경우에는 약 1,500∼2,000달러(약 140만∼190만 원)의 비용과 배우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된다. 수강료는 레이싱 스쿨마다 차이가 있으므로 홈페이지를 통해 정확한 금액을 체크한다. 신발과 장갑을 제외하고 헬멧, 운전복과 차는 모두 학교에서 준다. 처음 레이스에 참가하는 비용은 다른 방법으로 할 때보다 훨씬 싸게 먹힌다.
모터스포츠는 위험하다는 오해도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안전하다. 그것이 인기를 끄는 또 다른 이유다. 단계적으로 배우는 내용은 절대로 건너뛸 수 없다. 그 단계를 완전히 익혀야만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걸핏하면 소송을 한다. 따라서 사고 없는 학교 운영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레이싱 스쿨에는 포뮬러카뿐 아니라 랠리, 드래그레이스와 오벌코스 등 특수한 종목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곳도 있다. 포뮬러카 레이싱 스쿨을 기준으로 교육과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입문 코스
먼저 3일간의 훈련과정이 있다. 브레이킹, 기어변환, 주행라인, 규칙 등 기초를 배운다. 포뮬러형의 최하위급에 해당하는 차 즉, 일본은 포뮬러 주니어(FJ)1600, 미국은 포뮬러 포드(FF)1600을 사용한다. 최근에는 학생을 모으기 위해 겉보기에 F1에 가까운 경주차를 사용하는 학교도 있다.
윙이 달린 차는 공력에 의해 타이어가 땅바닥에 찰싹 달라붙게 된다. 이 그립감이 초보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먼저 운전자의 경계심을 늦추고 타이어가 미끄러질 때 필요한 제어력을 잃게 된다.
윙이 없는 포뮬러를 타보면 차의 한계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레이스의 본질인 컨트롤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된다. 이때 스피드는 둘째 문제다. 안정된 달리기를 중심으로 지도한다. 졸업생은 자국 레이스 참가자격을 얻는다. 그러나 국내 레이스에 참가하지 않고 학교가 주최하는 한 단계 높은 레이스에 진출하는 경우도 있다.

상급 코스
2일에 걸쳐 윙 달린 차를 사용한다. 기본적으로 입문 코스를 마쳐야 들어갈 수 있는 과정이다. 다른 학교에서 같은 수준의 과정을 졸업한 사람도 받아준다. 단계적으로 스피드를 향상시킨다. 추월, 스타트, 집중력 향상 등 실전에 필요한 테크닉을 가르친다
차에 달린 윙의 기능에 대한 지식도 과정에 들어간다. 공기역학을 비롯해 섀시 세팅에 대해서도 배운다.

테스트
지금까지 배운 것을 꼬박 하루에 걸쳐 복습한다. 물론 전보다 스피드를 더 높이고, 한 차원 높은 컨트롤을 익힌다. 일반 레이스에 참가할 때까지 적어도 몇 차례는 이 과정에 참가한다.

스쿨 선수권
각 나라 자동차 경주 협회가 정식 자국 레이스로 승인한다. 경주차의 준비는 철저하게 공식 레이스 수준을 지킨다. 경주차는 제비뽑기로 정하고, 세팅에 손을 댈 수는 없다. 1년에 5∼10회 정도 열린다. 프로 드라이버로 활동할 수 있느냐를 판가름하는 최상의 기회다. 종합우승자는 학교의 지원을 받아 프로 시리즈에 올라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레이싱 스쿨에는 온갖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학습능력과 속도에 많은 차이가 있다. 미국 학교의 장점은 수강생의 적성과 능력을 잘 집어낸다는 데 있다. 학습속도와 강·약점을 짚어가며 가르친다. 날마다 수강생에 맞추어 프로그램을 짠다.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수준 향상과 연결되도록 가르친다.
수준향상에 가장 좋은 방법은 요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될 수 있으면 경주차를 오래 운전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수강시간의 80% 이상이 달리기에 들어간다. 강의는 20%에 지나지 않는다.
운영방법은 철저하게 합리화되어 있다. 학생이 기다리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시간표를 짠다. 다음 과정을 잇는 방법이 규격화되어 있다. 귀중한 서킷 임대 시간을 허비하는 법이 없다. 가령 사고(충돌, 엔진고장 등)가 나도 신속히 해결한다. 오랜 경험을 갖고 있는 강사가 전 과정에 지장이 없게 하루일과를 소화해 낸다.
원활한 운영을 할 수 있는 요인의 하나가 강사와 학생 사이의 보디 랭귀지, 곧 몸짓이다. 간단한 일이지만 그 효과는 대화보다 훨씬 크다. 활발한 손짓과 눈짓이 위력을 발휘한다. 다음과 같은 3가지만 실천해도 운영효율이 50% 이상 좋아진다.
‘엔진 스타트’(스타터를 돌리라는 뜻)의 경우 팔을 수직으로 올리고, 팔꿈치를 고정시킨 채 손을 빙글빙글 돌린다. ‘엔진 스톱’(엔진을 끄라는 뜻)은 수평으로 편 손을 자기 목에 가까이 갖다 대고 손가락 끝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되풀이한다. 이 때문에 마스터 스위치를 킬(kill) 스위치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 방향을 따르라’는 동작은 눈짓을 하면서 팔을 앞으로 쭉 뻗고 둘째손가락으로 상대를 가리킨다. 차를 세우려는 위치로 천천히 손가락 끝을 옮기며 인도한다. 가장 중요한 동작이다. 가령 급유를 할 때 지시하는 곳에 가지 않고 대열을 무너뜨린 채 엔진을 끄면 시간낭비가 엄청나다. 배터리 용량이 작아서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시동을 걸 수는 없다. 이때 비라도 오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한편 국내에도 전문 레이싱 스쿨이 있다. 그동안 수차례 국내외 대회에서 챔피언에 오른 이명목 씨가 운영하는 레이싱 스쿨(www.racingschool. co.kr)은 지난 2002년 8월 문을 연 이래 500여 명의 수강생을 배출했다. 한 달에 한 번, 1∼2일간 서킷에서 열리기 때문에 직장인이라면 월차를 내야 한다. 하루 6∼8시간의 엄격한 훈련을 받는다. 과정을 수료하면 자동차 경주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자기 차를 갖고 가야하며 교육비는 2일 기준으로 98만 원선. 물론 2∼3일의 짧은 기간에 현격한 레이싱 테크닉의 발전을 바라기는 어렵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동안 배운 귀중한 테크닉과 이론을 소화하다보면 조금씩 레이싱 테크닉이 몸에 밸 것이다.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
몬자 서킷은 F1 그랑프리 캘린더에 남은 마지막 고속 코스이다. 몬자를 고속 서킷으로 만든 데는 이태리인들의 자존심도 한몫 했다. 몬자는 설계자가 의식적으로 레이아웃을 고쳤다기보다 도로를 중심으로 지형지물을 철저히 이용한 서킷이다. 고속 서킷이다보니 유독 사고가 많았으며 폰 트립스, 요헨 린트, R. 페테르손 등이 목숨을 잃었다

독특한 분위기와 성격을 자랑하는 유럽 최고(最古)의 서킷 몬자(1주 5.793km). 녹음이 우거진 왕립공원의 서킷은 F1 그랑프리 캘린더에 남은 마지막 고속 코스이다. 몬자를 고속 서킷으로 만든 데는 이태리인들의 자존심도 한몫 했다. 이태리는 차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고 모터스포츠에 대한 긍지가 강한 나라였음에도 1920년대까지 제대로 된 레이스 전용 서킷이 없었다.
이미 1900년대 초반 브룩랜즈와 인디애나폴리스에 고속 서킷을 지었던 영국 및 미국과 비교해 모터스포츠 중심국가였던 이태리의 자존심이 형편없이 구겨져 있던 때였다. 이런 연유로 이태리인들은 몬자 서킷에서 브룩랜즈나 인디애나 모터스피드웨이보다 빠른 기록이 쏟아지기를 바랬고, 이 열망은 고속 서킷의 건설로 이어졌다.
또한 란치아, 피아트 등 자동차 생산업체들의 모임인 밀라노 오토모빌 클럽이 건설을 주도한 것도 몬자를 고속 서킷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제조업체들은 서킷을 레이스 전용트랙 외에 양산차 개발을 위한 테스트 장소로 쓰기를 원했기 때문에 스피드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기본틀을 잡았다.

서킷 레이아웃
몬자는 설계자가 의식적으로 레이아웃을 고쳤다기보다 도로를 중심으로 지형지물을 철저히 이용한 서킷이다. 이미 있던 길을 포장해서 레이스 전용 서킷으로 고쳤다는 이야기다. 이런 경우는 구간에 따라 안전지대가 부족하거나 레이스 전용 서킷에서 볼 수 있는 스톱&고(Stop&Go) 구간이 거의 없었다. 이에 따라 경주차의 속도를 의도적으로 줄이기 위해 만든 군데군데에 감속구간인 시케인을 마련했다.
출발 후 만나게 되는 첫 코너에서는 코스 폭이 좁아 혼전과 사고의 위험이 일어난다. 드라이버들은 시속 70∼80km로 연석을 타고 지나가는데, 바로 전 직선구간에서 적절히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거나 경주차가 균형을 잃게 되면 코스를 가로지르게 되어 페널티를 받게 된다.
바로 이어지는 그란데(Grande)는 몬자에서 가장 빠른 구간으로 시속 290km에 이른다. 그란데를 지나 등장하는 바리안테 델라 로지아(Variante della Roggia)에서는 정확한 감속과 가속이 중요하다. 특히 코너 입구에서 브레이크 포인트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경주차의 속도는 코너입구에서 시속 335km, 중간지점에서 시속 115km, 그리고 탈출할 때 시속 220km에 이르게 된다. M. 슈마허는 지난 2001년 몬자 서킷 테스트 중 이곳에서 시속 195km로 장벽을 들이받아 경주차와 함께 뒤집혀 대형사고를 당할 뻔했다.
헤어핀인 레스모스(Lesmos) 코너에서는 가속 포인트가 중요하다. 경주차의 균형을 유지하며 코너에서 뒷바퀴가 완전히 빠져나가면 가속한다. 반면 앞바퀴의 그립이 충분한 상태에서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오버스티어 현상이 일어나 코스아웃이 되기 쉽다. 몬자의 마지막 코너인 파라볼리카(Parabolica)까지의 직선구간과 시케인은 다른 구간에 비해 쉽다. 델 비아로네(del Vialone)를 지나 등장하는 바리안테 아스카리(Variante Ascari)는 좌우 콤비네이션의 시케인으로 기어 2, 3단으로 통과한다.
한편 경사진 파라볼리카는 시속 165km로 그다지 빠른 코너는 아니다. 하지만 다음 직선구간에서 추월하려는 드라이버들은 이 코너에서 최소한 앞 경주차의 바로 뒤에 따라 붙어주어야 하는데, 코너의 성격상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예선에서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직선구간에서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해 시간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많다.
원년 우승 드라이버는 이태리계 G. 파리나. 그는 알파로메오 158을 타고 영국에 이어서 4전 스위스와 최종전 몬자 우승까지 휩쓸어 F1 첫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 하지만 51년 이후에는 A. 아스카리와 J. M. 판지오에 가려 오랫동안 빛을 볼 수 없었다.
아스카리는 51년에 몬자를 포함해 여섯 번 표창대 정상에 우뚝 서서 전성시대를 열었다. 12회의 우승기록을 세운 52년은 최고의 황금기였다. 특히 제7전 몬자는 5연승으로 챔피언을 굳힌 아스카리의 자축연과도 같았다. 독일전부터 세 경기 연속 폴포지션(PP)을 따낸 그는 시리즈 최종전을 폴투윈으로 마쳐 타이틀을 품에 안았다. 하지만 아스카리는 55년 몬자 서킷에서 36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했다. 이태리 몬자에서 스포츠카 테스트 드라이브 도중 트랙 장벽을 들이받는 불의의 사고를 낸 것이다.
50년 후반부터 몬자 서킷의 주인공은 S. 모스. 56년 판지오의 몬자 GP 4연승에 제동을 건 그는 다음해인 57년 영국의 반월팀으로 이적했다. 그해 몬자를 포함해 3승을 올린 그의 성적은 빼어난 것이었다. 59년과 60년에 그는 팀을 옮겨 다니며 F1에 참가했다. 그 중 쿠퍼팀에 가장 오래 머물며 2승을 올렸다. 59년 몬자도 그 중 하나다.
61년 몬자 그랑프리는 실망스러운 레이스였다. 영국팀이 안전을 이유로 출전을 거부했기 때문. 페라리가 떼지어 출전했고, P. 힐이 표창대 정상에 올랐지만 빛 바랜 승리였다. 이듬해에는 어느 팀도 몬자의 뱅크 트랙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폰 트립스와 힐의 타이틀을 결정할 중대한 레이스에서 비극이 일어났다. 독일 스타 트립스와 12명의 관중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70년에도 몬자에서 또 하나의 참극이 벌어졌다. 선두를 달리던 요헨 린트가 연습 도중 경주차 기계고장으로 생을 마쳤다. 그의 나이 겨우 28세. 로터스가 불참한 가운데 경기는 진행되었고, C. 레가조니가 데뷔 5전 만에 승리를 거두었다. 70년대에 로터스와 마치팀을 오가며 3승을 챙긴 R. 페테르손도 78년 몬자에서 사고로 숨을 거둬 F1계는 충격과 슬픔에 잠겼다.
한편 F1 사상 최고 명승부로 꼽히는 71년 이태리 GP는 지금도 모터스포츠계에서 회자되고 있다. 경기 결과 1∼5위가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 시간 차이는 단 0.61초였다. 1, 2위는 0.01초 차이여서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었다. 승리의 여신은 BRM을 몬 P. 게틴의 손을 들어주었다. 게틴은 그날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다.
80년대에는 A. 프로스트(81, 85, 89년)와 N. 피켓(83, 86, 87년)이 이태리 그랑프리 우승컵을 세 차례씩 나눠가졌다. 그러나 90년대에는 혼전을 벌였다. 91년 시즌에 M. 슈마허는 몬자에서 5위로 첫 득점에 성공했다. 22세인 독일의 새별은 기성세대의 뒤나 따라다닐 인물이 아니었다. 마침내 슈마허는 96년에 소속팀 페라리의 홈그라운드인 몬자에서 우승컵을 거머쥐었고 그 뒤로 4승을 더해 이태리전 최다승 드라이버로 기록되었다.
2000년대 몬자의 최고의 영웅은 J. P. 몬토야. 미국 테러사태의 충격속에 치러진 2001년에 그는 R. 바리첼로의 맹추격을 받으면서 먼저 피니시 라인을 통과해 F1 데뷔 15전 만에 첫 우승을 거두었다. R. 바리첼로와 R. 슈마허가 뒤를 이었다. 이듬해 공식예선에서 시속 259.827km로 17년 만에 F1 평균시속 신기록을 세웠다. 85년 영국 GP에서 윌리엄즈의 K. 로즈베르그가 세운 시속 259.005km 이후 처음이었다. 그리고 2005년에는 강호 F. 알론소의 추격을 뿌리치고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올 시즌에는 F. 알론소가 이태리 그랑프리에서 첫승을 기록했다.
Posted by 따뜻한 우체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