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스턴 마틴이 전 세계 88대 한정 생산하는 V12 스피드스터를 공개했다. 1956년 데뷔한 애스턴 마틴의 레이스카 DBR1을 오마주했으며, 지난 2013년 브랜드 100주년을 맞아 공개한 CC100의 디자인 콘셉트를 빌렸다.
DBR1은 애스턴 마틴 역사상 가장 화려한 성적을 거둔 경주차. 직렬 6기통 3.0L 가솔린 엔진과 5단 수동변속기를 맞물린 모델은 최고속도가 시속 241㎞에 달했다. 1957년 ‘스파 스포츠카 레이스(Spa Sportscar Race)’ 우승을 시작으로, 1958년부터 2년 연속으로 ‘굿우드 투어리스트 트로피’를 따냈다. 1959년에는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와 뉘르부르크링 1,000㎞ 내구 레이스에서 연달아 우승하기도 했다.
반면 V12 스피드스터는 이름처럼 V12 5.2L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을 얹었다. 여기에 ZF 8단 자동변속기를 더해 최고출력 700마력, 최대토크 76.8㎏·m를 뿜는다. 0→시속 100㎞까지 단 3.4초가 걸리며, 최고속도는 시속 318㎞다. 지붕과 앞 유리가 없는 ‘오픈 콕핏’ 디자인 덕분에 체감 속도는 제원보다도 훨씬 빠를 전망이다.
곳곳에는 DBR1에서 영감을 얻은 요소를 넣었다. 모든 V12 스피드스터는 50시간 이상의 도장 공정을 거친다. 차체를 애스턴 마틴의 상징적 컬러인 레이싱 그린으로 칠하고, 그 위에 흰색 스트라이프와 원형 그래픽을 더했다. 실내는 콘코 새들 가죽과 비리디안 그린 직물 소재로 감싸 DBR1의 독특한 형태를 이어받았다. 레이싱 그린 컬러 헬멧과 새틴 실버 알루미늄 스위치 기어 등도 DBR1의 특징.
한편, 애스턴 마틴은 본사가 위치한 영국 게이든 공장에서 수작업으로 V12 스피드스터를 제작한다. 고객 인도는 올해 중반기부터 시작할 예정이다.
문짝 두 개, 12기통 엔진, 그리고 후륜구동이다. 이 조합이라면 들어 보지도 못한 브랜드가 만들어도 좋다. 허나 이 차는 애스턴마틴이다. 글 | 안진욱사진 | 최재혁
요즘 다운사이징이다 뭐다 해서 대형 파워 유닛을 보기 힘들어졌다. 작은 배기량으로도 출력을 매콤할 정도로 올릴 수 있기에 큰 엔진의 실용성이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고배기량 엔진은 거의 멸종 위기에 처했다. 허나 큰 엔진이 주는 감성은 효율이라는 단어로 감출 수 없다. 오랜만에 12기통 스포츠카를 타고 있다. 스티어링 휠에는 근사한 날개 배지가 박혀있다. 바로 애스턴마틴이다. 모델은 DB11, 그것도 AMR(ASTON MARTIN RACING)이다. AMR은 애스턴마틴의 고성능 버전이다. 모터스포츠에서 한가락 하는 애스턴마틴의 튜닝 실력의 진가를 볼 수 있는 모델이다. 노멀 DB11을 타보지 않아 얼마만큼 더 스포티하게 조율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밟아보기로 한다.
애스턴마틴 DB11 AMR의 기다란 후드 안에는 무려 12개의 실린더가 일하고 있다. V12 5.2ℓ 엔진에 터빈 두 발을 달아 최고출력 630마력, 최대토크 71.4kg·m의 파워를 생산해 8단 자동변속기를 통해 뒷바퀴를 굴린다.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3.7초다. 노멀 버전보다 0.2초 빠른 수치이며 최고시속은 334km에 달한다. 브로셔에는 이렇게 적혀 있고 실제로 어떤지 달려보자.
정말 빠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추월한다. 가속페달을 살짝 건드려도 튀어 나간다. 워낙 배기량이 크다 보니 저회전에서부터 막강한 토크가 터져 나온다. 스피드미터 바늘이 비현실적으로 올라간다. 이 정도 스펙을 가진 슈퍼카를 탈 때와는 조금 다른 주행감 혹은 가속감이다. 잘 달릴 것 같은 녀석이 잘 달리는 것과 설마 했던 녀석이 잘 달리는 것은 다르니까. 곱상하게 생긴 외모 속에 괴력을 숨겨뒀다. 여기에 12기통 만이 낼 수 있는 사운드가 더해지니 천국이 따로 없다. 터보 엔진이지만 음색이 전혀 답답하지 않다. 저속에서는 저음으로 존재감을 알리고 고속에서는 톤을 높여 울부짖는다. 가끔 터지는 백프레셔도 운전자를 흥분시키는 데 일조한다.
변속기는 엔진과 쿵짝이 잘 맞는다. 토크 컨버터 타입이지만 조미료 살짝 치자면 듀얼 클러치 유닛 수준의 변속 속도를 보여준다. 저속에서 울컥거리지 않아 고급스러운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으며 다운시프트에도 적극적이어서 운전자의 흥을 깨지 않는다. 감탄할 정도는 아니지만 엄청난 힘을 무난하게 처리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
630마력을 공도에서 전부 사용할 수 없다. 그래도 고속도로를 달려보자. 출력이 출력인 만큼 고속도로에서도 힘은 남아돈다. 오랜만에 이런 슈퍼 GT카를 타니 재미있다. 끝을 알 수 없는 힘을 필두로 마음껏 달려본다. 이럴 수 있는 것은 고속안정감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속도가 올라갈수록 무게중심이 낮아지는 게 느껴진다. 일상 주행에서 괜찮은 승차감을 보여줬던 서스펜션이 고속에서는 야무진 면모를 보인다. 참고로 앞뒤 액슬은 각각 더블 위시본과 멀티링크로 차체와 묶었다.
서스펜션 세팅이 마음에 들어 와인딩을 탈 수밖에 없었다. 1.7t이 살짝 넘는 중량으로 코너에서 어떠한 모습을 보일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굽이진 길에 진입한다. 초고성능에 후륜구동이라 부담스럽지만 탄탄한 서스펜션을 믿고 들이댄다. 코너에 들어가면서 제동을 걸면 중량이 앞쪽으로 쏠리는 것은 잘 억제했다. 그 때문에 진입속도가 높으며 자연스럽게 라인을 그리기 시작한다. 코너 성향은 언더스티어다. 가속 페달을 밟으면 곧바로 파워슬라이드를 일으키며 오버스티어를 보여줄 것 같지만, 그런 드라마틱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는다. 운전자를 불안하지 않게 하면서 조신하게 코너를 탈출한다.
복합코너에서는 섀시가 엉키지 않고 가뿐히 정복한다. 스티어링 휠의 피드백과 리턴이 빠르고 한쪽으로 쏠렸던 중량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는 과정이 매끈하다. 코너 방향이 계속해서 바뀌어도 이 녀석은 전혀 당황하지 않아 운전자가 더 과감해진다.
브레이크 시스템은 단연 최고다. 무시무시한 출력을 다루기에 충분하다. 운전자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차를 세울 수 있다. 강한 제동이 걸리더라도 노즈다이브나 브레이크스티어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강한 제동이 연거푸 들어가더라도 페이드 현상 없이 지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코너에서 브레이크 페달을 밟아도 차가 안쪽으로 말리지 않는다. 브레이크 페달은 가벼워 발에 피로를 주지는 않지만 미세한 브레이킹은 힘들다.
훌륭한 퍼포먼스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달리는 재미가 있다. 잘생긴 외모만 가진 줄 알았는데 다른 매력까지 품고 있었다. 외관은 정말 예쁘다. 하이엔드 슈퍼 GT카의 디자인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애스턴마틴이 제시하고 있다. 롱노즈 숏데크 타입 실루엣에 어느 한 곳 모난 구석이 없다. 유려하고 우아하다. 디자인 완성도가 높은데 기능적인 요소도 잘 녹였다. DB11 AMR에는 거창한 에어로파츠가 달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속도로에서 뛰어난 공력 성능을 자랑했다. 그 이유는 프런트 펜더와 C필러에 공기를 잘 흘려보낼 수 있는 유도 라인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또한 AMR 버전이라 해서 티 내지도 않았다. AMR의 흔적은 엔진 위에 붙어 있는 배지와 헤드레스트에 수놓은 스티치 정도다.
도어를 연 김에 실내도 둘러본다. 정신 없이 운전하느라 인테리어를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역시 고급스럽다. 이렇게 부드러운 가죽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심지어 천정도 가죽으로 감쌌다. 센터페시아는 대칭형 레이아웃이고 버튼은 사용하기 편한 위치에 잘 배치했다. 스티어링 휠은 사이즈가 적당하고 그립감이 좋다. 패들 시프트는 컬럼에 고정되어 있는데 크기가 상당히 크고 조작감은 최고다. 철컹철컹 하는 이 느낌 때문에 계속 변속하게 된다. 시트는 컴포트와 스포티한 성격을 적절한 비율로 잘 섞었다.
이제 DB11 AMR과 작별할 시간이다.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만으로도 이 녀석의 매력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장르에 고집스러워 보일 만큼 충실하다. GT카는 장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차를 말한다. 단순히 ‘빠르게’가 아니라 ‘안락하게 빠르게’다. DB11 AMR은 고성능 트림이지만 거친 성격은 죽이고 운전자를 친절하게 대한다. 그렇다고 심심한 것도 아니다. 매력적인 배기 사운드와 12기통이 주는 회전질감만으로 충분히 즐겁다. 앞으로 이런 차는 점점 더 사라질 것이다. 삶이 여유롭다면 늦기 전에 빨리 타봐야 한다.
SPECIFICATION ASTON MARTIN DB11 AMR 길이×너비×높이4750×1950×1290mm 휠베이스2705mm|엔진형식V12 터보, 가솔린 배기량 5204cc|최고출력630ps 최대토크71.4kg·m|변속기8단 자동 구동방식RWD|복합연비8.7km/ℓ|가격-
애스턴마틴은 올 시즌부터 F1® 공식 세이프티카 밴티지의 성능과 엔지니어링이 적용된 ‘밴티지 F1® 에디션’ 쿠페와 로드스터를 공개하고 전세계에 출시한다.
금일 공개된 밴티지 F1® 에디션은 세이프티카에 요구되는 트랙 중심의 성능과 빠른 랩타임을 일반도로 주행이 가능한 로드카로 완벽하게 이식했다. 밴티지 모델 중 최상위 모델이며 애스턴마틴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과 변화를 상징하는 모델이라고 애스턴마틴은 설명한다.
F1 공식 복귀를 선언한 애스턴마틴은 세이프티카 개발을 위해 밴티지의 재설계 및 고속 주행 내구성 시험 등 각종 테스트를 거쳐 FIA가 정한 모든 규정을 통과했다. 애스턴마틴 본사 엔지니어링팀은 이 과정에서 축적된 역량을 통해 트랙 중심의 퍼포먼스, 섀시 및 공기 역학적 특성을 지닌 세이프티카와 동급인 로드카, ‘밴티지 F1® 에디션’을 개발했다.
애스턴마틴 밴티지 F1 에디션
애스턴마틴은 밴티지 F1® 에디션에 적용된 4.0리터 V8 트윈터보 엔진을 업그레이드했다. 엔지니어링 개선을 통해 기존보다 25마력 증가한 535마력(PS)로 파워가 향상됐다. 최대 토크는 685Nm으로 일반적인 밴티지와 동일하지만 최대 토크의 유지 시간은 기존 모델보다 오래 지속 가능하다.
강력한 파워는 운전자가 정확하고 직접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8단 자동변속기를 통해 발휘된다. 특히 고단 변속시 최적화된 토크컷을 제공해 변속 시간이 단축됐으며 다운 시프트 중 차량 제어 능력을 향상시켰다.
애스턴마틴 밴티지 F1 에디션
섀시는 강력한 퍼포먼스를 제어하고 유지하는 스티어링과 서스펜션 강화에 중점을 뒀다. 차체 전면부는 구조적 강성을 높였으며 재설계된 댐퍼는 최적의 성능을 발휘하는 영역대를 증가시켜 수직으로 발생하는 차체 움직임에 대한 제어 능력을 개선시켰다. 늘어난 영역대의 댐퍼에 맞춰 리어 스프링 및 차체 측면 강성을 조정해 날카로운 턴인 등 핸들링 능력을 향상시켰다.
밴티지 F1® 에디션에 탑재된 에어로 키트는 밸런스를 개선할 뿐만 아니라 최고 속도에서 일반 밴티지보다 최대 200kg 증가된 다운포스를 제공하는 등 드라마틱한 성능 개선을 완성했다. 차량의 전, 후방은 물론 차체 하부까지 공기 역학적 특성을 고려했다. 애스턴마틴 엔지니어링 팀은 프런트 스플리터, 프런트 다이브 플레인, 언더바디 터닝 베인, 리어 윙 등 주요 에어로 다이내믹 구성품을 재설계했으며 유기적 상호 작용을 통해 실제 성능을 배가시켰다.
애스턴마틴 밴티지 F1 에디션
애스턴마틴이 F1®에 복귀했음을 상징하듯 에디션 모델은 애스턴마틴 코그니전트 포뮬러 원™ 팀의 색상인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이 적용되며 옵션으로 다른 색상을 선택할 수도 있다.
토비아스 뫼어스 애스턴마틴 CEO(Tobias Moers, Aston Martin CEO)는 “강력한 퍼포먼스는 모든 애스턴마틴이 갖추고 있는 핵심이지만 F1® 뱃지가 더해진다면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며 “애스턴마틴 엔지니어링팀이 자동차 공학과 공기 역학의 한계를 넘어선 작업을 통해 탄생한 밴티지 F1® 에디션은 애스턴마틴과 밴티지가 써 온 역사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 변화”라고 말했다.
스포츠카만을 만들다 처음으로 SUV를 만들었다. 훨씬 쉬웠는지 처음 같지가 않다. 글 | 안진욱사진 | 최재혁 직업 특성상 한 달에 5대 정도 시승과 촬영을 한다. 얼추 계산해보면 지금까지 수 백대의 차를 타봤다. 엄청나게 크거나 작은 차, 빠른 차, 그리고 알뜰살뜰한 차 등 다양한 브랜드의 여러 장르 모델을 경험했다. 유일하게 한 번도 몰아보지 못한 차가 있다. 바로 영국 귀족들의 스포츠카 브랜드 애스턴마틴이다. 애스턴마틴이라면 제임스 본드가 떠오르고 레고로 DB5를 만들어 본 게 전부다. 여하튼 이번 촬영을 계기로 처음으로 애스턴마틴 키를 손에 쥐었다. 궁금했다. 제임스 본드가 타는 차가. 게다가 내 생애 처음 타는 애스턴마틴이 애스턴마틴 최초의 SUV DBX다. 뭔가 진한 데이트가 될 것 같아 타기 전부터 설렌다. 두근대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겸 외관을 감상하고 출발하기로 한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디자인이다. 론칭쇼 당시 실물을 보고 두 번째로 보지만 화려한 조명이 감싸지 않아도 아름답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근사하다.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벤틀리 벤테이가나 람보르기니 우르스가 각을 살린 디자인이라면 DBX는 각을 모조리 부드럽게 다듬어 유려한 실루엣을 가지고 있다. 패널의 수를 최소화하고 잔 기교를 부리지 않아 콘셉트카처럼 보이는 것도 매력 중 하나다. 전면부는 DBS에서 가져온 것 같은 헤드램프와 애스턴마틴 시그니처 라디에이터 그릴로 미적지수를 올렸다. SUV면 얼굴이 무식하게 크고 둔탁하게 생겼다는 편견을 깨버린다. 주간주행등은 헤드램프에 포함시키지 않고 범퍼 가장자리로 내렸다.
DBX 외관에서 하이라이트는 옆모습이다. 보닛부터 해치 리드까지 이어지는 라인이 기가 막힌다. 최근 출시되는 SUV들 중에 간혹 모델명 ‘쿠페’를 붙이고 억지로 C필러 이후 모양이 어색한 경우가 있다. DBX는 SUV 쿠페라고 하진 않지만 이런 라인이야말로 진짜 쿠페다. 덧붙여 도어핸들은 숨겨놓고 캐릭터 라인도 없지만, 전혀 밋밋하지 않다. 한쪽으로 시선이 쏠리는 디자인이 아니다. 전체를 감상하게 만드는 완성도 높은 그림이다. 프런트 오버행도 극단적으로 짧아 전투적인 자세를 연출하고 있다. 기하학적 형상의 휠은 22인치로 거대한 휠하우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타이어는 앞 285/40, 뒤 325/35다. 이 타이어 조합만 보더라도 DBX의 기본적인 섀시는 뉴트럴스티어에 가깝게 설계되었음을 예측할 수 있다. 만약 스퀘어 세팅을 했다면 언더스티어의 정도가 줄어들었을 것이다. 마음 놓고 편하게 타라는 애스턴마틴의 배려가 느껴지는 세팅이다.
자리를 옮겨 엉덩이를 만져본다. 리어 글라스를 한껏 눕혀놓고 밴티지처럼 하나로 이어진 테일램프가 눈에 들어온다. 클리어 램프인데 그레이 차체 색상과 잘 어우러진다. 어디선가 또 밴티지의 향이 난다. 밴티지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해치를 접어놨다. 이는 다운포스와 동시에 미적지수를 올려준다. 범퍼에 깔끔하게 매립된 머플러 커터는 제임스 본드가 적에게 쫓길 때 무기로 사용할 것처럼 생겼다. 여기에서 박력 터지는 배기 사운드가 뿜어져 나온다. 중저음 음색에 음량은 크지 않게 조율했다. 내가 더 어렸다면 사운드 볼륨이 더 컸으면 하고 아쉬워했겠지만, 이 정도가 세련된 것이다.
두툼한 도어를 열고 실내로 들어간다. 대칭형 레이아웃의 센터페시아가 안정감을 선사한다. 최고급 가죽으로 도배를 해놔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럽다. 선바이저와 천정에 달린 손잡이마저 정말 고급스럽다. 하물며 방향지시등 소리도 고급스럽다. 노크하는 것 같다. 묵직하면서 동글동글한 소리다. 이 소리를 설명하기 어려운데 유튜브에서 확인해보길 권한다. 모름지기 하이엔드 브랜드의 맛은 낯섦에 있다. DBX는 기어 레버 대신 버튼으로 드라이빙 레인지를 조절한다. 이 버튼 사이에 날개 배지가 그려진 엔진스타트 버튼도 멋스럽다. 스티어링 휠은 차체 사이즈와 장르에 비해 직경이 작다. 덕분에 스포츠카를 타고 있는 기분이 물씬 나며 큰 차를 모는 부담감을 주지 않는다. 페달은 플로어 타입이다. 독자들이 궁금하진 않겠지만 개인적으로 펜던트 타입보다 플로어 타입이 발도 편하고 보기에도 좋아 선호한다.
헤드레스트 일체형 시트는 컴포트와 스포츠성 모두를 아우른다. 사이드볼스터가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코너에서 운전자를 잘 잡아준다. 쿠션감도 좋아 장거리 이동에도 몸이 피곤하지 않다. DBX는 휠베이스가 3m가 넘는다. 덕분에 2열 공간이 만족스럽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 앉아도 레그룸이 여유롭다. 등받이 각도를 조절할 수는 없지만 착석감이 좋다. 유려한 루프 라인 때문에 헤드룸을 걱정했는데 부족하지 않다. 트렁크 공간은 632ℓ를 제공해 거창한 취미생활을 영유할 수 있다. 또한 2열이 40:20:40으로 나눠 접을 수 있어 실용성이 높다.
이제 DBX와 본격적으로 놀아보자. 기다란 후드 아래 담긴 파워유닛은 V8 4.0ℓ 트윈 터보다. 최고출력 최대토크 71.4kgm의 힘을 생산하고 9단 자동변속기를 통해 네 바퀴를 굴린다.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4.5초이며 최고시속은 291km에 달한다. 실제로 밟아보니 브로셔에 적힌 스펙에 거짓은 없다. 가속 페달의 명령에 스로틀이 재빨리 반응한다. 출력이 출력인지라 시원스레 나간다. 도로에서 이보다 강한 녀석을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세상을 추월할 수 있는 괴력이다.
특정 속도를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중저속 영역보다 고속에서 더 박차게 튀어 나간다. 아무래도 SUV인지라 실루엣을 유려하게 빚었다고 해도 차고가 높아 고속 저항이 심하다. 최고시속 300km 근처까지 가려면 후반에 기어비가 늘어지면 안 된다. 오히려 중저속에서 튀어 나가고 고속에서 맥이 빠지는 세팅보다는 이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운전하기 훨씬 편하다. 변속기는 이 매콤한 엔진에 장단을 잘 맞춰준다. 토크컨버터지만 변속 속도가 빠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저속에서 울컥거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메르세데스는 S클래스에서도 이 울컥거림으로 운전자를 불편하게 만드는데 애스턴마틴은 로직만으로 이를 해결했다.
고속안정감이 환상적이다. 속도가 올라갈수록 차체 무게중심이 노면에 깔린다. 덕분에 스티어링 휠에 손은 얹고 음악을 즐기며 평화로운 고속크루징이 가능하다. 신기한 것은 풍절음도 정말 잘 잡았다. 이는 꼼꼼한 방음과 윈드실드의 각도를 스포츠카 수준으로 잡아 놓은 혜택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보통의 SUV 설령 프리미엄 브랜드의 것이라 할지라도 시속 110km 이상에서의 바람 소리는 어쩔 수 없다. 대기업들도 놓치는 부분을 잘 챙겼다.
지상고가 높은 SUV지만 애스턴마틴 배지가 박힌 만큼 코너링 퍼포먼스가 기대가 된다. 최근 하체를 조율하는 실력들이 극에 달하면서 SUV도 꽤나 매콤한 실력을 보여준다. 애스턴마틴 역시 그러하다. 스티어링 기어비가 촘촘하고 피드백이 솔직하다. 덕분에 스티어링 휠을 이리저리 휘젓는 맛이 있다. 코너링 성향은 언더스티어다. 허나 그 농도가 진하지 않다. 진입만 서두르지 않으면 이상적인 라인을 만들 수 있다. 복합코너에서도 섀시가 엉키지 않는다. 한쪽으로 쏠린 중량을 반대쪽으로 넘기는 리듬이 자연스러워 미꾸라지처럼 잘도 탈출한다. 오랜 시간 동안 모터스포츠에서 쌓인 데이터를 DBX에 잘 녹였다.
잘 달리고 잘 도니 잘 서는 것만 남았다. 거대한 캘리퍼부터 믿음직스럽다. 제동성능은 출력과 섀시를 채찍질하기에 충분하다. 브레이크스티어나 노즈다이브를 잘 억제했고 고속에서 강한 제동이 연거푸 들어가도 쉽게 지치지 않는다. 페이드 혹은 베이퍼록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코너를 돌면서 브레이킹이 걸려도 차체가 안쪽으로 말리지 않는 게 가장 마음에 든다. 본디 영국차들이 브레이크 시스템을 오버 스펙으로 다는 전통(?)이 있는데 그 중심에 애스턴마틴이 있다.
달콤한 데이트는 끝났다. 애스턴마틴, 그리고 DBX는 기대 이상의 매력을 보여줬다. 조립 완성도에 있어서는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독일차 수준이었다. 원래 영국차는 개성이 강하고 그 나머지 부분에서는 허점이 많았는데 DBX는 운전자를 거슬리게 하는 부분이 전혀 없다. 시승하는 내내 잡소리 한 번 들리지 않았다. SUV 장르에 걸맞은 실용성, 명품 브랜드가 준비한 탄탄한 기본기, 운전자랑 잘 놀아주기까지 한다. 운전실력이 비루해도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게 DBX다. 여기에 애스턴마틴 브랜드 밸류와 희소성이 더해져 비싸고 좋고 시선 몰이까지 가능한 SUV를 찾는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 돈이면 다른 어떠한 것을 사겠다고 하는 이들은 애스턴마틴의 타깃이 아니다. DBX는 톰포드 슈트를 입고 오메가를 차고 애스턴마틴을 타는 상상이 현실로 이어지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SPECIFICATION _ ASTON MARTIN DBX 길이×너비×높이5039×2220×1680mm|휠베이스3060mm 엔진형식V8 터보, 가솔린|배기량 3982cc|최고출력550ps 최대토크72.4kg·m|변속기9단 자동|구동방식AWD 복합연비-|가격2억4800만원~